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vefaith Mar 02. 2020

[리뷰]<작은 아씨들>, 숨 쉬는 것처럼 편안한 이야기


* 책 내용과 영화 내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48페이지나 되는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이 길고 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고 궁금증이 생겨서. 책을 통해 답을 얻고 싶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는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표지가 참 예쁘다 싶었는데 두께를 보고 나니 실감이 났다. 큰일 났다. 이 책이 재미없으면 책을 읽는 것도, 리뷰를 쓰는 것도 정말 큰일 나는 건데. 왜 꼭 그런 건 저질러 놓고 생각이 나는 건지. 그런 두려움을 안고 책을 펼친 것에 비해 다행스럽게도 그 두께가 무섭지도, 지겹지도 않았다. 호기심은 독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호기심은 성공했다.





영화 '작은 아씨들',  단연 돋보이던 

 영화 <작은 아씨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봤다.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연출 때문인지, 마음이 쓰여서인지 둘째 조가 공감되면서 안쓰럽게 느껴졌다. 출판사에 가는 길에 무척이나 긴장하면서도 긴장하지 않은 척하고 그 와중에 착실히 자신의 글을 신문에 실어내고, 글이 별로라는 프리드리히의 말에 상처 받고 날 선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이 분 작가님 맞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님. 셋째 베스가 세상을 뜨고 괴로워하다가 쓴 글이 베스를 포함해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아씨들'이 만들어진 계기였다. 무척 몰두해서 손이 아파도 손을 바꿔가면서 쓸지언정 펜을 놓지 않고 써 내려간 원고가 쌓여가는 걸 보면서 경이로웠다. 물론 영화가 보여 준'작가'의 이미지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사람은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가 가장 멋지다.


  저작권과 결말을 두고 출판사와 딜을 하는 건 또 어땠나.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저작권은 지켰고, 조를 아무와도 이어주지 않으려던 생각 대신 프리드리히와 결혼시키기로 결말을 타협했다. 편집장과 결말을 논의하는 걸 보면서 '맞다, 이거 이야기였지' 하는 생각에 이상하게 안도했다. 진짜 조가 마음 아프지 않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이 한 땀 한 땀 제본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조의 눈빛이 좋았다. 정말 세상에 내 책이 나온다면 나도 그런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해질 만큼.



영화를  후의 충격(!), 풀리지 않은 궁금증

잘못된 만남? 흔들린 가족애? (아침드라마 st)

  아, 영화가 충격적이었던 건 막내 에이미와 로리 때문이었다. 언니인 조와 누가 봐도 썸을 타던 남자 로리와 결혼을 하는 이 전개! 말도 없이 결혼을 하고 와서 언니에게 괜찮냐고 묻는 에이미나, 일부러인지 자기도 모르게인지 에이미를 내 아내라고 말하는 로리나. 잠깐 말문을 잃었다. 에이미도 그렇고, 로리도 그렇고. 세상에 남자 여자가 둘만 있나? 이렇게나 속상했던 건 조가 로리의 마음을 거절한 이후에 로리를 놓친 걸 약간은 후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여자에게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는 게 지긋지긋하지만 너무 외롭다는 그 말이 울림이 컸다. 사랑하지 않는데 외롭다는 이유로 마음을 받아들여서 상처를 주기는 싫고 외로움을 견디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마음 아팠고.


  그 와중에 언니인 조의 기회를 사사건건 빼앗아가서 얄미울 정도였다. 에이미가 대신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에이미가 대신 로리와 결혼을 할 때의 조의 표정이 아른거렸다. 완전히 괜찮지 않지만 애써 웃으면서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려는 표정. 그뿐인가, 언니가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을 자기를 공연에 같이 데려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의적으로, 멀쩡한 정신으로 한 장 한 장 불태운다고? 그건 미안할 수도 없고 정말 매일 사죄를 해야 할 일이다.


