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10년만에 그에게 연락이 왔다

by havefaith

출구를 나왔을 때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는건지 되짚어보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갑자기 몸이 안좋아서 그렇다고 해도 그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바쁘다는 핑계로, 사실은 그를 만날 시간같은게 없다는 말을 돌려서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잘 살아왔는데 왜 흔들어놓는걸까. 고민하던 중에 그녀의 핸드폰이 꺼지고야 말았다. 이렇게 손발이 안맞아서야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말도 없이 약속을 파토낼 위인은 못되었다. 억지로 가던 중이었던가.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당한 피해자로 걸음을 내딛기로 했다. 선량한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길목으로.


10년만이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지나버린 것이었다.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다해 왔다. 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대체 10년만에 하는 사과는 어떤 의미일까. 굳이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사이였던가. 그와 그녀가. 그녀는 출구 근처에 있다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햇볕이 좋아서 벤치에 앉아있다고 했다. 여전히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다가왔다. 아주 오랜만이었고, 조금 변한 것 같았다. 아주 꼴도 보기 싫을 줄 알았는데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 역시 머쓱했는지 쭈뼛쭈뼛한 걸음걸이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야."

"그러게. 오랜만이네."

어색함을 쫓아보려는 듯 둘은 서로 가게에 들어가는데 신경을 돌렸다. 밥 한번 먹자는 뜬구름잡는 소리처럼 그녀는 너무나 익숙하게 잘 지냈냐며 질문을 했다. 대충 넘어갈 줄 알았던 그의 답변은 예상외로 사는게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그는 10년만에 자신의 인생이 힘들어져서 그녀를 찾은 것이었을까. 여하튼 의외였다.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았기에 10년만의 첫마디가 인생푸념일까 싶었던 것이다. 마주보지 않고 옆에서 걸으니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의 말대로 오랜만에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그녀는 평상시처럼 먼저 길을 찾고 안내하고 싶지 않았다.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그였기에. 그 역시 그걸 아는지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 '이쪽이야'할 뿐이었다.


역시 그녀와 그의 만남은 순조롭지 않았다. 기껏 브레이크 타임을 피해 고르고 고른 가게는 지금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답변을 했다. 차라리 익숙하지 않은 곳을 잡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잘 모르는 동네는 이래서 문제다. 그녀의 단골집에 그를 발들이고 싶지 않았다. 기억에 오래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녀는 생각에 잠겨있다가 그럼 카페에 먼저 갔다가 저녁을 먹는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어차피 지금 대부분 브레이크 타임이라 가게가 열려있어도 열린 것이 아니라고. 돌이켜보니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만났으나 만난게 아닌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날. 가게는 열렸으나 열린 것이 아닌 날. 그래서 그녀는 노력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목을 잘 모르는데 평소답지 않게 지도를 찾지도 않았다. 핸드폰이 꺼졌다는 핑계로. 큰 길은 나오게 되어있다는 허세로. 그렇게 길을 찾았다. 그녀 딴에는 꽤나 무관심하고 무기력한 결정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다고 했다. 만물상 같은 곳이었다. 음료를 자연스레 함께 계산해버리는 것을 보고선 저녁은 그녀가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얻어먹을 순 없는 일이다. 양이 많아서 이 곳이 좋다는 그의 말답게 아주 큰 음료를 받아들고는 그녀가 먼저 질문했다. 어떻게 지냈는지. 이 정도 되면 병이다. 진행욕심도 아닌데 그녀는 여전히 그와 가만히 마주보는게 익숙하지 않았다. 말의 흐름에 어색함을 흘려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전공을 두번이나 바꿨다고 했다. 중간에 바꾼 전공에선 방송에서나 보던 기합으로 다치고 말았다고 했다. 씁쓸한 지경이었다. 상처를 주었다고 그가 다치길 바란 것은 아니다. 단체기합을 받다가 쓰러지고 말았던 그는 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시끄럽다는 선배의 말에 죄송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그녀같으면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애당초 그녀라면 그런 거지같은 사람이 시키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며 뛰쳐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를 바닥에 인형처럼 버려두고 무식인지 용기인지 모르게 그들은 병원에도 금방 데려가지 않고 열심히 몸을 주물렀댄다. 사과같은 건 없었다고 했다. 기껏 돌아오는 말은 우리 때는 더했다는 애교심넘치는 지도교수의 말뿐.


