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작년 말에 갑자기 시작한 런데이 30분 달리기 도전 8주 코스를 끝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인데 마지막이라는 이유로 감동에 벅차진 않았다. 무려 잠시 후, 위대한 러너의 마지막 달리기가 끝난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는데도 말이다. 기다리던 끝이 다가왔을 때 종종 무덤덤하다. 아마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오늘은 내가 위대하고 뿌듯하고 오늘의 달리기는 마지막이지만, 꾸준히 달리지 않는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가 너무 쉽다. 그리고 아직 쉽게 돌아가고 싶지 않다.
1분 걷고 뛰고를 하던 사람이 24번이 지나면 30분을 뛸 수 있게 된다니. 처음에는 30초씩 살금살금 늘어나다가 2-3분, 5분 단위로 성큼성큼 시간이 늘어난다. 다른 사람들이 할 때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기도 했는데 내겐 그 과정이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주기적으로 한계에 도전하는 기분에 버겁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러닝이 좋다더니 맞는 말이다. 힘들어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스트레스가 뭐였냐. 후루룩 뛰고 가서 시원하게 물 한 잔 하고 드러눕고 싶다. 왜 사서 고생을 하나 싶지만 해볼 만하다. 생각 많은 마음에 제동을 걸어주기엔 딱이다.
24회 러닝을 마치면서 세 가지 고비가 있었다. 처음엔 신나서 달리다가 숨이 차서 갈비뼈가 뻐근했고, 중반엔 주법의 문제인지 발목이 러닝 막판에 약간 삐그덕거렸다. 마지막엔 여전히 가끔씩 삐그덕거리는 발목과 더불어 잘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시간이 문제였다. 아직도 시간이 이것밖에 안 지났다니! 한 바퀴만 더 돌자. 멈추지 말고 천천히 달려보자. 하면서 정신으로 버텨야 할 때도 있었다. 유투브나 TV를 볼 땐 너무나 금방인 시간이었는데, 세상 시간 참 알차게 길다. 체감시간의 상대성은 운동의 묘미일지도.
러닝을 하면서 고비의 원인도, 해결방안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갈비뼈가 답답했던 건 처음 러닝을 시작해서 우다다다 뛰면서 적응하는 과정이었고, 발목은 주법과 신발의 문제였던 것 같다. 후반부로 가면서는 숨이 답답한 적은 별로 없었고, 러너스 클럽에서 내 발에 맞는 러닝화를 구입하고 발목에 무리가지 않게 뛰도록 조심했더니 점점 나아졌다. 시간이 잘 안 가는 느낌은 아무 생각 없이 뛰는 게 익숙지 않아서 그렇다. 마지막 러닝을 할 때쯤 되면 마라톤을 알아볼 거라고 우리의 런코치님(런총각이나 런저씨 말고 다른 걸로 부르고 싶다)이 말씀해주셨지만, 여기 예외가 있다. 아직은 뭔가 덜 다듬어진 느낌이라 지금 30분 뛰기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다. 마라톤은 아직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마라톤에 도전해서 성공한다면 그때는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내가, 마라톤이라니! 세상에!
공복으로 주로 아침에 뛰었다. 주말엔 종종 오후에도 뛰었지만 수많은 사람들, 아이들과 유모차, 강아지가 있어서 스쳐 지나가기 죄송하기도 하고, 사람이 없고 어둑어둑한 아침이 잘 맞았다. 공원에서 주로 뛰었는데 같은 자리에서 뛰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차림새로 러닝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같이 뛰는 사람도 있고, 성큼성큼 빠르게 뛰는 사람도 있고, 나랑 비슷하게 천천히 뛰는 사람도 있다. 마음속으론 좀 반갑지만 반가움을 표현할 겨를이 없었다. 멈추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기 바빴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영영 멈추고 싶을 것만 같아서. 걷는 것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뛰긴 했지만 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페이스를 당기기가 쉽지 않았다. 내 마음은 저기 앞에 성큼성큼 가 있지만, 몸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평생 30분을 안 달렸는데, 갑자기 당기기가 쉬우랴. 속도에 욕심내지 않고 내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앞으로도 필요하다.
달리면서는 당연히 뭔가를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게 좋다. 대체로 남는 건 오래 두지 않아도 될 생각이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 할 수 있는 걸 하고 잘못한 일은 다음에 하지 않으면 된다. 새로운 일을 하면서 스스로 제일 바보같이 느껴진 적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혼자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 참 싫었다. 때로는 억울했고, 때로는 인정하기 싫지만 마땅했다. 세상이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 땐 딱 한 번쯤 쓰러지면 좋겠다, 그럼 힘든 걸 알 텐데, 자조에 찬 상상을 했다. 어차피 밀린 일은 누구도 해주지 않을뿐더러, 달리기까지 하는 마당에 몸이 더 튼튼해지고 있으니 쓰러지는 건 꿈도 꾸지 마라 싶었다. 둘 다 평생 없는 일이었다. 픽 아련하게 쓰러지는 것도 30분을 넘게 달리는 것도. 쓰러지는 게 좀 더 드라마틱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달리는 게 더 멋진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이상한 생각으로 괴롭다면 그냥 일어나서 일단 뛰면 된다. 덕분에 2월이 된 지금, 멘탈이 조금 단단해진 건 확실하다. 힘든 시기도 다행히 지나가는 중이고, 마음도 와장창 무너지지 않게 됐다. 달리기의 지구력은 몸에 한정된 건 아니었던 모양.
러닝이 시작은 쉬울 수 있는데, 왠지 하다 보면 장비 욕심이 생기기도 하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핸드폰을 보관하는 허리 밴드도 사고, 러닝화와 양말도 샀다. 눈에 들어오는 건 많지만 장비만 잔뜩 사놓고 또 잘 안 쓸까 봐 절제 중이다. 잔뜩 열이 오르면 이것저것 지를 때도 있었는데 인내심을 풀로 가동하려고 찜해놓고 잊어버릴 셈. 이미 충동구매도 많이 했다. 소비도 짜릿하지만 인내하고 얻는 짜릿함을 느껴보려고 조거 팬츠는 눈팅 중이다. 소비욕을 비우는 이런 달리기도 괜찮겠지.
이상하게 덤덤하다. 문득 어릴 적 내가 뭔갈 해냈을 때 별로 칭찬을 해주지 않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한껏 신이 나는데 칭찬받지 못해서, 인정받지 못해서 서운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나는 그렇다. 뭔가를 이뤘을 때 그래, 이거면 됐지 하면서 멈춰버리곤 한다. 런데이 마지막 날, 이렇게 런코치님에게도 그런 비슷한 멘트를 들었다. 지금 마음으론 무척 기쁘더라도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 어머니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건 끝은 아니라는 의미로. 미세먼지가 창궐해서, 아침엔 잠이 많아서, 새벽 겨울은 너무 추워서, 이래저래 귀찮아서 종종 늦춰지고 미뤄졌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위대한 러너란 말은 아직 거북하다. 위대함도, 러너도. 아직 이거면 됐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수많은 장애물에도 달릴 마음을 먹고 일어선다면 그건 위대하고, 속도와 상관없이 꾸준히 달린다면 그건 러너라고 할 수 있겠지. 런코치님의 '위대한 러너'는 천천히 오래 소화할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