  에이미에게 유독 신랄하게 평가하는 걸로 느껴진다면 같은 막내로서 막내에게 느끼는 실망이라고 보면 되겠다. 에이미는 마치 가의 넷째인 막내딸이고, 나는 장 씨 집안의 셋째인 막내딸이라서 이입을 한 모양이다. 에이미가 조에게 한 일은 입장을 바꾸면 이렇게 된다. 내가 우리 작은언니를 좋아했고, 심지어 언니도 호감이 있었던,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오빠와 내가 결혼을 한다? 나라면 못한다.




원작으로 푸는 궁금증

Q1. 조가 로리를 생각하는 마음?


  마음을 가라앉히고 설마 책에는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맥락이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원작이 대체로 영화보다 낫다'라는 '원작 우위론'이 이번에도 먹히기를.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하게 영화의 출판사 장면이나 열린 듯한 결말 이외에는 책의 내용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글을 한 장 한 장 불태운 에이미는 여전히 소름 돋는다. 프로젝트/과제/업무 파일이 저장되지 않고 날아가는 황폐한 기분보다 약간 더 무섭다. 그 부분은 방어해 줄 수 없겠다.


"하지만 메그언니를 테디와 결혼시켜서 평생 화려하게 살도록 해줄 계획이었거든요. 그래서 언니한테 실망했어요. 언니가 테디랑 결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조는 아까보다 밝은 얼굴로 어머니를 올려보았다. -p.407

"맙소사, 베스가 로리를 사랑하고 있어!"(중략)
"로리가 베스를 사랑하지 않으면 너무 끔찍한 상황이 되고 말아. 로리는 베스를 사랑해야만 해.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중략)
조는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마의 주름을 펴면서 그 그림을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고맙지만 됐어! 넌 무척 매력적이지만 풍향계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감동적인 편지를 쓰거나 내 앞에서 교묘하게 환심 사는 미소를 짓지 마. 그래 봤자 아무 소용 없어. 난 안 받아들일 거야." -p.634

"테디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는 걸 네가 알면 괜히 심란할까 봐 얘기를 못 꺼낸 것도 있어."
"어휴, 어머니. 저를 그렇게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시다니. 저는 이미 그의 사랑을 거절했어요.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네가 진심으로 거절했다는 건 나도 알아, 조. 하지만 요즘 같아선, 로리가 돌아와 다시 구혼을 하면 네가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였어.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만, 네가 너무 외로워 보이더구나. 내 마음이 다 아플 정도로 네 눈에 깊은 허기가 담겨 있었어. 그래서 로리가 돌아와 다시 노력한다면 네 마음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에이미가 로리를 사랑하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어머니 말씀 중에 하나는 맞아요. 제가 많이 외롭기는 해요. 테디가 다시 제 마음을 두드렸으면 그의 마음을 받아줬을지도 몰라요. 그를 전보다 더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이겠죠." -p.846


반지 주는데 남녀 구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책에서 조는 영화처럼 로리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조는 로리를 남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확실한 10년 지기 로리의 고백을 받았을 때도, 그 후에도 조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 외로워서, 자신을 그렇게 오래도록 사랑해 준 마음으로 기울뻔한 적은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심지어 로리의 짝으로 조금 넉넉하게 살고 싶은 큰언니인 메그, 피아노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는 셋째 베스를 생각하기도 하고, 막내 에이미와 잘 되어서 다행이라고도 한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다면 기분이 나빴을 텐데 그러긴커녕 자매들과 엮어주려고 한다.


  조가 에이미와 결혼 소식을 듣고 기분이 묘했던 것은 누군가를 사랑해서 행복한 모습이 조에게는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럴 줄 몰랐던 에이미가. 너무 잘 됐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영영 그런 좋은 경험이나 기분을 느끼지 못할 것 같은 기분. 속이 좁은 것 같지만 기분이 그런 걸 어쩌겠나. 이상한 상대적 박탈감. 그 기분은 느껴본 적 없는 사람이 없을 터. 영화를 보고 타올랐던 마음이 허망하게 진정되었다.



Q2. 에이미는 조의 유학 기회를 빼앗았나?


