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좋은 날
오늘은 일어나서 러닝 하러 가야지라고 어제 다짐을 했건만, 오늘의 다짐은 등산이 되어버렸다. 사실 뛰는 거엔 별 흥미가 없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뛰고 나면 개운할 것 같아서 그랬을 뿐이다. 이 동네 와선 등산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일단 가깝고 사람 없을 것 같은 자연친화적인 곳을 찾아봤다. 눈에 딱 들어온 청계산. 이곳은 서울이면서 경기도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건 두 지역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곳을 자주 찾겠다는 생각을 못 하고 무작정 갔다. 가보니 웬걸. 작은 도시에 있는 산의 느낌만 생각하고 갔던 나는 이 동네는 산에도 사람이 많구나 새삼 느꼈다. 공영주차장에 딱 한자리 남은 것을 운 좋게 내가 차지했다. 시작이 좋았다. 근데 주차장에서 등산로 입구까지의 거리가 25분이나 찍히는 걸 보고 힘이 빠졌지만, 빠지거나 말거나 일단은 가본다. 젊은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다들 등산복에, 등산화에 잘 장만들해서 오셨다. 나는 그냥 동네 러닝 뛰는 차림으로 왔는데. 창피할 게 전혀 없는 것에 나는 이따금 창피함을 느끼곤 한다. 그렇게 등산로 입구로 향하는 굴다리에선 어르신들이 나물부터 과일, 옥수수, 떡, 내가 좋아하는 강냉이 등 다양한 것들을 팔고 계셨다. 이런 정겨운 풍경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 몸속엔 시골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등산은 시작되었다. 초입부터 싱그럽고 짙게 색을 내뿜는 나무들의 말 없는 환영을 받으며 걸어 올랐다. 피톤치드로 나를 정화시키려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산에 오면 왠지 선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 대자연 앞에서 악할 순 없을 것이다. 아빠와 어린 딸 둘이 같이 산을 오르는데 보기 좋았다. 아마 아빠가 가자고 가자고 꼬시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나도 어렸을 때 항상 아빠가 등산을 데리고 다녔다. 등산 가자고 하면 싫어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점점 크고 나서는 귀찮아 하긴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산에 오면 나는 향은 항상 같다. 아빠랑 산을 갔다 오면 항상 맛있게 점심을 먹곤 했었다. 메뉴는 짜장면 말고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내 앞에 있던 딸들과 아빠를 제치며 앞장서가는데, 뒤에서 아빠가 어떤 이야기를 하니까 딸이 아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모습을 보았다. 요즘 아이들은 정보 과잉 시대라 그런지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제 비가 왔던 터라 땅이 질퍽질퍽했다. 맨발로 밟았으면 느낌이 참 좋았을 것 같다. 땅에 꽃잎 같은 것들이 막 떨어져 있어서 보니까 아주 작은 애벌레들이었다.이 친구들은 멀리서 보아야 이쁘다. 초반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오르다가, 오르다 보니 생각은 없어지고 다리 근육에 집중이 되었다. 한 시간 코스라 정상에 금방 도착하였다. 날이 흐려 전망은 좋지 못했지만 맑은 땀을 흘려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내리막길은 별 힘들이 지 않고 금방 내려갔다. 진흙에 몇 번 미끄러질 뻔했다. 등산은 데이트 코스로 참 좋은 것 같다. 같이 땀을 흘리며 정상으로 향해 가는 여정. 더욱 돈독해지지 않을까 싶다. 하산한 후 굴다리에서 찐 옥수수 빛깔이 너무 맛스럽게 생겨 하산 기념으로 사 먹었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상쾌한 기분으로 집으로 가 늦은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어제 된장술밥에 사용한 남은 재료들로 된장찌개를 해 먹었다. 이제는 뭐 레시피 안 봐도 뚝딱이다. 밥 솥에 밥이 애매하게 남아 편의점으로 가서 오뚝이 현미밥 1+1에 득템했다. 편의점 직원분이 계산 후에 인사를 하는데 마지막 인사말이 "좋은 하루 되세요"였다. 하필 나는 인사만 듣고 돌아 나오는데 내 뒤통수에 그런 좋은 말을 하고 나는 차마 답을 하지 못한 채 나왔다. 용기를 갖고 다시 들어가 나도 좋은 하루 되세요 하고 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는 솟지 않았다. 좋은 하루되세요라. 집 가면서 곱씹어 봤다. 그 얼마나 좋은 말인가. 안 좋은 하루도 좋아질 것만 같은 말이다. 