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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조급한

[당신과 나에게, 씀]나만 숯덩이처럼 화르르 달아올랐던 모양이다

by havefaith

거의 모든 순간 숨겨왔다

참는 건 생각보다 쉬웠으니까

설마 죽기야 하겠어 하면 어려운 게 없다

금방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금방 내 넘치는 욕심만큼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마음을 숨기고 마음을 다했다


당신의 생각은 조금 다를지는 몰라도

당신에겐 느려보이지만 나는 이래도 되나 싶을만큼

가까이 달려가고 있었다, 어떤 준비도 없이


때로 당신이 내게 오는 보폭보다

내가 너무 빠를까봐

일부러 잔가지와 이파리를 하나씩 떨어뜨려 놓고

나무 뒤에서 가만가만 숨을 골랐다


결론적으론 그 속임수가 너무 잘 통해버린게

문제였겠지.

당신은 나에게 솔직하지 않아 마음을 알 수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어느새 다른 강가를 거닐고 숲 속으로 떠나버렸다

나만 숯덩이처럼 화르르 달아올랐던 모양이다

당신이 은은하게 열기를 띄우며 식어가는 동안

내가 너무 늦었던 걸까 당신이 너무 빨랐던 걸까

혹은 우리 둘다 문제였던 걸까

혹은 아무도 문제가 없는 걸까


여하튼 다른 조급함은 참을 수가 있었다

대부분 나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답이 나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수십번 보다보면

어느 순간 조금씩 가까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이 조급함은

늘 자꾸 마음을 동여매게 한다


어차피 변해버릴거면서, 떠나버릴거면서,

앞에선 웃다간 나만 몰랐던 이야기를

전해듣게 할거면서

결국은 필요할 때만 찾을거면서

왜 그때는 그렇게 쉽게 평생과 영원을 약속했는지

결국은 다르지 않은 결말로 달려가면서

이번엔 다르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는지

대체 왜 그랬는지를 물어볼 수가 없다는 것은

참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사실은 오해였다고

애초에 당신이 나를 한 순간도 궁금하지 않았다고

그냥 너가 달아오르는 모습이 재밌어서

구경한거라고

혹시라도 그런 말을 들을까 무서워서

참았다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사실은 늘 궁금했지만


나만 혼자 조급했던 거였든

그렇게 생각하고픈 것이든

당신이 그래도 한 순간

나를 아주 나쁘진 않은 사람으로

어느 날 문득 연락하고픈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그걸로 되었다

연락하지 않는 건

뒤늦은 당신의 조급함으로 돌릴테니

공연히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며 기다리지 않는 법을

나는 알뜰히 배워두었다


가끔은 마음의 눈과 귀가 멀어버렸으면

나의 어설픈 숨바꼭질같은 조급함에

기하급수적으로 따라와 나를 흔들어놓는 일이

조금은 덜 하지 않았을까

되뇌이며 자잘한 먼지가 내려앉은

나의 작은 강과 바다와 들과 숲을

쓸어내리고 다독이는 것이었다


시간이 당신의 변하는 진심을 알려주었듯

나의 진심이

충분히 다시금 새롭게 조급해질 수 있도록

당신이 지치지 않게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안고 싶을 만큼

좀 더 너른 들과 숲에 누워도 보고

깊은 강과 바다에 빠져 쉬어도 갈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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