  에이미 역시 책을 보니 유럽에 갈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정당하게 얻은 것이었다. 사실상 조가 복을 걷어찬 셈. 조는 아무래도 툭툭 내뱉는 편이라 '사회생활'에는 인내심이 없는 편이었고 그날따라 참지 않았던 게 마침 속으로 누굴 유럽으로 보낼지 고민하던 숙모와 마치 고모에게 확신을 주었던 것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나. 이 이야기의 교훈은 마음에 맞지 않아도 '사회생활'에 힘써보라는 게 아니라 어차피 될 인연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조는 로리가 자길 좋아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뉴욕으로 떠나 독립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곳에서 적응했으니 잘 맞았던 게 아닐까. 에이미도 그 엄청난 기회를 누리며 그림을 배웠지만 재능이 그리 없다는 걸 깨닫고 왔으니 어찌 보면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정답일지도. 좋은 게 좋은 건지는 지나 봐야 안다.



Q3. 로리는 반박의 여지 없이 '나쁜 '인가?

로리는 앞으로 몇 년을 더 마음고생을 해야 조에 대한 사랑을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에 대한 사랑은 매일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갔다. 처음에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마음이 식는 자신에게 화가 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원래 알 수 없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시간과 본성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가 없다. 로리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상처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아물었다. 이제 그는 실연의 상처를 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억해내려고 애써야 할 지경이 됐다. 로리는 그런 자신이 혐오스럽고 자신의 변덕스러움에 경악했다. -p.820
여자 치마폭에만 쌓여있는 남자인 줄 알았잖아요

  로리 역시 영화에서의 이미지와 훨씬 달랐다. 장난기가 많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부잣집 한량 도련님'이라고 느꼈는데 아니었다. 조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공부를 들이 파기도 했고. 갑자기 유럽에서 에이미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스스로 많이 고뇌했던 걸 책에서 알 수 있어서 이해하게 됐다.


  로리가 조의 대체재로 에이미를 선택한 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물론 조와 에이미는 가족이라 비슷한 점도 있을진 몰라도 큰 틀에서 성격, 가치관도, 매력이 정반대에 가깝다. 선머슴이나 망아지 같은 조는 날카로우면서도 좋아하지 않는 것과 타협하지도 않고, 당차고 솔직하고 자유로운 면이 매력이다. 세상에 맞춰 살기보단 모욕이나 야유를 받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사는 걸 중시한다. 에이미는 우아한 '숙녀'를 추구하고 어른스러운 면이 매력이다. 남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기가 있는지, 혹은 어른들에겐 어떻게 예의를 갖춰야 할지도 잘 안다. 즉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맞춰 산다. 그걸 거스르면 힘들고 피곤한 것도 아니 맞추기로 한 셈이다. 눈칫밥을 먹고사는 막내들의 성향인지도 모르고.


"내가 오빠를 솔직히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줘?"
"말해봐.
"경멸해."
만약 에이미가 뾰로통하거나 새침하게 "싫어해"라고 말했으면 로리는 웃어넘겼을 것이다. 아니, 좋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색하는 에이미 말투에 슬픔이 담겨 있어서 로리는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이유가 뭔데?"
"얼마든지 선하고 쓸모 있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비딱하고 게으르고 우울하게 살고 있잖아."
-p.790

  세상에 여자가 반이고, 남자가 반이지만 나에게 필요한 말과 행동을 해주는 사람이 그만큼 많은 건 아니다. 에이미처럼 들었다 놨다 하는 게 매력적인 건 사실이다. 무릎 위의 물건이 떨어지든 말든 한달음에 로리의 품에 안기고, 계속 충고하기보단 한번 던지고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고, 때로는 일침을 놓을 수도 있고. 로리의 마음을 찌른 이 비수 같은 대화가 제일 관건이라고 본다. 다들 알지 않나. 날 경멸한다고 말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Q4. 조와 로리는 왜 안 되는 건가?

(조와 프리드리히는 왜 되는 건가?)

