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 내용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단연컨대 여태까지 봤던 뮤지컬 중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뮤지컬이었다. <레베카>나 <프랑켄슈타인>같은 어둡고 무거운 느낌도 아니고 <맘마미아>처럼 신나고 흥이 넘치지는 않는다. 현실적이었다. 작은 무대, 두 명의 주인공, 웃음을 지어내는 소소한 유머와 몸개그, 심장을 건드렸던 고민들. 작가인 톰의 고민에 공감이 가서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었고, 늘 바뀌지 않는 일상에서 그림자 같은 기분이 든다는 앨빈의 씁쓸함에 목이 마르기도 했다. 좋았다. <위플래쉬>의 플레쳐 교수가 비아냥거렸던 'Good job'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좋았다.
공연 시작부터 토마스는 어떻게 앨빈의 송덕문을 쓸 지 고뇌한다. 어떤 수식어구를 쓸까.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까. 그리고 계속 한 가지를 특히 고민한다. 앨빈이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이 놓쳐버린 부분이 무엇이었을까. 앨빈에 대한 미안함과 괴로움, 그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송덕문을 쓸 종이에 쓰인 글씨가 두 문장을 채 넘어가지 않는다. 아마도 내일이면 그는 수많은 인파 앞에서 앨빈의 송덕문을 읊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두 문장 뿐이다. 이대로 가면 망하는 거다. 그가 앨빈과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토마스의 머릿속엔 기억이 담긴 서재가 있다. '마인드 팰리스'보다 아늑하고 수많은 종이가 쌓여있다.(잘 잊어버리는 나에게는 얼마나 부러운 서재이던지!) 그 곳에 앨빈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언제 없어졌냐는 듯이. 토마스의 기억을 헤집고 다닌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토마스는 들춰보고 싶지 않은 거였다.
프리뷰에서 관람 포인트로 짚었던 것은 세 가지였다. 토마스와 앨빈이 '진짜' 어떤 친구인지, 그 둘이 겪은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송덕문 혹은 더 크게 글에 대한 고민. 다행스럽게도 아예 헛다리를 짚지는 않았다. 세 가지가 동떨어진 주제가 아니다. 그들이 어떤 친구인지는 그들이 맞이한 변화와, 송덕문과 토마스의 글과도 관련이 아주 많다. 사실상 한 가지 이야기다. 토마스와 앨빈의 '친구' 사이. 예상했던대로 아주 오래된 친구였으나 이 둘은 계속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줍잖게 3-4번의 큰 이별을 했다. 이 때의 이별은 물리적이기도, 감정적이기도 하다. 대학을 합격하고 떠난 토마스와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고향에 남은 앨빈. 여자친구와 함께 온 토마스를 앨빈이 마주했을 때. 토마스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오기로 한 앨빈, 토마스는 그 때 말할 수 없는 사정으로 신나하는 앨빈을 오지 말라고 했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토마스가 쓴 앨빈 아버지의 송덕문에 대한 둘의 의견 차이. 영문학상 대단한 시인을 인용해 짧고 굵게 임팩트를 날린 토마스와, 토마스가 쓴 것이 없다며 서운해했던 앨빈.여러 번의 이별 앞에서 그들 중 누구 하나 서로를 헐뜯고 미친듯이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심을 전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토마스가 찾아 헤매던 앨빈에게서 놓친 '한 순간'은 이 이별의 모든 순간이었다.
오래된 사이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는 건, 말을 아끼는 건 이미 서로를 어느 정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건 긁어부스럼으로 만들지 않는다. 서운함 같은 감정 역시 뒤로 미룰 줄 알게 된다. 처음 친구가 되는 건 우연으로 시작되겠지만 친구 사이를 유지하는 건 선택의 문제니까. 만나기로 했다면 감수하는 것들이 늘어난다고 봐야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쓰고 있고, 이 방법은 나쁘진 않다. 현상 유지에 탁월하고 갈등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익숙하고 다 안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가령 토마스가 몰랐던 건, 앨빈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참 잘한다는 거였다. 보고 읽지 않아도 술술 나올 만큼.
