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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Sep 16. 2018

그대여,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해라 <펀치 드렁크 러브>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상사가 푸딩병에 걸렸어요(평생 먹고도 남을 것 같아요)

  이 남자 어디가 좋았어요? 묻고 싶었다. 리나는 래리의 어릴 적 사진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 중반만 해도 말이다. 이게 뭐야, 하면서 조금은 묻고 싶었다. 래리가 어떤 사람 같아? 남자친구로 소개시켜주기 말이야, 라고 물으면 못된 대답을 하게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에요. 착하고, 다른데 눈 돌릴 줄 모르고, 성실하고, 순수하죠. 그런데 뭔가 어색하고 불편해하긴 해요. 사람을, 특히 여자를 말이에요. 본인도 그런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알 것 같다. 리나가 래리를 왜 좋아하는지. 그리고 래리가 왜 리나를 좋아하는지도.


  가끔 아무 이유도 없이 펑펑 울고, 가끔 자기 자신이 마음에 안든다는 게 '정신과적인' 상담이 필요한 것이라면 나는 래리와 나란히 설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증상이다. 우리가 힘들어하고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 중요한 건 우리가 아파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그 지겨운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 왜 래리는 누굴 만나는 걸 두려워하고 소심하면서도 뒤에서는 물건을 부수는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는 걸까?


말도 마세요, 누가 청일점이 좋은거래요(1남 7녀 가정의 한탄)

  소심하고 여린 성격일수록 래리의 가족들이 하는 식의 장난에 익숙해질 수가 없다. 일곱명의 누나, 여동생은 그를 어딘가 한심하게 보고 있다. 장난이 과하다.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싫어하는 건 사실 알고 있었잖나? 못된 사람이 되는데 생각보다 아주 못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하면 충분히 못된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기억못하겠지만 들은 사람은 생생히 기억하지 않는가? 꼬치꼬치 따지자니 쪼잔해보이고,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그랬어?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는가. 옛날 일인데 뭘 그런걸 아직도 생각하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몸이 기억하지 않는가. 비가 오면 다쳤던 곳이 욱신거리듯이. 다른 건 잘도 잊어버리는데 이런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케케묵은 옛날 얘기니까 이제는 괜찮아졌겠지 꺼내봐도 괜찮지 않은 얘기가 있다. 저녁 파티에 올 건지 대체 왜 일곱명이 돌아가면서 전화를 거는건지, 어릴 적 게이라고 놀렸더니 망치를 들었다는 얘기, 지금도 게이냐는 얘기, 저 놈의 푸딩은 뭐고, 피아노는 뭐냐, 난처하고 짜증나는 얘기와 질문을 래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고 무척 싫었고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니까. 그들이 상처를 주었다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혼자 삭히다보니 속으로 열불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것 뿐이다. 화장실 문을 부시고, 창문을 부순다. 이제 묻고 싶다. 래리가 이상한 사람인가? 이상한 사람이라면 그를 이상하게 만든 건 누군가? 의도가 나쁘지 않았으면 모든 게 정당화되는가? 스스로를 래리에게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동생이 만나보라고 구겨넣듯이 리나를 소개시켜주려 할 때는 본능적으로 거부하더니, 래리는 리나와 따로 이야기하고 약속을 잡을 때는 어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 어쩌면 오랜만에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래리는 보는 사람마저 흐뭇하게 한다. 리나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난생 처음 비행기에 타고 하와이에 간다. 바보같이 어디에서 묵는지, 연락처조차 없으면서 아무 생각없이 비행기를 타고 그녀를 만난다. 자신을 협박하고 돈을 갈취해간 폰섹스 업체에서 보낸 사람들을 제압한다. 혼자 있을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사람들인데, 그녀를 만난 후로 당당하게 말하고 그만 하라고 끝을 낸다. 그가 말했듯이 그 힘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나오는 힘이다. 그는 변한 게 아니라, 그가 이미 갖고 있던 힘을 이제 걱정없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히어로 같은 변화는 아닐지라도 그런 래리를 보는 게 좋았다. 가구 사장을 찾아간 그는 정말 히어로처럼 멋있어보였지만 그래서는 아니었다. 그가 혼자 우는 날이 줄고,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날 역시 줄어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래리는 리나를, 리나를 래리를 왜 좋아하게 되었을까. 숨기지 않고 솔직한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를 핑계로 래리를 만나러 왔다는 그녀의 말에, 그 역시 오직 리나를 보러 하와이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장난치듯 동생에게 들을 래리의 어린 시절 얘기로 그가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자 리나는 먼저 그 얘기를 꺼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에게 그런 일로 미안해하는 이는 없었다.  어이없게 많이 사버린 푸딩도, 무료 마일리지에 집착하지만 여행은 잘 가지 않는다는 모순적인 이야기도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가 말할 때 그녀는 들었고, 그가 말하지 않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않았다. 리나가 래리가 떠나기 전에 방금 무척이나 키스하고 싶었다고 말했기에, 래리는 허겁지겁 정신없이 그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입을 맞추었다. 그는 그녀를 다치게 한 분노 때문에 병원에 혼자 그녀를 내 버려두어서 미안하다고, 자신도 숨기고 있었던 '폰섹스 협박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서운해하던 리나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지고 마는 게 아름다웠다. 그 둘은 함께 있을 때 훨씬 사랑스러웠다. 집채만큼 쌓여있는 푸딩과, 푸딩이 준 마일리지로 오직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고백마저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만큼.


  어쩌면 리나는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늘 그녀가 먼저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다 떠먹여주듯 자리를 깔아놔야만 그제서야 그가 찾아오는 게 지겨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그녀가 마음을 보여준 것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걸.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을 위해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말을 걸고, 먼저 행동한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 역시 필요하다. 기다리다가 지칠 수도 있고, 래리와 리나처럼 서로 같이 걷게 될 수도 있고. 나만 혼자 진심을 보여주었다는 게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전하지 못해 부끄러운 마음은 없을 것이다. 할 만큼 했으니까. 그게 리나가 유독 빛나는 점이다. 상처받을 수 있단 걸 알면서도 묵묵히 마음을 드러내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이 둘의 사랑은 아주 드라마틱하거나 환상적이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한 조건식으로 환산해볼까? 속을 알 수 없는 이혼녀와 소심하지만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싱글남의 만남이다. 그러나 그 둘을 그렇게 환산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아주 달고 신 무지개색 사탕을 입에 문 것처럼 때로는 아찔하고 놀라웠으며 중독적이었다. 보는 이가 이런데 둘은 어떠할까.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나를 잃어버리고 파괴하는 얼얼함은 없었다. 다만 나에게 있었는지 모를 새로운 내가, 수많은 단점과 알지 못하는 치부와 상처마저도 따뜻하게 안아주고 눈을 맞춰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영화에서 사랑을 punch-drunk 라고 말한 이유는 아닐까. 언제 그렇게 상처받았는지 모르게, 언제 내가 싫었었는지 싶게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푹 빠져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현실적이며 비현실적인 힘 때문에. 리나가 어떤 사람인지 래리에 비해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누나나 여동생은 물론, 우리는 절대 모르는 래리의 새로운 모습도. 사랑이 또다른 깊은 상처가 되거나, 진심이 아니라 관성으로, 혹은 과시용으로 만나는 사랑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던 터에 아, 사랑이 어쩌면 이런 거였지 싶은 영화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이런 기쁨을 준 그와 그녀, 래리와 리나에게 안도현 시인의 짧은 시구를 건네고 싶다. 이미 이들에겐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별빛>
- 안도현

그대여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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