다른 사람의 하루가 좋았으면 하는 그 말이 얼마나 따뜻한지. 사실 그런 말을 듣기가, 또 하기가 쉽지 않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뒤에 말을 덧붙여 좋은 하루되세요 하는 게 입에 착 붙질 않는다.또 그런 너그러운 마음 없이는 도무지 나오질 않는 말이기도 하다. 나도 전에 일을 했던 곳에서 손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라고 처음 쓰기 시작해 봤다. 다른 사람의 하루가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나를 위해서 이기도 하다. 그런 따뜻한 말을 건넸을 때 나에게도 그 따뜻함이 쌓이기 때문이다. 간혹 더 좋은 인사를 받게 될 때도 있고 따뜻한 인사를 받게 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에 기대를 품게 되는 것도 있다. 사실 이게 말이 길어지게 되다 보니, 또 손님들은 물건을 받고 바삐 가버리시기 때문에 말을 굉장히 빨리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면 말이 꼬이기도 한다.또 빨리하다 보면 그 말의 진정성이 안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말은 사실 되게 여유있이 해야 그 말의 진정성이 전달되지 않나 싶다. 편의점 직원분도 내가 빠르게 물건만 받고 가는 바람에 내 뒤통수에 그런 좋은 말을 건넸지만 그 말에 진정성은 여운이 남았다. 혼잣말로 그 말을 되뇌다 "좋은 하루 될게요"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와서 맛있게 된장찌개와 계란 프라이를 해서 먹었다. 인스타에서 청계천 야외 도서관 한다는 걸 보고 떠날 준비를 했다. 비 온 뒤라 날씨도 딱 좋았다. 선선하이. 오늘은 버스를 탔다. 마을버스 한번. 광역버스 한번. 버스 타는 재미가 있다. 특히 광역버스는 여행 가는 느낌이 든다. 난 주로 앞에 앉는 편이고 기사님 쪽이 보이는 자리를 선호한다. 큰 창으로 편하게 주변을 구경할 수도 있고, 기사님 운전 스타일이 가지각색이기 때문에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듣다가 선잠에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다 와있었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네이버 지도를 잘 애용하고 있다. 걷다 보니 날씨가 더워진 건지 걸어서 더운 건지 더워졌다. 사람들은 내 기준에 딱 알맞은 만큼 있었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이 좋은 날 밖에서 책 읽는데 커피가 빠지면 쓰나. 아메리카노는 쓰다. 쓴 것은 몸에 좋다고 하였다. 글을 쓰는 것도 좋을 테지. 라임이다. 아무튼 근처 카페를 찾아보았다. 컴포즈가 있길 바랐지만, 투썸이 옆에 있길래 투썸에 갔다. 요즘은 키오스크 주문은 기본인데다 진동벨도 키오스크가 건네준다. 어디든 오래간만에 찾으면 기계들이 계속 업그레이드가 돼있는 듯하다. 또 일상을 지내다 카페를 가든 마트를 가든 식당을 가든 또 어떤 것이 나를 반길까. 커피를 마실 땐 빨대를 안 쓰는 편이다. 입을 대고 마실 때 윗입술에 닿는 그 느낌. 변태 같지만 그게 내가 커피를 즐기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셔야 맛있다고 스스로 세뇌를 시켜서인지 정말 더 맛있다고 느낀다. 아무튼. 이제 막 야외 도서관을 준비하는지 의자를 깔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좋다. 포장해서 나오니 의자가 깔려있고 좋은 하루다. 스티로폼으로 된 의자는 생각보다 편했다. 하천은 맑았고, 물고기들도 많았다. 당장이라도 저 맑은 물에 들어가 스노클링을 하는 상상을 해본다. 햇볕은 건너편 쪽에 쐬어지고 내 쪽은 그늘이 져있어서 선크림도 안 발랐는데, 좋은 하루다. 앉아서 물멍도 하고 주변도 둘러보고 커피 살짝 홀짝이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바람종에게 속삭이는 걸 본다. 아마 대시하는 것 같다. 그러니 종이 신나서 딸랑딸랑 춤을 춘다. 어느 정도 눈요기를 하니 책이 이제 자기도 봐달란다. 난 또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아주 진득한 데이트를 즐겼다. 작가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게 그렇게나 재미있다. 이상하게 집에선 책이 잘 안 읽히는데 카페나 집이 아닌 곳에서 읽으면 참 잘 읽힌다. 그렇게 책을 덮고 풍경을 보다 또다시 읽기를 반복하다 보니 몇 페이지 안 읽은 책이었는데 반 이상을 읽어버렸다. 하마터면 한 권 다 읽을 뻔했는데 참았다. 그러고는 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행복감을 느껴본다. 지금 이대로 충분함을 느낀다. 그걸로 오늘 내 하루는 된 거다. 덕분에 좋은 하루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