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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프라드블래너, 에런 M. 글레이저, 『슈퍼팬덤 : 소비자는 어떻게 팬이 되는가』
(세종연구원:2018)
좋아하는 것을 혼자 좋아할 수 없는 사람. 나는 종종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이것은 팬덤을 정의하는 나의 언어이기도 하다. 지금껏 팬이라는 정체성으로 나를 소개하기 위해 나에게 팬덤이 어떤 의미인지 정의하는 일을 여러 번 선행 했다. 자기소개서의 한 줄이 되기도 했고, 기획 의도의 근간이 되기도 했으며, 내 모든 행위의 목적으로 삼기도 했다. 내가 뮤직 비즈니스와 케이팝 아티스트를 어떻게 좋아했는지 곱씹어보고 그 특성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선호와 강점, 특징과 가능성을 알 수 있었다.
도서 『좋아하는 마음이 우리를 구할 거야』는 ‘사적인 서점’ 정지혜 대표가 BTS 팬 아미라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일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책으로, 케이팝 팬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음악 스타트업 기업 ‘스페이스 오디티’에서 서비스 ‘블립’의 채용 공고를 내면서 팬으로서의 경험과 관련한 자기소개를 요구했는데, 김홍기 대표의 후일담에 따르면 이 책이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런 거야’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먼저 그것을 언어로 정의한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대게 지표로 삼는 법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말하고 나누어야 하는 이유다.
나의 경우, 가장 처음 좋아했던 아티스트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데뷔한 세븐이었다. 돌잡이로 장래를 점치는 것은 단순 의식적 행위라지만 거부할 수 없는 본능 또한 깃들어 있는 것일까. 세븐의 1집 ‘Just Listen...’을 CD판이 닳도록 들었던 시절의 나는 이미 ‘음악이 좋아야 팬이 된다’는 강력한 본능을 따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외모가 마음에 들면, 춤을 잘 추면 팬이 되기도 한다는데 그때부터 나는 무조건 음악이 좋아야 팬이 됐다. 그 이후 라이프 사이클을 거치면서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바뀌어 왔고 그 아티스트와 교감하는 메시지의 내용 또한 달라졌다.
10대 내내 좋아한 동방신기를 통해서는 또래들과 어울리고 소통하는 법을 배웠고, 개인적 어려움을 견디는 일에 가족과 같은 마음 의지할 데로 삼기도 했다. 20대 진로 결정의 고민 한가운데에서 만난 윤지성은 꿈을 향해 노력하는 동지의 느낌이었고, 그 이후 몬스타엑스는 조금 더 열정에 불을 지피는 데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세븐틴과 [지속하는 힘]을 나누고 있다. 아티스트의 8년 차 활동 시기에 팬이 되고, 올해로 10년 차를 함께 하게 된다. 온 맘으로 좋아하는 일을 했고, 그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알았고, 인생이 이렇다는 것을 인정도 해야 하는 인생의 마라톤에서 그들을 페이스메이커 삼아 즐거운 인내를 배워가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팬덤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대상은 당신 삶의 어떤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 대상이 얼마나 대단한 커리어를 자랑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당신을 가장 감동하게 만들어 팬이어서 다행이라 느끼게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궁금하다. 당신을 가장 열정적으로 만들어 삶에 원동력을 주는 순간이 언제인지 궁금하다. 당신이 어떻게 다른 팬들과 연결되고 싶고 어떤 방식으로 교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수많은 팬 대상 가운데 당신을 팬으로 만든 그 지점에, 당신 삶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잘 살피고 내게 벅차게 말해준다면 좋겠다.