다만 내 마음이 네 마음 같지 않을 뿐

  조와 로리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로리는 여자로서 조를 사랑했고 조는 인간적으로만 로리를 좋아했던, 로리 한 사람의 일방적인 순애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둘의 케미는 첫 만남부터 너무나 오래 변함없이 좋았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조가 로리에게 반지를 줬을 거라고도 생각하진 않는다.


  로리는 조와 이어진 프리드리히와 많이 달랐다. 조가 프리드리히를 마음에 두게 된 건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긴 면모 때문이었다. 조와 다르게 그는 자신을 놀리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일관되게 따스하고 진실되면서도 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모두와 반대되는 의견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확고한 신념을 가진 건 나이 덕분일 수도 있고, 오래 학문에 정진한 교수여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가진 인간적인 면모이기도 하다. 모두가 이성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 믿음과 종교를 주장하는 진심으로 주장하는 모습에 조가 놀랐을 것이다. 조 역시 신념을 중요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말하는 것에 비해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지 않기도 했고, 실제로 주위의 반대에 시달린 적도 없으니까 말이다.


  프리드리히는 신문에 실린 어느 시를 보고 조인지 알아차리고, 먼 길을 찾아와 조의 지친 마음을 채워준 반면 로리는 거절당한 이후에 조가 아픈 베스를 돌보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편지로 다시 마음을 고백했다.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조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만약 로리가 그때 조에게 찾아가 베스를 돌보느라 지친 조의 옆에서 힘을 주었다면 다른 전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함께 했다면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조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다가올 기회도 주지 않고, 속은 부드럽지만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내는 조가 아니라 아무 가시도 없는,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조를. 그랬다면 조 역시 여태까지 본 적 없는 로리를 봤겠지.


  개인적으로는 조와 로리가 고집이 세고 성격이 비슷해서, 혹은 사교계와 글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서 둘이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가 설득력 있지는 않았다. 다만 어느 사이가 그렇듯이 조와 로리가 함께 하는 게 꼭 당연한 것은 아니고 함께 한다고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타이밍의 문제인지 마음의 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때로는 딱 그 정도가 좋은 사이도 있다.




거 연애이야기만 너무 많은 거 아니냐

하시면 드릴 말씀이 있지요

나이 지긋한 독자들 중에는 소설 속에 '연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냐고 하실 분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마치 부인의 말로 변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집에 활기찬 딸이 넷이나 있고 옆집에 근사한 청년이 살고 있는데 달리 무슨 기대를 하세요?" -p.469

<작은 아씨들>의 재미란 어디서 많이 본 연애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니 짚고 넘어가야겠다. 앞서 언급한 조-로리-에이미의 삼각관계는 내가 이해가 잘되지 않고 궁금했던 내용일 뿐이다. 삼각관계는 당사자는 괴로울지 몰라도 지켜보는 사람들은 흥미진진하다. 실제로 루이자 메리 올컷 역시 연애 이야기만 많다며 볼멘소리를 종종 들었던 모양. 좋은 답변을 책에 써줘서 그 답변으로 공유하기로 했다. 암요. 한창 젊은데.


<작은 아씨들>을 보면서 <오만과 편견>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순서일지도 모른다. 활기찬 딸들이 모인 마치 가와 베넷 가의 일상 이야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가치가 드러난다. <작은 아씨들>이 좀 더 순하고 교훈을 주는 어른 동화 느낌이긴 하다. 물론 대화의 느낌은 신랄한 단어가 확실해서 좋다는 조 덕분에 그렇게까지 순하진 않다.



