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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Mar 04. 2017

'적당히'와 '열심히' 사이의 함정,
영화 <걷기왕>

나와 세상의 '적당히'와 '열심히'의 범위가 헷갈리는 것 같기도

  기분좋은 애니메이션풍으로 시작해 유쾌하게 마무리된 영화 < 걷기왕>을 보고 왔다. 영화의 거의 모든 순간이 가볍고 통통 튀는데 몇 부분, 영화의 표정이 바뀌는 순간이 있었다. 무념무상으로 가벼운 웃음을 주다가 그 때 사실은 그게 할 말이야 싶었던 무거움이 있는 순간. 

  영화는 가볍다. 주인공 만복이는 헤실헤실 딱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고 수업시간엔 졸고, 쉬는 시간엔 말똥말똥 떡볶이를 먹는 강화도의 평범한 여고생이다. 적당히 풋풋한 로맨스까지 겸비해서 동네 중국집 배달하는 미래의 힙합꿈나무 오빠를 좋아한다. 다만 그녀의 독보적인 특징은 뭘 타도(모든 차도, 배도, 무려 소도) 멀미가 심해 구토를 많이 해서 별명이 '토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두 시간이 걸려 학교를 걸어다닌다는 점도! 비행기를 찰칵찰칵 손모양으로 100번 찍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소순이라는 멋진 소친구도 있다. 딱히 뭔가를 절실히 해본 적 없는 만복이에게 꿈과 희망의 전도사 담임선생님은 걷기를 잘 한다면서 육상부에 보냈다. 만복이는 육상부에서 빨리 걷기, 경보라는 종목에 도전하게 된다.


  같이 본 사람은 딱 '초등학생용' 영화같다고 했다. 하지만 '초등학생용' 영화란게(물론 요즘 초등학생들은 남다르니 알 수는 없지만) 생각없이 볼 영화라는 뜻이라면 그건 분명 아니다. 누가봐도 복잡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 있다. 먼저 꿈과 열정, 노력에 대한 생각이다. 만복이는 착해서 혹은 귀찮아서 넘어갔을 지 모르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뭐가 어쩌고 어째'하는 마음도 불쑥 생겼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씀 중에 상담과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허황된 말을 하는 건가. '꿈과 열정, 노력만 있으면 뭐든지 다 될 수 있어', '그깟 멀미 하나 버티지 못하면서 뭘 하려고 하냐. 2-3시간 걸어다니면서도 학교 잘만 다녔다' 하는 악의없는 감사한 어른의 멘트. 선천적으로 뭘 타도 멀미를 하는 딸아이한테 그걸 약해빠졌다고 하면 납득이 될까.  이미 노력과 열정의 문제를 벗어난 범위인 걸. 두 시간 걸려서 학교 걸어다니면 된 거지. 담임 선생님은 제일 나쁘다. 만복이의 재능을 찾아준다면서 육상부에 보낸 것까지는 좋다 치자. 만복이가 육상부를 그만두게 된 건 다른 무엇보다도 체전을 보러갈 때 다시 버스를 타면서 멀미증후군으로 고생해 경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중간에 그만두는게 제일 나쁘단다. 그렇게 뭔가 시작했다가 맞지도 않는 걸 계속해서 불행해진 수많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


  담임 선생님은 착실하게 공부해서 공무원 되겠다는 만복이 친구 지현이한테는 왜 또 꿈이 없냐고 한다. 꿈을 위해서 참고 견뎌야 한다고 노력은 끝이 없다고 한다. 만복이와 달리 지현이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아니 왜 힘들어죽겠는데 왜 참고 견뎌야 하냐고, 칼퇴해서 맥주나 한 잔하는게 꿈일 수도 있지. 적당히 살고 싶어서 그런다고. 속이 시원한 일이었다. 담임 선생님 말도 맞다. 너무 어린 학생들이 꿈과 동떨어져서 방향을 못잡거나 혹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게 물론 아주 바람직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나쁘다고 하는 건 그녀가 그 학생들의 입장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섣부르게 꿈을 찾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시험으로 치자면 출제자의 의도를 벗어난  두루뭉술한 답안지요, 강의로 치자면 눈높이를 맞추지 않은 강의다. 그렇게 말한 선생님은 꿈이 뭐였는지, 지금은 무엇인지 되물어보고 싶어질만큼. 쓰다보니 좀 많이 신랄한 것 같다. 하지만 학생들의 꿈을 찾아주려는 그녀의 노력과 열정은 좋았고 존중한다. 방법이 섣부르다고 생각해서, 또 학생입장에서는 부글부글하며 안타까웠을 뿐이다.


