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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Mar 04. 2017

영화 <그물>,이데올로기란 그물에 희미해진 눈동자

예측가능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괴로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반 세기가 지났는데 달라진 건 없다. 1960년대 소설 < 광장 >이나 2016년의 영화 < 그물 >이나. 중립국의 선택지가 없어졌을 뿐이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사실 그렇게 멋드러지게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오 나의 조국'하고 막 가슴이 벅차고 설레고 그러진 않을 거란 거지. 오해는 마시라, 애국자가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내 나라 욕하면 화나지만, 그래도 나는 내 나라가 이런 곳이다 말할 수는 있는 거니까. 콩깍지는 벗겨진지 오래인, 권태기조차 넘어버린 사이. 태어나 맺은 수많은 관계 중에 국가와 국민만큼 오래된 사이가 있을까. 평생 친구보다도 훨씬 구속적인 관계.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아주 오래된 어느 커플과 철천지 원수와의 삼각관계처럼 보일 수도 있는거다. 이러니까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좋다.

 예측가능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괴로웠다. 
이 세상에 모기와 바퀴벌레만큼이나 사람 괴롭게 하는 그 이데올로기라는 녀석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하수에 그칠 수도 있을 만큼 더 큰 손, 공기같은 존재.  수많은 사람을 한데 뭉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칼을 휘두르고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피튀기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던 명목이었다. 힘에 대한 욕망과 합쳐져 온 세계가 갑자기 편을 나눠서 지겹게 싸웠다. 그래서 누군가는 뭔가를 얻었겠지만 배보단 배꼽이 컸다. 대체로는 흙먼지 가득한 풍경과 그에 맞먹는 한숨가득 답답한 마음을 얻었다. 우리나라는 그 싸움판에서 어리둥절하게 남아있다가 움푹 패인 흉터를 기준선 삼아 서로를 욕하며 살아왔다. 별게 아닌 것 같은데, 별 거다. 아주 별 거다.  조금이라도 누구 편을 들면 창이 날아온다. 그래서 다수가 선택하는 건 자신의 생각을 묻어버리는 거다. 사람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 아니었나. 정말 타협할 수 없는 것만 있던가. 순진하다고 말할 걸 알면서도 순진하게라도 말해보고 싶었다. 우리가 이 이데올로기란 그물을 온 역사에 펼쳐놓고 스스로 물고기가 되기로 한 것 아닌가. 영화 <곡성>은 차라리 약과일지도 모른다. 그곳은 곡성뿐이지만, 전 세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던져진 미끼를 물어버린 거니까. 더 슬픈 건 얜 악마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것. 

 평범하게 북에서 아내와 딸 셋이 행복하게 살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10년 내내 모아 산 소중한 배를 몰고 물고기를 잡았다. 오늘도 물고기를 낚다가 그물이 엔진에 걸렸다. 그 고장난 엔진은 그를 선을 넘게 했다. 수많은 유혹을 넘겼다. 난생 처음 만나는 생활, 넘어오라는 회유, 밑도 끝도 없는 의심과 폭력, 연민과 동정심으로 따라온 인연. 그게 나라가 좋아서라기 보다 내 가족 품에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기껏 돌아갔더니 모든게 달라져있었다. 갑자기 말기 암 환자 진단이라도 받은 것처럼. 의심받았다. 아내도 자신도 달라져있었다. 맘 편히 좋아할 수가 없다.  그가 바라던 것은 어차피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예전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 모진 고생하고 남은 건 딸아이 줄 새 곰인형이다. 근데 딸아이는 자꾸 꿰매서 해진 옛날 곰인형이 더 좋단다. 아빠나 엄마랑 같은 심정일 것이다. 부모님의 애정행각을 모르는척 할만한 그 아이가 모를 리가 없다. 곰인형은 어느 국가냐가 아니라, 그가 떠나기 전 예전의 가족과 지금의 가족 모습을 대표한 것만 같다. 아이가 곰인형으로 소극적으로 표현했다면 아버지는 참을 만큼 참아서 바다로 간다. 맞을 만큼 맞았고 더럽고 치사한 꼴도 데칼코마니처럼 당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다시 바다에 나가려고 안간힘 쓰는 그에겐 다시 총알이 날아올 뿐이었다. 왜 가장 오래된 연인인 국가는 그를 이해해주지 못하는가. 그는 누군가와 헤어지거나 새로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남으로도 북으로도 중립국으로도 가고 싶었던게 아니다. 그러니 포스터의 저 문구 '나를 북으로 돌려보내주시라요'보다는 '나를 돌려보내주시라요'가 더 맞는 것 같다. 그에겐 나침반 방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 자신의 변함없는 모습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가장 괴로웠던 건 일리 있는 말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 하에서 괴롭게 사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줄이자는 빛과 그 때문에 가족은 버리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야만 하는 그림자가 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돌아온 그를 금의환향했다며 환영하는 빛이 있고 그가 혹시나 나중에서야 흔들리지 않을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는 그림자가 있다. 부유하지 못해도 내 가족과 나의 단란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은 빛이 있고 이미 보고 듣고 느낀 부유함과 새로운 인연에 흔들리는 그림자가 있다. 가장 마음아팠던 건 그래도 그물과 미끼보다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마음이었다.  여러 빛과 그림자 중에서 물고기의 희미해진 눈동자와 처연한 곡소리 같은 음악만이 두고두고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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