첫째 메그로 보는 연애, 결혼, 육아의 현실

"요즘 누가 그런 식으로 재산을 물려받아? 돈을 벌려면 남자들은 일을 해야 하고 여자들은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해. 정말 지독하게 불공평한 세상이야." 메그는 씁쓸하게 내뱉었다. -p.319

"샐리는 뭐든 갖고 싶은 걸 다 사들이면서, 그렇게 못하는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 갖고 있는 걸로 만족하며 살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요. 가난하게 사는 데 지쳤어요." -p.536

"낮에도 밤에도 집에 붙어 있질 않아요. 저녁때라도 같이 있고 싶은데 늘 스콧 씨의 집에 가 있어요. 저는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는데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남자들은 아무리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도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인지 모르겠어요." -p.759

  조와 에이미 이외에 소중한 두 딸 메그와 베스가 있다. 첫째 메그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연애, 결혼, 육아의 고민이 드러난다. 메그가 말했듯이 결혼은 경제적인 목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인용구의 의미대로의 '정말 지독하게 불공평한' 세상과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아내로서의 메그의 모습은 어째 낯설지 않다. 메그는 부유한 생활을 좋아하지만 존 브룩이라는 사랑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잘 사는 친구와 비교해서 마음 편히 옷을 사지 못하는 경제 사정에 지치고,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려다가 마침 어수선한 집에 남편이 친구를 데리고 와서 화가 나기도 하고, 쌍둥이 아이를 혼자 끙끙대며 기르다가 밖으로 도는 남편을 보고 서운해하기도 한다.


  대체로 훨씬 비슷한 경험이 많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서로 다른 모습마저도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아이를 기르는 부담을 혼자만 안지 않고 남편과도 나누어서 아빠 노릇을 할 수 있게 하라는 조언이 큰 도움이 된다. 다행히 부부가 서로의 입장을 잘 생각하고 배려하는 편이기도 하고. 물론 모든 결혼과 육아의 문제가 그렇게 원활하게 해결되긴 힘들다. 개인적인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시대적인, 구조적인 문제까지는 다뤄지진 않았다. 어머니의 조언이 반드시 참고 견디고 이해하라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엄마가 딸에게 해주고픈 교훈 가득 인생 조언

재주도 많고 장점도 많지만, 굳이 남들에게 네 미덕을 자랑할 필요는 없어. 자만심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들의 삶마저 망쳐놓거든. 진정한 재능이나 장점이 남들 눈에 띄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그러니까 당장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본인이 그런 재능과 장점을 지녔다는 걸 알고 좋은 방향으로 쓰면 되는 거야. 사람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겸손함에서 나온단다." -p.149

"성질을 다스리는 데 40년이나 걸렸단다. 그러고도 겨우 제어할 수 있는 정도 밖에 안돼. 사실은 거의 매일 화가 나. 그저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 방법을 익힌 것뿐이야. 화를 느끼지 않는 방법을 배우기를 바라는데, 그러려면 앞으로 40년은 더 걸리지 싶어." -p.165

사랑하는 딸들아, 너희가 잘 살기를 바라지만, 속물적으로 사는 건 원치 않아. 단순히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해서 멋진 집에 산다고 행복하진 않거든. 사랑이 결여된 집은 진정한 집이라고 할 수 없어. 돈은 생활하는 데 필요하고 귀중한 것이지. 잘 사용된다면 고귀한 것이기도 해. 하지만 너희가 매사에 돈을 우선시하면서 돈에 얽매여 사는 걸 바라지 않아. -p.200

가난의 장점 중 하나는 머리나 손으로 열심히 일한 대가를 거머쥐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만족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현명하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의 절반은 모두 가난 속에서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조는 그런 만족감을 즐길 줄 알게 되면서 부유한 여자들을 더는 부러워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얻고, 남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어서 마음에도 큰 위안이 됐다. -p.530

  조언 이야기를   해보자면  교훈적인데도 그렇다고 도덕 교과서처럼 지루하진 않다. 어머니가 딸에게 자상하게 말해주는 편지 같아서 그렇다. 겸손하게 살아라, 돈만 좇는 속물이 되지는 말라, 성질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라,  힘으로 벌자는 말이 무턱대고 나오는  아니라 각각 딸들이 겪는 에피소드를 통해서 하나씩 전달되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교훈은 가장 먼저  겸손의 미덕. 겸손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말 잘나면 자랑하기 전에 사람들이 먼저 알아본다는 점에 백번 동감하기 때문이다.  중에 가장 공감하지 않는  화를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화를 느끼지 못하는  불가능하기도 하고 둔감해지는 것이니 추천하고 싶지 않다. 40년이 지나도 화는  ? 화를  표현하고  바라볼  있게  달라는 말이  좋았을 것이다.



