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아들바보 문화가 평화적으로 무너진 순간
조카가 생겼다. 꼬물꼬물한 입모양과 손가락에 미소가 절로 생긴다. 딸인 조카를 보는 눈빛에는 기분좋은 시선이 가득하다. 주변 사람들은 딸이 좋다고 한다. 자기도 딸을 낳고 싶다고 한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신기한 사람 중 하나다.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그리 축복받지 못했던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아들 낳으려고 심기일전해서 낳은 딸이라서, 잘못했으면 남아선호사상 아래 태어나지도 못할 뻔 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들이 대세가 아닌 세상. 딸이 대세인 세상.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벌써 익숙해졌다, '딸바보'라는 말. 아들보다 딸을 더 바라게 되었다는 생각이 묻어나는 그 표현이 아직은 내게 늘 놀랍기만 하다. 말뿐만은 아니다. 2013-2014 남아출생성비가 105 정도로 역대급으로 낮아졌다는 건, 남아들이 덜 태어나서라기보단 여아들이 예전보다 많이 태어나서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직도 셋째 이상으로는 조금 비정상적으로 남아성비가 높다곤 하지만 둘째는 오히려 남아성비가 조금 더 낮은 편이며, 1980년대 이후로 측정해온 성비가 103-107의 '자연스러운' 정상 성비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특히 1990년대의 116.5 같은 놀라운 수치와 비교하면!) 표현만 생긴게 아니라 주변에서도 딸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습도 보았고, 이렇게 수치까지 보았는데도 아직 조심스럽다. 정말 이제 딸을 좋아하게 된 시대가 된 게, 문화가 자리잡은 게 맞는걸까?
조선시대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 아내에게는 쫓겨날 수도 있는 칠거지악이었고, 또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아들, 그 중에서도 장자를 우선시하는 문화는 더욱 깊이 자리잡았다. 사실 딸만 낳게 되고 아들을 낳지 못했던 건 엄밀히 말하면 아내의 탓이라고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들이 생기는 유전자는 남편이 결정해주는 것이기도 하니까. 앞서 1990년대 여자와 남자 아이 성비가 비정상적으로 불균등했던 건 태어나지도 못하고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스러진 생명이 많이 숨어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아들들에게 한소리하려는 것은 아니다. 딸들이 서운하고 야속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들들은 또 잔뜩 어깨에 놓인 의무와 관습 때문에 힘겨워해야 했다. 강인한 이미지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같은 것은 모두에게 꼭 맞는 옷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남자나 여자나 결국은 모두 그 시대 문화의 피해자인 건 마찬가지이다. 요즘은 덜 해서 다행이다. 빈말이라도 딸이 더 좋다는 말, 내게는 울림이 크다. 딸같은 아들, 아들같은 딸 호환이 되는 느낌이기도 하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태어나게 해달라고 해서 인생이 시작되는 건 아니다. 내가 살 곳, 가족들, 나의 성별과 어느 정도의 능력은 처음부터 세팅이 되어있다. 그 설정값은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닌데 그 무게는 반드시 짊어지게 되어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말도 맞다. 우리는 주인공으로서의 설정값을 묵묵히 견디면서 인생이라는 시간과 무대 속에서 이야기를 펼치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끝내고 만다.
어느 집 큰 아들에겐 딸이 둘이나 있었다. 주변 친척들은 더 늦기 전에 한번 더 아이를 가져서 이번에는 아들 한 번 보자고 부추겨댔다.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볼 수 없다면 마음으로는 밖에서 낳아오기라도 해도 괜찮다는 심정이었다. 큰 아들과 그의 아내는 10년만에 큰 맘먹고 아이를 낳기로 했다. 하지만 왠지 뱃속에 있을 때는 느낌이 아들인 것만 같았는데 낳고 보니 또 딸이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의 동생은 똑같이 딸이 둘인데 느즈막히 셋째로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은 더더욱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채 100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아내는 노산으로 아이를 낳은 탓에 잔뜩 부은 몸으로 동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어왔다. 그녀라고 상황이 즐거운 건 더더욱 아니었다. 작은집에서는 셋째로 아들을 낳았다면서 큰 아들과 그의 아내에게 자랑을 해댔다. 큰 아들은 계속 술을 달고 살다가 하루는 직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의사는 그의 사정을 듣더니 아이가 팔다리는 멀쩡하게 있는지 문제는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멀쩡하고 문제는 없다고 하니 의사는 그럼 다행이고 됐다고 했다. 물론 그에겐 그냥 다행이고 괜찮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더니 의사는 지나가는 소리로 '아들씨가 없나보네요'라는 말을 했는데 큰 아들은 갑자기 번뜩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한번도 그렇게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의 이런 인생도 있다. 그래, 이것은 나의 인생이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이거나 혹은 어디서 들어본 누군가의 인생일 수도 있다.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이자 슬픔, 불안과 야속함을 불러온 나의 출생비화이자 수많은 이의 출생비화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타까운 존재인가? 나만 안타까운 존재일까? 만약 잘못이 있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누군가만의 잘못인가? 그렇게까지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안타깝다. 모두의 잘못이면서도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 문화라는 게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보아도 절절하게 무섭다. 그 시대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한 사람에게 각인처럼 기억을 남기고, 그 사람이 다음 세대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생각해보면 무시할 수가 없다. 문화는 기술보다도 느리게 변화하기에 어떤 문화가 바뀌기 전까지 그 문화로 인한 수혜자와 희생자는 잔인하게도 필연적이다. 이렇게 성별, 가족환경, 시대라는 설정값 내에서 고통받는 것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깨어있는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 기억하시라, 우리는 설정값은 정해져 있지만 많은 것을 바꿔나갈 수 있는 영향력있는 멋진 주인공들이라는 걸.
다행히도 그런 마음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서 '아들바보'보다 잘나가는 '딸바보'라는 표현, 혹은 그냥 아이라면 둘다 좋은 현상이 문화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이렇게까지 변하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걸 보고 듣고, 느끼는 입장에서는 어쩌면 이렇게도 변하지 싶을정도로. 남아선호사상, 아들선호문화에서 살아왔던 모든 사람들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 싶다. 좋은 의미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다행이다.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우리 조카를 포함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성별 상관없이 모두 축복받는 주인공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