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내한공연
쌀쌀해진 날씨, 집회결사의 자유가 눈에 띄게 돋보이는 토요일 광화문의 시끌벅적함을 지나 마린스키 발레단의 <돈키호테>를 만났다. 가지런히 빗은 똥머리의 어린 발레리나들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공연을 '관람'하러 온 것이지만 그 친구들에게는 그 이상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시간이 되겠지 싶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한 그 뒷모습의 발레리나를 응원했다.
난생 처음 보는 발레공연이었다. 이제는 보기 힘든 비디오로 어릴 적 처음 백조의 호수를 보았다. 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우아한 백조같은 투투를 입은 발레리나, 왕자님처럼 멋진 발레리노가 눈 앞에있었다. 편견 없이 보려고 아무 생각을 담지 않으려고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와는 발레가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는 점. 하지만 이야기는 꽤나 익숙했고 전개 역시 유쾌했다. 큰 틀의 내용은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내고 키트리와 바질이 결혼하는 이야기'다.
제1막
1장 돈키호테의 서재
용감한 기사의 무용담을 많이 읽은 나머지 자기 자신을 기사라고 믿게 된 돈키호테가 환상의 여인 '둘시네아'를 찾아 시종 산초판자를 세상 밖으로 모험의 길을 떠난다.
2장 스페인 바르셀로나 광장
가난한 이발사 '바질'은 선술집 주인 로렌조의 사랑스러운 딸 키트리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로젤로는 가난한 바질이 못마땅하여 키트리에게 멍청한 부자귀족 가마슈와 결혼시키려 한다. 이 때 돈키호테가 나타나 키트리를 둘시네아로 착각하여 춤을 신청하고 바질을 질투한다. 마을 사람들이 소란을 벌이는 사이 키트리와 바질은 몰래 광장 저 편으로 도망친다.
제2막
1장 집시의 야영지
집시들은 키트리와 연인 바질을 위해서 춤을 춘다. 곧이어 돈키호테가 나타나고 야영지 주변에 있는 풍차를 보고 둘시네아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적군의 기사로 착각한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덤벼들자 갑자기 주위가 아수라장이 된다.
2장 돈키호테의 꿈
꿈속에서 요정의 나라에 다다른 돈키호테는 요정들과 함께 춤을 춘다. 요정들 가운데서 돈키호테는 둘시네아의 모습을 한 키트리를 만난다.
3장 집시의 야영지
키트리와 바질이 사라진 것을 안 로렌조와 가마슈는 그들을 찾아 집시 야영지로 들어오고 산초판자는 로렌조에게 엉뚱한 방향을 가르쳐 주어 길을 헤매도록 만들고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제3막
1장 선술집
바질은 키트리와 결혼을 못한다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며, 단도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쓰러진다. 키트리는 바질이 죽은 줄 알고 슬픔에 빠지지만 이내 거짓행동임을 눈치채고 돈치호테에게 바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도록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한다. 키트리를 불쌍하게 여긴 돈키호테는로렌조에게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게 한다. 마지못해 로렌조가 허락하자마자 바질이 벌떡 깨어나고 자신들의 작전이 성공한 것을 기뻐한다.
2장 결혼식
키트리와 바질의 친구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두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고 에스파다와 메르게데스의 매혹적인 춤에 이어 마을 남녀들이 스페인의 민속춤인 판당고 춤을 춘다. 마침내 키트리가 연인인 둘시네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방랑의 기사 돈키호테는 환상의 연인을 찾아 다시 새로운 모험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생각보다 알고 보면 좋을, 세부적인 부분이 많다. 간단하게 정리하고 싶지만 사실 그리 간단치 않는 내용이다. 1막부터 3막이 소리 없이 무용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때로 공연을 보고도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간단하게 정리된 줄거리는 알고 보지만 공연 자체로 메세지가 100% 의도한바 그대로 전달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해석이 다르게 느껴지기 충분하다. 공연을 더 즐기고 싶다면 프로그램 북으로 세부적인 줄거리까지 훑어보는 것이 좋겠다. 가능하다면 공연에서도 조금 더 부드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면 역시 좋을 것이다.
1막에서는 돈키호테보다 산초판자가 광장 사람들에게 장난으로 여기저기 굴려다리고 던져지는 게 무척 재미진 포인트였고, 아주 새침하고 도도해보였던 키트리가 바질과 투닥거리며 썸타는 모습 역시 사랑스러웠다.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에 둘을 더 응원하게 되었다. 키트리가 무조건 남자가 다가오길 원하는 캐릭터가 아니었고 은근히 질투를 하고 질투를 하길 바라는 적극적인 캐릭터라서 마음에 들었다. 바질 역시 다른 모든 남자들을 퇴짜를 놓는 키트리에게 지지 않고 무조건 매달리지는게 아니라 그녀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다가오는 멋진 캐릭터였다. 이럴 때 우리는 외치게 된다. 잘됐으면 좋겠다! 뭐, 걱정할 필요 없다. 만난지 얼마 안되었지만 둘은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이고 덕분에 1막부터 안심한다. 이미 잘 된 커플이다.