그들 역시 서로에게 충실할 때가 있었다. 익숙한 게 뭐냐 싶을 정도로 늘 새로운 것들만 펼쳐진 때가 있었다. 토마스에게 작가의 꿈을 심어준 책 <톰소여의 모험>을 골라준 게 바로 앨빈이었다. 할로윈에서 이상한 천사 복장을 한 토마스, 이상한 목욕가운을 입고 유령이라고 자칭한 앨빈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수염이 너무나 튼튼한 담임선생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선생님의 장례식을 보면서 좋은 얘기만 해주는 송덕문을 써주자고 약속도 했다. 나의 좋은 얘기를 네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나의 좋은 모습을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약속이 30년이 지나 돌아왔디. 그들은 지금 그 오랜 약속을 지킬 만큼 소중한 사이다. 그들은 남모르는 전통도 있다. 냇가에서 물수제비를 던지고 크리스마스면 눈밭에서 천사를 만들고 영화 <멋진 인생>을 보면서 자축하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그리운 어린 시절'이라고 말하는 그 소중한 기억. 이 둘에겐 서로를 빼놓고 그 시절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토마스와 앨빈의 이야기'로 붙여진 단편만 해도 토마스의 서재엔 가득하다.
이 둘이 멀어진 친구 사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어쩌면 오래 함께 하자던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때와 같은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역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토마스와 앨빈은 남다르지 않은 30년지기 친구였던 셈이다. 이제는 적당히 멀어진, 그리고 적당히 말을 아끼는, 그래서 모르는 부분도 꽤 있는 사이. 연락이 닿아 가끔 얼굴을 보면 다행인 그런 사이. 그렇다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익숙하니까 이해해주겠지, 하다보니 멀어진 사이.
토마스는 왜 차려진 밥상처럼 넘치는 앨빈과의 기억을 피하려 했는가. 정말이지,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는 '작가질'을 하느라 그랬다. 토마스를 표현하는 한 가지 말이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들은 앨빈과 함께 한 것들이었다. 토마스 역시 부정하지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소설의 모티브는 앨빈에게서 출발했다는 걸. 나비도, 선생님의 이야기도, 눈 속에서 천사를 만들던 그들의 전통도, 모두. 그는 성공해서 바빠졌기에 앨빈과 함께 할 시간은 나날이 없어졌다. 더불어 영감을 주는 앨빈과 함께할 수 없어서 그랬는지 그의 소설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안했을 것이다. 더 이상 책을 쓸 수 없을까봐, 혹은 형편없는 책을 쓰게 될까봐.
앨빈은 그 이야기를 나중에야 조심스럽게 꺼낸다. 그의 책이 정말 오롯이 그의 것인가. 소설책에 숟가락 얹듯이 같이 이름을 넣어달라는 것도 아니다. 영감을 주었지만 그걸 글로 풀어낸 건 오롯이 토마스의 능력이니까. 그러나 토마스는 어땠던가. 한번도 수상할 때 앨빈의 이름을 꺼낸 적도 없었다. 일부러 피하려고 부정한건지, 잘난척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앨빈과 토마스의 기억을 나눈 책이 베스트셀러인데 토마스는 온갖 환호와 찬사를 받고 앨빈은 그림자 뒤에 숨어서 박수를 더해주고 있다. 앨빈은 묻고 싶은 것이다. 정말 토마스의 책이 그가 말한대로 오롯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인지. 앨빈이 토마스에게 '네 머릿속에 이야기만 수천개야'라고 말할 때는 그가 날 때부터 엄청난 작가여서 상상력과 창조력이 뛰어난 '이야기의 신'이라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을 거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거였을거다. 아는 것만 써도, 네가 가진 기억과 추억이 수천개니 거기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란 말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앨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는대로 쓰라는 것도 정말 아는 것만 쓰라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너의 이야기를 하라고. 부담갖지 말고 쓰라고. 자유롭게 쓰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앨빈이 토마스에게 실망스러워했던 건,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건 토마스가 앨빈의 아버지의 송덕문을 너무 '성의없이' 썼기 때문이다. 영문학 사상 위대한 시인의 말을 쓰는 건 좋다. 그러나 인용이 내용의 전부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실상 토마스가 쓴 문장은 몇 문장 되지도 않았다. 몇 문장 안에 사람들에게 앨빈 아버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개를 시작하더니 금방 이음새에 맞게 마침표만 찍었다. 잘 써달라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품격을 대문호의 시로 적당히 높여주는게 아니라, 직접 쓴 이야기를, 남들은 모르는 이야기를, 추억을 나누어 달라는 거였는데 말이다.