  꿈도 노력도 없이 적당히 대충한다고 욕먹은 만복이는 각잡고 목숨걸고 열심히 노력해본다. 발에 상처도 나고, 힘들어도, 뭐라도 안하면 무서운 마음을 감추면서 열심히 훈련한다. 같이 경보하는 선배 수지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노력으로 안되는 건 없고, 다 정신력 문제라고. 만복이는 수지선배처럼 되고 싶다고 했었는데 진짜 똑 닮게 되었다. 목숨걸고 열심히 하는 것도 비슷하고, 수지도 부상당해서 운동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무서워서 계속 하는 것마저도 사실 닮아버렸다. 운이 좋게도 만복이와 수지는 함께 전국체전에 참여하러 가게 되었다. 만복이는 이번엔 서울에서 경기를 한다는데 저번처럼 차를 타는 대신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곁에는 그렇게 못살게 굴었던 선배가 함께 한다. 겨우 다 왔을 때 쉬다가 만복이의 다친 발을 보고 선배는 화를 내면서 왜이렇게 미련하냐고 적당히 해야지, 그 때 만복이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 


왜 선배가 하는 건 노력이고 제가 하면 미련한거에요?
노력하면 다 된다, 정신력 문제라면서요.


  만복이도 알고 있었다. 지금 무리하고 있다는 걸. 다들 너처럼 장난처럼 대충대충 적당히 해선 아무것도 안된다고, 중간에 그만두면 다 소용없다고 그러니까 그들이 불어놓은 두려움에 오기를 더해 여기까지 온 거다. 이렇게 해서 혹시 우승을 하면 좋긴 좋은데 뭐가 달라지는 거지, 계속 경기를 하면서 경쟁하고 긴장하는 게 반복될텐데  언제까지 계속 이래야 하는건지도 무서워하고 있다. 그 악몽같은 예감이 실제 경기에서도 현실이 되었다. 두려움과 오기로 빠르게 치고 나가던 경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괴롭고, 오버페이스라면서 뒤에서 눈치만 보던 선수들도 서로 치고나오면서 서로 부딪혀서 결국 넘어지게 되어버렸다. 쌈닭이, 투견이, 소싸움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고 그냥 있으면 경쟁하고 싸우듯이, 안일어나고 뭐하냐는 주변 코치들의 말에 꾸역꾸역 지친 몸으로 경쟁하는 다른 선수들을 보다가 그녀는 비행기를 보고 드러누워버렸다. 막상 그렇게 비행기를 찰칵찰칵 찍어댈 때 소원이 뭐였는지 궁금해하면서. 1등하고 있었는데 중도포기라니 결국 소용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강화도부터 서울 70km를 걸어오면서, 또 이렇게 열심히 중간까지 1등으로 치고나오면서 보여준 만복이의 모습에 노력과 열정이 빠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 해보라는 대로 했는데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 싶었을 거다. 그 말 듣고 해봤는데 천천히 가도 나쁜 것 같진 않다는 스스로의 결론을 내린거다.

  물론 만복이는 미련하다. 몸이 망가지는 건 얘기도 안하고 맹훈련도 했으니 이 꼴로 몸도 상해버렸다.
너무 열심히 해서 혼났던 거다. 그래도 그 말 들었을 때의 상처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나에게도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 때 말을 보탰다가 더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꾸역꾸역 한 마디를 넣어둔 적이 있었다. 왜 열심히 했는지는 아냐고, 당신한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고. 차라리 힘들었지, 고생했다는 말로 시작했으면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했는데 이렇게 저렇게 했으면 더 의도대로 잘 했을 것 같다고 했다면 상처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땐 나도 만복이 같았다. 내가 열심히 하면 문제인거고, 또 적당히 해오면 대충한다고 뭐라 하겠지. 지금도 가끔 그런 비슷한 말을 듣는다.


