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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Apr 18. 2021

당신의 모든 시간, 모든 순간<이불 속 클래식 콘서트>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늦은 밤 혹은 새벽까지 바쁘게 보내다 얻게 된 휴일. 그날 <이불 속 클래식 콘서트>를 읽었다. 어쩌다 보니 쇼파에서 뒹굴뒹굴하면서 봤지만 정말 이불 속에서 읽었어도 좋았을 책이다.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얻을 게 적은 책은 아니다. 하루 일과별 상황과 사계절마다 한 겹씩 풀어놓은 클래식 곡이 흥미로웠다.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 화장실을 가고, 양치를 하는 순간, 밥을 먹고 외출했다가 잠에 드는 모든 순간에도 추천해 주실 클래식 곡이 있다니. 하루를 여러 순간으로 쪼개고, 그 장면마다 들으면 좋을 곡을 추천하려고 고심했을 작가의 모습이 떠올라서 유쾌했다.


책에서 추천하는 곡은 QR코드를 넣어두어서 짧게나마 그 곡을 직접 들으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게 큰 장점이었다. 의도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곡을 찬찬히 듣다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거나 인상 깊었던 곡과 작곡가에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이 정도면 취향을 발견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고 볼 수 있겠다.



가장 먼저 귀를 사로잡은 건 관악기가 돋보이는 곡들이었다. 아무래도 관악기를 접해보았다고 귀가 익숙한 소리에 끌린 모양이다. 아침 출근길과 함께하면 좋을 곡으로 선정된 구스타브 홀스트의 <군악대를 위한 모음곡 2번> 중 다개슨. 윈드 앙상블을 위한 곡은 클래식 곡들 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플룻이나 클라리넷, 트럼펫 등은 현악기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에서도 종종 참여하지만 색소폰 같은 악기는 함께 편성되지 않는 게 아쉽기도 했는데, 홀스트도 그런 마음으로 이 곡을 썼으리라 알게 되니 반가웠다. 책에서 소개해 주었듯이 홀스트는 말하지 않으면 서운할 <행성> 중 <목성>이란 유명한 곡을 남겼다. 웅장하고 멋진, 미지의 세계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묻어나는 곡이다. 이 멋진 곡이 나올 수 있었던 게 트롬본 연주자로서 경험 덕분이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 왜 목관악기의 소리는 따뜻한 말 한 마디와 비슷할까? 바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을 한마디 건네는 호흡과 목관악기를 연주하는 호흡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밀도 높고 따뜻한 바람을 악기에 통과시켜야지만 좋은 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 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바람의 온도가 높을수록 더 좋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p.102


아마 모든 관악기에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저자가 교수님으로부터 "보일러 소리를 내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연습했다는 문구를 보고, 앞으로 내가 연습할 때도 그 말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본기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늘 돌고 돌아도 첫 시작은 늘 롱톤이었다. 길고 따뜻한 숨, 음색처럼 그 숨이 내는 소리 몇 초만으로도 이미 끝났다고 느낄 때도 많다. 그 이후에 다양한 스킬이 빛을 발할 수 있다. 현악기는 첼로를 짧게 체험하고 지금은 기타를 배우는 중이지만 관악기와는 매력이 확연히 다르다. 우스갯소리지만 손이 아린 만큼 현악기에서도 아리고 마음 저리는 소리가 나는 기분이다.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될 시바 여왕의 도착

가벼운 언어유희를 담은 설명이 클래식 곡을 친근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외출할 때 추천해 준 클래식 곡 에마뉘엘 샤브리에 <에스파냐, 오케스트라를 위한 랩소디>. 이 곡의 제목이 될 뻔했던 Jota(호타)를 J를 ㅈ로 발음했을 때 '조타'라고 하면서 '외출하기 조타!'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줄 땐 멋지게 이 곡은 원래 호타라고 지어질 뻔했다고 알려준다면 감쪽같겠지.


우아하게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추천받은 곳이 오라토리오 <솔로몬> 중 <시바 여왕의 도착>인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들으면 교양이 철철 흘러넘치는 여왕의 걸음걸이 같은 곡에서 이름에 꽂히는 건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일. 화가 날 때 이 노래가 차오르는 분노, 비속어와 욕이 난무하는 두뇌를 잠시 정화시켜줄 수 있는 정비 시간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삐- 화면 조정 중입니다.



