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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6년의 풍월

by have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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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번째. 햇수론 6년째. 간만에 가뿐한 마음으로 연주회를 끝냈다. 예전보다 마구 잘했냐면 그건 아니다. 주말을 틈타 합숙을 갔고 연주회가 다가오기 2주전에야 합주를 시작했다. 이번엔 달랐던 건 마음가짐이었고 거기서 비롯된 짧지만 굵은 안간힘이었다. 안될 것 같다며 쉬운 길을 찾아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기본으로 돌아갔다. 차근차근 맞춰야 하는 박자는 138이었고, 90도 안되는 박자에서 그 지루한 계단을 쌓았다. 퇴근을 하고 지친 몸으로 언제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빠듯하게 2-3시간을 보내고 터덜거리며 집에 가는일이 반복되었다. 마지막엔 악기를 쳐다보고 싶지 않을 정도일 때도 있었고 집에 돌아오면 침대와 한 몸이 되듯 뻗어버릴 때도 많았다. 기분이 왜 좋아졌냐면 되든 안되든 그 노가다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어느새 손가락이 박자를 따라가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덜컹거렸지만 마지막 계단을 올라와 있었다.


휴학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하지 않고 학기를 마쳐왔던 것과 같은 이유로, 연주회를 다음에는 쉬겠다며 삐죽이면서도 연주회를 마쳤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제자리 같은 실력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준비가 덜 되어 연주 당일에 긴장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고, 뒷풀이를 가는 길에도 즐겁지 않고 마음이 무겁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실력은 늘 제자리일지도 모르고, 열번이 넘고도 매번 1부 공연은 떨리지만 이번 뒷풀이는 즐거웠다. 괴롭지 않았다. 후련하다.


학생으로 사는 건 지금 생각해도 좋지만 동아리의 재학생으로 사는 건 그리 즐겁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인 어느 단체가 안그렇겠냐만은. 좋은 기억도 있지만 마음엔 괴로운 기억만 사로잡혀있을 때가 많았다. 내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 그립지 않다. 갑자기 밀려드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 허덕였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어렸고 사람들 역시 어렸다. 상처를 받았고 빨리 회복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 싫어 악기를 들고 떠났다가 웃기게도 다시 악기를 들고 돌아왔다. 늘 얼굴 보는 사이에서 불편함이 피어오르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람 사이의 공백을 너무 메우고 싶어했다. 시간이 필요한 일에도 그 과정을 생략해가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척 했다. 제대로 용서하지도 못할 거면서 용서하는 척 했다. 날이 서 있어서 공격해오는 사람에게 대응은 했지만 늘 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 야속한 이가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나도 야속한 사람이었겠지.


졸업을 하니 고민하던 많은 문제가 해결됐다. 인간관계가 늘 고민이라면서 왜 늘 해결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 적당히 눈 돌리고 멀어지면 되는 일인데 그걸 못해서인가보다. 졸업 덕분에 사람들과 심리적으로 멀어졌다. 몇 평 남짓한 세상이 동아리의 전부가 아니었다. 조금 이방인이 된 것 같아 편하다. 어쩌면 이제 만나는 친구들에겐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다가가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힘들어하고 있을 때 좋은 말 한마디쯤 해주어야겠지만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나 싶었을 만큼 사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은 괴로울만큼 다 괴로웠기 때문이었겠지만.


악기에 대한 고민은 요즘에 들어 좀 해결되는 느낌이다. 나 말고 비난할 사람이 없어 괴로웠다. 수도 없이 나는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내가 부족하다고 진심으로 느끼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걸 인정하는게 그렇게 어려울 만큼. 아님 인정하면 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고민의 갈래를 조금 벗어날 수 있는 연주회였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고 좋은 일도 아닐텐데 동지가 생긴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저 나아가면 되는것이다. 예전에는 오래 못버티고 나갈거라던 지휘자선생님에게 오기로 발끈하며 남아있었다. 사정도 모르고 툭 던진 선생님의 한마디에 선생님은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시잖아요, 라며 퉁명스럽게 되받아칠 때도 있었다. 지금은 같이 길을 저벅저벅 걷는 느낌이다. 선생님은 가끔 깜짝 놀라곤 하신다. 선생님은 이런저런 사람이에요 할 때마다 어떻게 나를 잘 알지 하시면서. 분발하셔야겠어요, 선생님. 나는 그래야지.


그것이 6년의 윈드오케스트라 풍월인가보다. 결정장애로 1년을 고민하며 들어올까 말까 생각했던 이 동아리가 나의 대학생활의 일부분이었고, 인간관계의 일부분이었고, 자발적 노예로 일상의 일부분이다. 처음엔 신기하고 낯설었지만 어떨 땐 지긋지긋하고 신물이 난다. 지금은 어떨 땐 안됐고 안타깝고, 어떨 땐 아는 만큼 재밌다. 무엇이든 결국 지나간다. 언제 가지 싶던 그 시간이, 상처의 흔적을 보고도 덤덤해지는 순간이, 끝내는 웃고 넘어가는 순간이.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넘치는 이곳에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야 알 수 없다. 나의 여건이, 동아리의 여건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려본다. 30대, 40대가 되었을 때 지금보다 훨씬 멋진 소리를 내는 그림 속 사람이 나이기를. 어떤 의미에서든지 내가 배우고 성장한 구석이 있다면 이 곳을 빼놓을 수는 없게 되었다. 너도 참 정상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앞은 몰라도 나아가는 곳. 쓰고 달고, 떫고 짭짤한 시간을 선사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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