토마스는 그의 서재 속에 앨빈에게 여전히 왜 그가 자살을 선택했어야만 했는지 궁금해 한다. 토마스에게 죄책감을 가지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아마 아무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앨빈은 늘 혼자다. 독특한 행동을 해서 친구가 많지 않았고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이상한 목욕가운을 입고 유령이라고 할로윈에 돌아다녀서. 야한 잡지보다는 나비의 날개짓이 더 관심있어서. 하나뿐인 엄마의 기억이자, 자신도 나비처럼 날개짓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궁금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이해하려고 하거나, 함께 해준 건 토마스 뿐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오래 몸이 편찮으시던 아버지. 그에게 외로움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밝았고 쾌활하고 엉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 토마스가 쓴 송덕문은 쓸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송덕문은 그의 몫이 되었다. 혼자 무대앞에 서서 아주 잘 이야기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말을 잘한다고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니까. 말을 하면서 오히려 더 혼자가 되는 기분이었을테니까.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줄수록 이제 그 아버지가 곁에 없다는 게 분명해지니까. 누군가 나타날 거란 기대로만 살기엔 그는 늘 그늘진 곳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게 토마스 잘못이란 말인가. 앨빈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토마스가 악역으로 상처를 주곤 했다고 온통 그의 탓인 건 아니다. 앨빈이 혼자인 건 사실이지만, 그가 조금 빛을 덜 받은 건 사실이지만, 고향에 계속 혼자 남아있던 것까지 그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왜 그렇게 밝은 앨빈이 새로운 곳엔 혼자 가보지도 않았을까. 토마스가 여행을 오라하든 말든, 그냥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고. 혼자 남은 지금 새로운 출발을 해도 됐을텐데 말이다. 30년 지기 친구 토마스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살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토마스가 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면, 앨빈에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전통이라고 하긴 하지만 그가 변화가 없는 사람이긴 했다. 초등학교 때 만들던 눈 위에 천사를 20대가 되어서도 만들고, 늘 크리스마스엔 영화 <멋진 인생>을 보는 사람. 토마스 이외에 친구를 만들려고조차 하지 않은 건 그의 그런 성향 때문이었을 수 있다. 계속 새로운 것과 마주칠 때 움츠리다 보니 습관이 되어버려서 무서워진 건 아닐까. 혼자서는 새로운 것을 마주하기 힘들고. 어쩌면 그는 나비가 가만히 날개짓을 하는게 큰 영향이 되어 돌아오는 것처럼, 그가 그 자리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면 다리에 몸을 던지지 않고도 <멋진 인생>의 천사를 만나 새롭고 대단한 일이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새로움을, 그런 변화를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앨빈은 가끔씩 그 강가 다리에 서보곤 했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 왜 강 밑을 내려다 보았는지.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박수를 쳐주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어떤지는 조금 알고 있다. 그건 매우 사소한 순간에도 느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일이 생기고 나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때. 그 사람을 축하해주고 싶지 않은 것도, 나쁜 일이 일어났으면 한 것도 아니다. 그냥 모자라고 부족해 보이는 내가 싫어지는 거다. 사람에겐 누구나 빛나고 박수를 받을 때가 있다는데 나에게는 언제 올지 도통 감감 무소식이라서. 질투보다는 선량하고, 자아성찰보다는 잔인한 그 순간 막상 입 밖으로 내기도 민망하다. 내가 너무 속이 좁아 보이는데 마음이 정신을 못차린다. 상대는 그런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거다. 뭐야 결국 부러워서 그러는 거잖아,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다르다. 영영 볕들 날이 오지 않아서 그림자인게 너무 익숙해질까봐 두려워서 그러는거다. 끝끝내 그 감정을 숨기다 토마스에게 비춘 앨빈이 마음 아팠다. 그 오랜 시간 참아오느라 힘들었을텐데. 적나라한 감정을 인정하는 것도, 생사를 결정하는 것도 역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만 조금은 알겠다.