셋째 베스, 조용함 속에서만 느낄  있는 감동


세상에는 베스처럼 얌전하고 조용한 성품을 가진 아이들이 많다. 그런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필요해질 때까지 구석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면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언제나 기분 좋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며 살아간다. 벽난로 근처 작은 귀뚜라미가 지저귐을 멈추고, 사랑스럽고 햇살처럼 화창한 존재는 사라져 정적과 그림자만 남아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아이의 존재감을 깨닫는다. -p.91

그때부터 베스는 더 이상 로런스 씨가 두렵지 않았다. 마치 평생 로런스 씨를 알고 지낸 듯 편안하게 앉아 얘기를 나눴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감사하는 마음은 자존심을 이기는 법이다. 로런스 씨는 베스의 손을 다정하게 잡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모자에 손을 대며 베스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중략) 집에서 그 모습을 보자, 조는 흡족해하며 지그 춤을 시작했고 에이미는 놀라서 창턱에서 떨어질 뻔했다. 메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맙소사, 세상이 끝나려나 보네!"
-p.137

  셋째 베스와 로런스 할아버지의 피아노 이야기가 가장 찡하다. 조용하고 얌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인지 조용한 베스 같은 사람이 가장 흥미롭다. 잘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정말 '오래도록 자세히 보아야'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조용하고 있는 듯 없는 듯하는 그 베스가 용기를 내서 로런스 가의 피아노를 연주하고, 피아노 선물을 받게 되면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신발을 선물로 드리는 그 마음이 아름다웠다. 할아버지만 보면 숨기 바쁘던 베스가 손을 잡고 돌아올 정도라니, 가족들의 반응만 봐도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있다. 문장 자체도 재밌고 상상해 본 모습도 유쾌하다. 어떻게 할까. 조와 같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그 춤을 출까, 창턱에서 떨어질 뻔한 에이미를 붙잡을까, 아니면 함께 "맙소사" 혹은 "세상에"라고 맞장구를 칠까.


  피아노를 무척 좋아했던 베스. 성홍열에 걸린 것 역시 더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를 돕다가 옮은 것이라 안타깝다. 그녀에겐 조나 에이미한테서 볼 수 있는 일종의 독기는 없다. 몸이 약해지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베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모든 일에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다. 억울하고 화가 났을 수도 있는데 오히려 조가 써준 시를 보고 자신이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는 데 안도한다. 마치 가의 네 딸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안간힘을 쓰지 않고 힘을 빼고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려운 일이니까. 물 흐르는 듯한 삶을 베스를 통해서 본 기분이다.



막내 에이미, 허당과 애늙은이 사이

그동안 프레드에 대해 같이 여행하는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었는데 세레나데의 밤 이후로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아요. 그 후로 프레드는 저랑 달빛 아래 산책을 하고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누고 매일 함께 모험을 하는 것에 대해 단순한 재미 이상으로 생각하는 듯해요. 저는 맹세코 그 사람에게 꼬리를 친 적이 없어요, 어머니. 저는 어머니 말씀을 명심하면서 최선을 다해 사람을 대한 것뿐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는 걸 제가 어쩌겠어요. 제가 억지로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저는 별로인데 상대만 저를 좋아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걱정스러워요. (중략) 만약에 프레드가 청혼을 하면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제가 그 사람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요. 저는 그를 좋아하고 같이 있으면 편안해요.
-p.625

  책으로 만난 <작은 아씨들>에서는 막내 에이미를 훨씬 많이 이해할  있었다. 에이미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미워할 수는 없겠더라.  부잣집이고, 언니들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입장에서 에이미와 닮은 점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보단 나이가 많고 어른이니 빨리 어른이 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던 모습. 어릴  에이미가 어려운 단어를 쓰면서 우쭐하곤 하면서 놀림감이 되곤 했는데 엄청 찔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이 이름이  지명을 말하거나, 어려운 단어 표현을 쓰면서 어찌나 잘난 척을 했던지. 어른스러운 척을 하면서 칭찬을 받으려고 애쓰기도 했고.   그런 거까지 똑같지 닮는지.