개인적으로 앞의 줄거리처럼 세세하게 보지는 않고 갔기 때문에 특히 2막이 제일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왜 돈키호테는 뭘 공격하고, 그림같이 예쁜 걸 보니 꿈인 것 같은데, 이건 무슨 전개인 것일까 헤맨 것이다. 공연 전반적으로 무대 배경이나 의상이 돋보이지만 2막에서 유독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파스텔톤의 색색깔의 투투를 입고 나오는 발레리나들, 멋진 숲 속의 배경이 빛났고 중간중간 솔로 무대를 하는 무용수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생각하는 '발레'의 사랑스럽고 우아한 이미지에 알맞는 막이었다. 그렇다면 그 꿈은 대체 뭘까! 무슨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찾아보았고 돈키호테는 계속 '둘시네아'에게 빠져있었던 터라 꿈에 나오는 것이라는 설명을 발견하니 이해가 되었다.
3막은 줄거리보다도 바질의 익살스러운 '가짜 자살'소동이 무척 재밌었고 장단을 맞추는 키트리를 보면서 둘은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구나 했다. 결혼을 위해 가짜 자살을 선택하는 대담한 예비 신부와 신랑이라니. 귀족 가마슈에게 결혼시키려던 아버지의 소심한 꿈은 애당초 글러먹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은 키트리와 바질의 결혼식. 그 둘의 사랑에도, 발레 공연에서도 클라이막스다. 2인무에서 휘몰아치듯 어려운 기술과 흥겨운 음악으로 나오기 때문에 확실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둘이 함께 하는 동작 중은 조심스럽게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걸 보면서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안정적인 모습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공연 후기 중 공연이 꽤 짧게 느껴졌다는 후기를 보았는데 아마 3막까지 진행되는 공연에서 인터미션 시간이 두 번 정도 길게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지루함이 없이 재충전하고 볼 수 있었다. 3막을 보고 나니 공연을 잘 끝내려면 그 정도의 휴식이 필요해보인다.
신기한 점이 많았다. 우선 돈키호테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관객처럼 관찰자 시점에 가까웠다. 돈키호테는 왜 꼭 등장했어야만 하는 것일까 물음표를 던지게 될 만큼. 프리파가 이 작품을 만들 때 어쩌면 해리포터 시리즈나 DC, 마블처럼 세계관을 넓히거나 번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사실 돈키호테는 긍정적인 파워가 넘치는 사람으로 기억되니 결말은 비극적인 편이다. 좀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행복했던 때와 달리 돈키호테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와 체념하고 시름시름 숨을 거두고 만다. 적어도 나는 돈키호테의 결말을 눈여겨 보지 않은 한 사람이지만 프리파에겐 흥미로운 소재이자 좋아하는 캐릭터가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늘 새롭게 여정을 떠나며, 스스로도 해복하고 다른 이에게도 행복을 주는 존재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란 짐작을 해봤다. 혹은 아주 단순하게 비극적인 발레가 많으니 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고. 여튼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행복해진 발레 속 돈키호테는 아주 기다란 창을 들고 다니고, 키트리를 자신의 반쪽으로 오해했다가 바질과 잘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 빼고는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대체로 걸어다니고 서서 무용수들의 춤을 관람하고 있다. 돈키호테, 역시 여러모로 부러운 캐릭터다.
오케스트라를 빼놓을 수 없다. 소리는 여린 듯 하지만 잘 어울렸다. 몇 가지 위기를 나타낼 때를 제외하고는 잔잔하고 재기발랄한 멜로디가 많았다. 스페인이 배경이고 흥겨운 마을을 표현하려면 좀 더 정열적이고 흥이 나는 음악도 좋았을 것 같지만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양한 춤을 보여주고 있어서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라비안 느낌의 춤을 추는데도 여전히 감미로운 클래식 느낌이라 이것이 원작자가 상상한 '아라비안' 느낌인가 싶긴 했다. 전반적으로 음악의 묘미는 무용수의 턴 등 각종 동작과 딱 어우러질 때 느낄 수 있었다. 아기자기한 꾸밈음이 많은 편이었다. 예쁘고 반짝거리는 소리를 내려면 연주자들이 꽤나 고생했겠다 싶으면서도 듣기 좋아서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관객들이었다. 악기소리도, 발레 무용수들이 내는 소리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관객의 소리는 분명히 컸다. 조용할 것 같았던 발레 공연장에는 콘서트장을 방불케 할만큼 환호성이 중간중간 넘쳤다. 바질이 짓궂은 연기를 할 때, 키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과 아버지를 피해다니는 모습에 함께 웃었다. 좋은 안무를 선보일 때, 무용수가 처음 등장에 인사할 때 엄청난 박수가 함께 쏟아졌다. 속으로 발레 공연을 처음 보는 나는 '이렇게 자주 박수를 쳐도 되는걸까?' 싶을 정도였다.
아무렴 어떤가. 박수는 무대라는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의 든든한 영양분이다. 이내 멋지게 무대를 누비는 무용수들에게, 무용수들이 날아다닐 수 있게 멋진 음악을 수놓아주는 오케스트라에, 그리고 잔잔하기는커녕 브라보를 외치며 가장 큰 박수를 치는 관객들에게 박수를 저절로 칠 수 밖에 없었다. 박수도 잠잠해지고 모든 막이 내리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무용수들은 춤을 추고, 오케스트라는 다시 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우리는 또 이런 기억을 담고 우리의 일을 준비한다. 서로 날아오르는 이들에게 보낸 박수같이 느껴졌다. 돈키호테에겐 그 좋은 공연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봤다고 그만 부러운 투정을 부려야겠다. 그가 그도 우리도 본 적 없는 '둘시네아'를 찾는다고 헤매고 다녀서 키트리와 바질, 마린스킨 발레단의 발레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 이 리뷰는 문화의 소통을 강조하는 아트인사이트와 함께 합니다.
* 줄거리 출처 - 루스플라이 (https://blog.naver.com/loosfly/220010825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