유투브에서 요즘 가장 많이 보고 있는 채널은 플레이리스트 채널이다. 혼자서 찾아서도 듣지만 어딜 가나 음악이 빠진 곳은 없다. 카페나 음식점에서는 특히 그곳에서 틀어놓은 음악 하나로 매력이 더 돋보이기도 한다. 책에서 소개된 클래식 곡은 바로크 시대에 식사시간에 연주되었던 <식탁 음악> 제3집 중 서곡. 작곡가인 텔레만은 수많은 귀족에게 이 곡을 연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던데, 세상엔 귀족은 많고 그 많은 귀족들은 열일 제쳐두고라도 식사는 꼭 할 테니 이쯤 되면 '식탁 연금'이 아니었을까.


식탁과 커피하우스를 제패(?)한 텔레만과 바흐

이번엔 바흐가 만든 <커피 칸타타>. 커피하우스의 요청을 받고 만든 곡답게 제목에도 커피가 들어가 있다. 원제는 가만히 입 다물고 말하지 말라는 뜻이라는데 조용히 하라고 만든 경고곡은 또 아닌 것 같다. 지금도 카페에는 온갖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데 잠시 이걸 들을 땐 잠잠했으면 하는 마음이라도 담겼으려나.


커피 칸타타는 제목에 비해서 내용은 가볍다. 커피에 푹 빠진 딸과 그 딸이 커피를 끊도록 돈을 압수(아빠 찬스 회수)하고 좋은 남자 소켜시켜주겠다고 채찍과 당근을 던지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누가 봐도 대립구도였던 이 부녀관계는 큰 갈등 없이 이상하게도 커피는 끊기는커녕 커피를 예찬하면서 끝난다. 딸이 좋은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가 커피를 마시면 나도 마실 수 있다고 얘기한 게 들킨 거 치고는 훈훈한 결말인데, 아버지의 뉘앙스가 그래 그 커피 한번 대~단하다는 비아냥 조인지, 커피를 맛보고 나니 본인도 끊을 수 없어서인지는 상상만 해보기로. 아버지 놀라실 것 없어요, 전 세계에 따님 같은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샷도 추가하고, 여러 잔 마시고요. 혈관에 카페인 수치가 높은 분이 한둘이 아녀요.



영화나 스포츠에서 먼저 만나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곡들도 많았다. 셰에라자드  <젊은 왕자와 젊은 공주>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팅 프로그램에 썼던 곡이었다. 음악이란   신기하다. 어떤 형식으로든 기억에 남으면,  순간도 생생히 기억이 나니 말이다. 붉은 의상을 입고 링크를 가로지르던 김연아 선수도,  모습을 보면서 응원했던 나의 지난날도. 처연미()라고 불러도 좋을 바이올린 소리는 들을 때마다 즐겁고.


드뷔시의 <베르거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은 영화 <트와일라잇>과 동명의 책에서 이미 만났다. 매일 새로운 달이 뜨지만 그중 어디에라도 해당될 것 같은 잔잔하고 챠르르한 아름다움이 있는 곡이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드뷔시라면 특히 저자의 생각처럼 설명을 줄이는 게 낫다. 제목은 음악을 만든 드뷔시가 지은 것이지만 제목과 곡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누군가에겐 이건 달빛이지만 달빛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인생곡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한 번 듣고 스쳐 지나가는 곡일 수도 있다. 모두에게 똑같은 느낌을 주는 곡은 만들 수도 없거니와 목적이 될 필요도 없다.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은 좋아하는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들었다. 좋은 음악과 좋은 이야기, 영상이 만났을 때 그 효과가 오래간다. 불면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만든 곡이 시간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표현하는 곡으로 쓰이기도 하고. 아직 아껴둔 영화 양들의 침묵에도 나온다고 하는데 어떤 장면에 들어갔을지 궁금하다. 클래식 곡을 좀 더 친근하게 접하고 싶다면 다양한 영화나 드라마, 광고 등에서 찾아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책에 소개된 수많은 곡 중에서도 이 곡들은 접해보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내적 친밀감이 무척 높았다.



클래식 곡을 소개해 주는 책이지만 그 곡을 만든 사람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많아서 좋았다. 곡을 알게 될수록 그 사람이 궁금하고, 그 사람을 알게 될수록 그 사람의 곡이 궁금해진다.