팬이 되는 것은 인간적인 현상이다. 인간은 항상 서로에게뿐 아니라 자신과도 연결되고자 하는 열망을 느껴왔다. 그것은 우리의 뇌 속 아주 깊숙이 내재된 본능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자신이 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문화의 단편들을 찾아 주위를 살피면서 그런 행동을 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 결속을 다져줄 외부 대상을 찾을 수 있으면 그날 밤 저녁을 먹을 확률이 더 높아졌다. (p. 27)
모든 팬덤은 행사에 참여하든, 줄을 서서 기다리든, … 가수의 콘서트를 관람하든, … 직접적인 교류를 지향한다. 우리는 자신이 관심을 갖는 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직접 입증하고 싶어한다. (p. 63)
맥락은 팬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아주 특별한 ‘요소’이며 팬 대상을 상업적 실체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팬 대상에 대한 소문, 팬 대상을 둘러싼 논쟁, 팬 대상을 다루는 소셜미디어 포스트, 팬 대상으로 만든 콘텐츠와 팬 대상을 위해 만든 콘텐츠, 팬 대상과 관련해 생겨나는 의식과 특수한 언어, 팬 대상에 대한 순례와 이후의 대화와 기록. 맥락은 팬덤을 결속시키는 접착제다. (p. 97)
팬덤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동기에서 시작된다. 바로 팬 대상과 개인적, 인간적 측면에서 공감하고 싶은 욕구와 비슷한 특성과 목표를 공유하는 더 큰 집단의 일원이 되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욕구다. 우리는 자신이 고유하고 특별하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하면서도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p. 176)
다수의 착각은 가장 큰 목소리로 불평하는 팬들이 종종 가장 확실히 무시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팬들은 항상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교한 플랫폼들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플랫폼들의 특징은 종종 가장 큰 목소리나 가장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견해만 들린다는 것이다. (p. 317)
“사람들이 원하는 것 말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줘라.” (p. 319)
팬 집단은 자연스러운 생명주기를 지닌다. 팬들은 각자의 삶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면 여러 팬 집단을 옮겨 다니면서 새로운 욕구에 더 잘 부합하는 새로운 대상에 애착을 갖는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p. 338)
『슈퍼팬덤』을 공동 집필한 두 저자 조이 프라드블래너, 에런 M. 글레이저는 봉제 인형 기업 ‘스퀴셔블’을 운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하다. 인형 사진을 보면 눈에 익을지도 모르겠다.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기업가가 말하는 팬덤이라니 응당 수익화로의 연계 방법을 얘기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부지런히 계속해서 팬덤을 정의하고 그들의 특성을 정리한다. 사회적 맥락에서, 인문학적 시선으로, 다양한 입장으로 자리를 옮겨 가며.
지금까지 읽은 팬덤과 관련한 책 중에서 곁에 두고 계속해서 참고해 가며 읽고 싶은 책으로 단연 이 책을 꼽겠다. 팬이 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고찰이 팬의 언어로 상세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개인의 역사에서 팬으로 성장하고 직업의 역사에서 팬을 상대로 일하며 느낀 바가 적확한 표현으로 서술되어 있어, 팬덤에 관한 이해도를 높이고 팬덤 전략 수립을 위한 합리적 접근이 필요한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집단 결속을 촉진하는 방법에 관한 대목이다. 200페이지를 넘어간 시점에서 시작되는데, 이제껏 (비교적) 긍정적인 측면의 팬덤에 관한 정의를 마쳤다면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팬덤과 기업 간의 긴장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응대해야 하는지 안내한다. 팬덤의 역학 관계와 미묘한 심리, 징계 상황까지. 대단히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정수다. 역할극 안에서 각자의 캐릭터를 지키지 않을 때 결국 극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마치는 말에서 스퀴셔블의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이 책의 완독을 더욱 기쁘게 한다. ‘모든 스퀴셔블 팬들에게, 여러분의 소중한 인형이 영원히 보송보송하기를’ 팬덤에 관한 이야기로 이렇게나 훌륭한 책을 쓸 수 있는 대표들이 운영하는 회사라면 팬들의 인형이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영원히 보송보송할 수 있도록 지켜주겠다는 말이 무척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좋아하는 마음을 인형으로 간직하고, 인형으로부터 좋아하는 마음을 길러내는 스퀴셔블의 팬더머블한 노력이 계속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