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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야드 Oct 08. 2024

진심 말미는 눈을 감을 때


<진심 말미는 눈을 감을 때>


병렬독서가 막 지겨우던 참이었다.

지은은 이제 막 상기된 얼굴로, 아침 바람을 맞으며 그녀가 손수 내린 핸드드립 맛을 보고 있다.


책이 손에 도통 잡히질 않으니, 눈길을 둘 곳이 마땅치 못하다.


베란다 저만치에는 위태롭게 금이 간 콘크리트 벽재 너머로 연속적인 박자를 쪼개어 만드는 성실한 이슬 내지 고인 물이 보인다.

새벽 여섯 시 반. 지은이 머무는 25년 된 구축 건물 단지 내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허하게 그리고 삼엄하게 깔린 새벽안개. 오늘은 밀린 손빨래를 좀 해야지, 하고 감격스러운 마지막 모금을 들이켠다.



오전 8시, 이따금씩 즐겨 입던 핸드워크 스웨터를 입었다. 가을인데 무슨, 코가 없는 루돌프가 애처로이 지은 등에 걸려있다. 고작 5년 지기 친구인데, 벌써 군데군데 함께 고생한 흔적이 보이는 듯.


지금은 가끔 생각나면 들르던 옛 다방을 가는 중이다. 벽돌건물 2층, 촌스럽게 자리 잡은 유리창 속 누런 차받침과 컵 속에는 흐리멍덩한 한약재 같은 커피가 들어있다. 그 이미지에 지은은 왠지 모를 매력구석을 느꼈다. 으, 아침바람은 역시 차네. 불쑥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오른다. <오픈시간 아홉 시 반>. 씁쓸한 입안 단맛을 느끼며, 오늘의 예감이 영 글렀음을 직감한다.



오늘같이 약속이 전무한 날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해 보려다 문득, 영속동에 위치한 읍내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학창 시절 자주 타던, 41번 주황색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꼬꼬마 친구들과 교복을 빼입은 누런 피부톤의 사춘기 꼬마들. 저 애들은 뭔 재미로 살지. 사춘기 나이이면 여자친구랑 XX는 해봤겠지. 영 쓸데없는 생각만 든다.


If i go back~(중략)~~

버스아저씨 취향 참 독특하네. 를 외치며 창갓바람과 함께 멜로디 2중주를 중얼거린다.  

둔탁한 바람소리와 함께 뒷문이 열렸다. 눈에 초점을 빼고 걸었다. 그냥 아무런 지체도 없이. 그냥 아무런 목적 없이 어딘가 걸었다.


현실과 거리가 먼 문장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지은이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었다.


울렁거리고, 쓰리고, 애가 타는 문장들이 주를 이뤘다.


설명하지 않아도 넌 나에게 돼. 변태처럼 날 캐물어도, 네게는 답해줄 수 없는 무언가도 있지만.

정체가 궁금하냐고? 난 그렇진 또 않아. 왜냐하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은 내게 남는 법이 없거든. 계속 그렇게 도는 거야. 우리가 살고자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그냥 고개 처박고 자시고 말고 간에, 알아먹겠어? 우주사랑, 평화제일, 아가페적 사랑? 그딴 게 뭐가 중요한데?

계속 정처 없이 떠도는 마음이 너의 정체인 거고,

너의 우주인 거고, 너의 모빌인 거고 뭐 그런 거 아니겠냐고.


오늘은 이쯤만 하자.


눈감고 멍해진 회색빛 하늘을 응시한다.


벌써 밥 먹을 시간이 다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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