  막내들의 특징은 애늙은이이면서 한없이 허당인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어머니에게 프레드 이야기를 한 저 편지다. 언니는 가난한 집에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니 나라도 부유한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마음먹는 현실적인 면모는 좋지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편하니까 괜찮다며 넘기는 어리석은 결정이 애늙은이의 한계이기도 하다. 현실을 챙기는 건 좋지만 중요한 걸 놓치면 안 되는 데 말이다. 시간과 경험으로 배우지 못한 어른스러움이 그럴 때 드러난다.


  그 와중에 꼬리 친 적이 없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 것뿐인데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걸 어떻게 하겠냐는 말에는 웃기기도 했고 눈을 굴리기도 했다. 어머, 피곤해서 어떻게 해. 너도 참 피곤하겠다. 타고난 매력 탓이지. 어휴, 다른 건 비슷할지 몰라도 저런 말을 맨 정신에 하게 될 날이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래도 뭐, 에이미는 저 편지에서 진심으로 정말 억울하다.




 읽냐고 묻거든 이리 답하겠소

내일은 조의 생일이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지, 이뤄낸 것은 왜 이리도 적은지 생각할수록 한탄스러웠다. 스물다섯 살이 다 됐는데도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조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은 많았다.(중략)
원래 그렇다. 스물다섯 살 아가씨의 눈에 서른 살은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막상 닥쳐보면 서른 살도 그리 암울하지만은 않다. 마음속에 의지할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p.851-852

어느 삶에든 얼마만큼 비는 내리는 법,
어느 정도는 어둡고 쓸쓸한 날들이 있게 마련이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의 시 '비 오는 날'에서 인용'
-p.946


  가시가 많고 틈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며, 글을 쓰는 입장에서 여러모로 조에게서 동질감도 느꼈고 많이 배웠다. 스물다섯이 서른이 된다고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지진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비록 시간이 흘러 나이는 먹고 이룬 것은 없고 아직 내세울 것은 없다는 건 한 세기가 지나도 같은 듯하지만 자부심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조뿐만 아니라 메그, 베스, 에이미 중 전혀 나와 닮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 중에 닮은 모습이 하나쯤 있겠지 싶을 정도로 그 네 명의 모습 속에 수많은 사람이 공감했을 것이다. 반성도 하고, 용기도 얻고, 원하는 모든 것들을 내 마음처럼 가질 수 없어도 절망만 하진 않게 된다. 인생엔 어느 정도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고 구름 뒤에는 해와 달이 떠있으니까.


  아버지가 참전한 것 이외에 <작은 아씨들>에서는 역사를 관통하는 사건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역사를 뒤흔드는 선택이나 갈등도 없다. 네 딸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은 우리가 어른이 되는 과정과도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여태까지 읽은 옛날 책 중에서 가장 무겁지 않았고 가장 '지금'의 느낌이 났다. 그건 아마도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가족의 이야기, 개개인의 삶의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제목이 유명한 온갖 책은 주제가 무겁다 못해 그 무게에 깔릴 정도였다.


  주말 8시쯤 편성되는 가족 드라마 같은 복닥복닥한 분위기가 이 책의 매력이다. 전하려는 메시지도, 문장도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등장인물 역시 살아 숨 쉬듯 통통 튄다. 가벼운 주제를 썼다고 이런 편안함이 나오는 것은 분명 아니다. 가장 쉬워 보이기 때문에 가장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걸 책으로 쓰냐는 의견도 제법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분량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평범할지도 모를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책의 한 문장으로 답하겠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가끔 이렇게 동화책처럼 유쾌한 일들이 펼쳐지고, 덕분에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p.437)




* 이 리뷰는 ARTinsight와 함께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리뷰]선물 같은 플레이리스트<1일 1클래식 1기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