그녀의 오지랖은 함께 분노하였으나 그에게 차마 드러낼 수는 없었다. 담담한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예전과 다를 것이 없다. 그녀를 만난 건 결국 자신의 인생을 토로하기 위함인가. 이 만남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는 생각이 중간중간 방해했다.


"학과에서는 돈이 없다고 손해배상은 못해준다고 했어. 소송은 오래 걸린다고 부모님이 걱정하셔서 결국 합의했어. 학교에 소송을 걸려고 했더니 바로 돈을 주더라."


그렇게 그는 그 곳의 사람들이 질이 나쁘다면서 다시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얼마나 그들이 아름답고 멋진지에 대해서도 신나게 떠들었다. 성질이 나쁘고 아름답고 멋진 관상용 인간들인가. 그녀에겐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여전히 멋있고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이겠지만 그녀에게 아픔을 준 그런 사람. 애당초 그녀는 '질나쁜 사람'이란 단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질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성격이 괄괄하고 드세며 무대뽀이면 질이 나쁜 것인가. 무던하게 고개숙이며 사는 인생은 질이 좋은 것인가.


화제거리가 떨어지고야 말았다. 대화는 비어가는 컵처럼 잠시 정체되었다. 그가 연애얘기를 끄집어 냈다. 좋은 선택이었다. 연예기사가 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지. 관심없는척해도 재밌는거라. 누가 누구랑 사귄대. 깨졌대. 바람을 피웠대. 소설과 드라마를 현실로 만나는 기분이니까. 그의 여자친구는 썩 좋은 사람은 아닌 듯 했다. 내로남불. 불경의 한마디같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번호를 주고 연락을 하는데 정작 그의 핸드폰은 감시한다고 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여자친구는 되고 남자친구는 안되는 것. 같은 여자라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뜯어말렸다고 했다. 동감이었다. 냉정히 말해 헤어지는 게 좋을 사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헤어지지 않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직 헤어질 것 같진 않은걸. 그렇게까지 정이 떨어지지 않은거지."

"벌써 1년을 만났는데 헤어지려고 생각하면 막막해.

이제 척하면 척 내가 뭐하고 싶은지 잘 아는 사람이거든."

"맞춤형으로 최적화한거네."

"맞아. 사실 다른 사람 만나서 또 이 과정 반복하기도 그렇고. 정때문인 것 같기도 해. 많이 바뀌었어. 헤어지자고 할 때 걔가 펑펑 울면 마음이 아파서 못 헤어졌어. 결국엔 나도 울고 걔도 울고."

"어차피 결혼할 사이가 아니면 헤어지게 될텐데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만나면 헤어지는 사람이 많을텐데."

"요즘엔 그래서 옛날만큼 좋지 않다고 솔직하게 얘기해. 가끔 전에 만난 사람이 생각난다고 하니까 놀란 기색이더라구. 그 사람은 남자문제는 없었는데."

"그래도 만나면서 좋은 점도 많았겠지."

"웃긴게 벚꽃놀이를 같이 갔는데 한참 우물쭈물하더니 사귀자는 거야. 그래서 좋아하냐고 물어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


벚꽃 흩날리는 밤의 고백. 클리셰가 따로 없지만, 실패할 일이 없을 구조같기도 했다. 은근한 미소를 띈 그를 보면서 그녀는 답은 정해져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런 것을 감당할 성격이라 생각하진 못했지만 그녀에게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이별을 고하지도 못할 것이다. 자승자박이다.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답을 알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있으니까. 10년전이라면 그녀는 이렇게 매정하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 땐 그녀가 더 정에 목말랐다. 그를 기다리고 챙겨주고 신경쓰느라 그녀 자신은 뒷전이었다. 왠지 뒤바뀐 느낌이었다.