슈만과 클라라,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중 <꿈>도 들어봤지만 책에서 새로운 정보도 알게 되었다. 클라라에겐 아버지, 슈만에겐 스승이자 장인어른인 비크가 슈만에게 클라라와 결혼하지 못하도록 고소를 했다는 점이다. 둘이 좋아야 하는 게 결혼이라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녀가 늘 아깝고, 상대는 늘 모자라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9살 차이가 나고, 딸이 미성년자인데 결혼하겠다고 하고, 제자이기 때문에 알만큼 아는 자칭 예비 사위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그나마 둘이 서로 사이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비크는 피가 거꾸로 솟아서 속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이런 걸 떠올리면 슈만도 조금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가들은 원체 유명하고 뛰어난 사람들이라, 전혀 다른 세계 사람처럼 느껴지곤 하는데 잊지 말자.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곡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쓴 라흐마니노프.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곡이 좋아진 건, 책에서 소개해 주었듯 라흐마니노프가 다른 작품을 집필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시간을 무사히 보내고, 그를 도와준 의사 니콜라이 달을 위해 헌정하며 쓴 곡이기 때문이다. 짧지 않은 곡임에도 끝까지 듣게 되는 건 무겁게 침잠하며 시작하는 곡의 마지막이 빛나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힘들었던 시간을 극복하는 마지막을 함께 하려고 말이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종종 했지만 이 곡은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곡이다. 곡 자체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한국인이 이 곡을 특히 좋아한다면 우리에게도 그만큼 힘겨운 일이 있고 그 힘겨운 일을 이 곡처럼 헤쳐나갈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은 아닐까.



지루한 클래식이란 코너로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 그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지루하기보다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다. 음악 앞에 좋고 나쁨이 붙을 수 있으려면 대상이 정해져야 할 것이다. 고로 '내게' 혹은 '내가 듣기에'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은 존재할 수도 있다. 수많은 음악 장르가 있으니 사실 좋고 나쁨 사이에는 '모르는 음악', 낯선 음악의 지분이 더 많을 수도 있고.


내게 좋은 음악은 가사가 와닿는 음악이다. 어떤 가사가 마음을 울리는 건 무방비한 일이다. 피할 수도 없이 스며들어버린다. 가사가 없는 음악은 대체로 신나는 곡보단 차분한 곡이 좋다. 복잡한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 때문이다. 가사를 중요시하는 건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기타 학원을 처음 갔을 때 음악에서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좋아하는 곡들을 적는 설문지가 있었다. 음악이면 당연히 귀에 감기는 게 중요하니 멜로디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문지를 모두 작성하고 나서 내가 가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사의 내용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내용이라면 충분히 논란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논란조차도 명백한 범위란 건 없다. 불쾌감과 혐오, 상처는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그 깊이나 범위는 산발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불 속 클래식 콘서트는 콘서트 가이드인 저자의 시작과 마지막 멘트가 정해져 있다. 시작은 음악이 귀로 마시는 술이자, 사랑을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음식이라는 것, 마지막은 음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위로와 희망이라는 것이다. 관객으로서 일상이 바쁠수록, 삶이 건조해질수록, 마음을 다시 촉촉하게 살아나게 하는 게 음악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분명 살아가기 위해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는 바에야 음악이 우리에게 먹고살 수 있는 돈이나 밥, 집을 주진 않을 것이다. 때로는 그 음악을 듣기 위해 기꺼이 돈과 시간을 투자할 때도 있다. 얼핏 보면 전혀 이득이라곤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음악을 향유하는 건 돈과 시간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음악 장르마다 제각기 다른 이유로 향유하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는 편이다. 클래식은 유명하면서도 여전히 알쏭달쏭한 제목이, 낯선 나라의 낯선 사람이, 과거에 만든 음악이라서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 한 권으로 클래식이 우리의 삶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지 않아도 괜찮다. 여기서 소개된 곡을 들어보면서 어느 날 클래식을 들어볼까 싶을 때 좀 덜 낯설다면, 혹은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곡에서 '아 그때 들었던 곡이다!' 하면서 반가워한다면 충분하다. 제목을 잘 모르더라도, 여기에서 소개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모든 시간, 모든 순간 중 언제 들어도 클래식이 이상하지 않고 한결 자연스러워졌다면 이 콘서트는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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