복잡한 토마스와 앨빈의 사정은 잠시 뒤로 하고, 대체 처음부터 끝까지 토마스를 따라다니는 '앨빈의 송덕문'은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송덕문은 생각보다 어려운 과제였다. 그들의 친구 사이와 서로의 내면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면에서는 토마스가 앨빈을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조금은 예상했다시피) 우리는 송덕문의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조금은 안정되고 자연스러운 토마스의 표정과 말투를 보며 뭔가 가닥이 잡혔구나 안심할 뿐이다. 막혔던 신작도 '토마스의 서재'에서 토마스와 앨빈이 함께 완성했다. 잔잔한 무대에는 눈이 내렸고 이야기는 아름다웠다. 토마스는 이제 송덕문 뿐만 아니라 모든 글을 쓸 때도 그렇게 자연스러워질 것만 같다. 이번에 그는 누구도 인용하지 않았고, '제 친구 앨빈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라며 주도권을 잡고 이야기를 했으니까. 모든 건 그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다.
그의 글은 늘 감동적이었다. 그의 첫 소설 <나비>. 나비의 날개짓이 거대한 바람이 될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를 모르는 게 아닌데. 하찮은 나비가 열심히 날개짓을 해서 바다를 간다는데 그게 마음을 울렸다. 그러나 글을 대하는 그의 마음은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는 두려워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앨빈에게 영감을 받은 것을 부정하는 것 이외에도 작가로서의 다른 고민 역시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느 커녕 작가도 아닌 내 자신에게서 본 적 있는 모습도 있었다. 찰나의 순간 영감이 번뜩이는데 그 순간을 놓치면 어쩐다. 전전긍긍한다. 길이길이 남는, 멋지고 엄청난 글을 써보고는 싶은데 그러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데 어렵다. 아는 것들을 쓰는 건 진부하고 없어보인다. 나의 개성과 차별성,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가. 글도 지문처럼, 음색처럼, 달라야 할 텐데. 발전은 없이 이렇게 멈춰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능력은 믿어도 되는 것일까. 잘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거 따지지 말고 이렇게 끄적이면 되는 건가. 다른 이들에게도 마음을 움직이는 글일 수 있을까. 내 이야기가, 내가 쓴 글이. 그런 생각들.
송덕문은 앨빈이 토마스에게 건네는 당부의 말 같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만나온 소중한 친구에게. 시작이야 단순했지만 네가 나의 좋은 모습을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어쩌면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나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나눠달라고. 뭔가 써질 것 같다고 책상에서 혼자 틀어박혀 있지 말고, 수많은 이야기를 사냥하듯 웅크려 있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쓰라고. 송덕문은 죽은 사람을 위해 좋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지만 글쎄, 좋은 얘기에 관한 거라면 꼭 그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지금도 할 수 있으니까. 물론 우리는 살아있을 때는 너무 여유가 없어서 그런 말은 낯부끄럽다며 잘 못하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이 직접 진심을 다해 전달하는 모든 말과 글에 누가 값을 매길 수 있겠는가. 당신이, 내가, 우리의 인생이 들려주는 그 이야기에 말이다.
* 이 리뷰는 문화의 소통을 강조하는 아트인사이트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