한창을 여자친구 뒷담화를 하다보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호기롭게 결국 가게를 찾았다. 아직 단골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나는 곳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치 날씨나 요즘 뉴스 얘기를 하듯이, 신변잡기였다. 어렴풋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묻지 않으면 먼저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그녀에게 만나자며 보냈던 연락과도 달랐다.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 때 너한테 미안한 게 너무 많아서.'

'잘 기억도 안나는 걸. 너무 신경쓰지 마.'

'고마워. 시간되면 한번 만날래?'

'만나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거야?'

'그런 건 아니야'


그는 알 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그 연락으로 복잡한 하루를 보냈는지. 그리고 잊었던 기억이 저 구석에서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를 만나기로 한 건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라는 말 때문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이 10년만에 사과할 일은 없다. 특별한 이유가 없이 10년만에 만나자고 할 일은 없다. 그의 죄책감이든 그의 인생이든, 어느 한 순간 그녀를 불러일으킨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걸 찾기 위해 만났으나 자리를 일어서는 순간에도 잘 알 수는 없었다. 조바심이 났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나서야 한다.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한사코 더치페이를 하자는 그에게 말했다.


"10년치 밥 한번 샀다고 생각해"

"아니 그래도...."

"그래도 먼저 연락을 줘서 10년만에 만났잖아."

"...고마워. 잘 먹었어."


금방 나오진 않았지만 그는 이윽고 말을 덧붙였다. 출구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내가 옛날엔 지금 생각해도 이해못할 일들을 많이 한 것 같아."

"병이래잖아. 그 나이때. 나도 그 땐 이상했어 지금 보면."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그 때 다른 애들이랑 더 놀고 싶어서 너한테 못되게 굴었던 것 같아. 그러다 멀어지게 되고."


역시나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와 그녀가 멀어진 건 그의 한 마디때문이었다. 그 다른 친구까지 셋이 친해졌을 때, 어느 날 그 친구는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것같기도 하고 험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에이, 알잖아. 그럴 일 없는 걸. 지내보고도 몰라."

"그럴까? 너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런 것도 같고."


하지만 다음 타자는 그녀였다. 그 친구는 그가 그녀를 험담하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두번이니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면 의아한 일이다. 그녀는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 진심은 아니었다. 장난삼아 시험같은 거였다.


'같이 지내는동안 고마웠어. 싫은 게 있으면 직접 말하지 그랬어.'


그녀가 그에게 예상한 반응은 무슨 소리냐며 반문하거나 혹은 잘못된 얘기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받은 답장은 달랐다.


'너 진짜 웃긴다.'


다른 말도 아닌 그 한 마디에 그녀는 그와 인연을 끊은 것이었다. 갑자기 그녀와 그 사이가 갈라진 느낌이었다. 그녀가 떨어져나가고 나서 그 친구와 그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걸 보았다. 그 친구도 그도 그녀를 먼저 찾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겠지. 그 친구는 그녀를 만나면 그를 험담하는 친구였다.


그가 그 말을 하고 출구를 다다르는 그 짧은 거리에서 그녀의 기억이 멈추었다. 궁금증이 풀렸다.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 마지막 말 한 마디는 기억할 줄 알았는데. 받은 사람은 기억하는데 한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끄집어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답을 얻었다.

그가 지금 여자친구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그것은 그가 자처한 벌이기도 하다. 많이 울고 많이 답답해하고 서운해할 수 있는 벌. 그리고 그는 기억하지만 상대방이 그만큼 기억하지 못하는 벌.


선물이라도 하나 주고 싶다는 그였다. 향초를 주고 싶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그는 그와 만나기 위해 고민하며 올라온 출구가 아닌 다른 출구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거절했다. 향초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좋아하는 향이 없다고. 그녀는 이미 선물을 받았다. 10년어치의 선물. 그는 못내 다음에 만나면 자신이 좋아하는 향으로 주겠다고 했다. 그러마 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날 수야 있지만 그는 그녀를 더 이상 흔들지 못할 것이다. 그녀에겐 이제 그가 좋아하는 향이, 여자친구가, 전공이,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에 볼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는 그가 데려다 준 다른 출구로 발을 내딛었다. 당당한 피해자도 선량한 가해자도 중요하지 않았다. 참 웃기는 친구야. 그치.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녀를 위한 어색하지만 편안한 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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