  너무 스트레스받으면서 하지 말라고, 적당히 하라고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럴 때마다 '적당히'와 '열심히'라는 말이 얼마나 어렵고 광범위한 것인지 놀란다. 나와 세상의 간격이 그렇게 달랐던가. 

  나는 만복이와도, 만복이의 친구와도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꿈이 있기는 했지만 늘 이게 맞을까 고민했고, 바로 무조건 안정적인 직장으로 바로 뛰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단순하다. 대학생활의 크고 작은 로망도 있었으니까! 긴 방학과 자유로운 시간표, 듣고 싶은 강의 골라듣기, 축제, 기타 등등. 하지만 나라도 그런 말을 부모님이나 담임선생님께 들었다면 고등학생이든, 지금이든 감흥이 없지 싶다.  학생들이 바보는 아니다. 당연히 고등학교 때도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던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고등학생의 나에겐 당장 눈 앞에 놓인 첫 관문이 대학이라서, 그 마저도 잘 시작되지 않으면 다른 관문들은 얼마나 어려워질까 싶긴 했다. 오죽하면 수능이 정말 가까워진 때에는 보름달을 보고 소원도 빌었다. 만복이가 비행기를 보고 소원을 생각하듯이 보름달이 나에게 그런 존재였나보다. 보름달한텐 당시에 패기롭게 그랬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도 잘해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이번 한번만 도와주면 다음부턴 내가 알아서 해보겠다고. 그러면 소원같은 건 다시 빌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무서웠다. 인생이 하루로 결정되는 기분이라서. 수능성적표가 현재까지 내 인생의 성적표는 분명 아닌데 왠지 세상은 그렇게 볼 것 같아서, 미래의 나의 성적표랑도 이어질 것 같아서. 
  
  막상 요즘 집에 돌아오는 순간에는 달을 보면서 그 때 생각을 가끔 한다. 노릇노릇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새초롬한 초승달이 뜨는 때면. 그 때가 더 낫고 말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그 때도 그 때대로 힘들었고 지금은 지금대로 힘든거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달한테 소원을 빌지 않고 있다는 거다. 그래도 나름 약속을 들어줬으니까 이제는 무서워도 지쳐도 달에게 다시 소원을 빌지는 않겠다고. 그 때 공약을 세웠듯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해볼테니 잘 지켜보라는 말 지키느라고 이러고 있다. 

  만복이가, 그 선배가 두려워서 계속 훈련했듯이 사람마다 '열심히'와 '적당히', 꿈과 노력 사이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방법은 분명 다르다. 나야말로 두려워서 늘 생각만 하고 도망치기도 했다.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은데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안되겠다고. 대학마저 벗어날 때가 되었을 때 결국 나는 도망을 간 셈이다. 막상 답은 제대로 내렸다고 할 순 없는건데 일단은 더 이상 전전긍긍하기 싫어서.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하는 비용을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덧씌워야 하는게 부담스러워서 도망친거다. 뭐할 거냐고 이제 돈벌이는 해야되지 않냐는 말에 탑승한거다. 작년은 그래서 계속 생각하고 쉬어가고, 도망치는 시간이었다. 아마 글도 그래서 지쳤고, 잘 모르겠다는 것도 많았다. 처음 시작할 때도 올 해는 아무 생각없이 뭘 결정하지도 말고 쉬는 것 같진 않겠지만 쉬어가보자고 결심했다. 내가 뭘 어쩌고 싶은지를 몰라 오히려 말은 아끼고 있지만, 작년 한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고 뭔가에 마음이 있다면 그 쪽을 따라가기로 했고, 나는 올해 어느정도 그 답을 찾은 기분이다. 그래, 빨리 갈 필요 없다. 결국 겁이 많아서 고민만 계속하더라도, 천천히 가도 분명 문제는 없다. '적당히'가 뭐고, '열심히'가 뭔가. 그 사이 애매한 함정이 있듯이, '천천히'와 '빨리'도 또 하나의 함정이다.  뛰고 싶어도 걸어가보는게 경보에서 가장 어렵다는 말, 참 어디서나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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