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이름의 타협

다르게 살아보려 애쓴 시간들

by 가을꽃나무

어느 날,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결혼식을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이미 연애 때부터 여러 번 나눴던 이야기였다.
“자식이 둘도 아니고 나 하나잖아. 그러니 엄마, 아빠도 속상하실 거야.”


남편의 말은 늘 그랬다.
상냥하게 시작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조촐하게, 양가의 가까운 가족만 모여서 해요.”


하지만 곧 말이 바뀌었다.
“엄마, 아빠가 뿌린 게 많으셔서… 나도 그렇고,
어차피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자기 신경 안 쓰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나는 비혼주의자였다.
‘결혼식’이라는 형식이 싫었다.
누군가의 축복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겉모습을 꾸미는 무대 같았다.


결혼은 ‘행복을 연기하는 날’이 아닌데,
그날의 나는 이미 내 신념 중 하나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결국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드레스숍에는 시어머니가 함께였다.
“하루뿐인 날이니까, 제일 예쁜 걸로 해야지.”
그 말에 웃어야 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한복을 고를 때쯤에는 이미 마음이 비워졌다.
엄마는 단아한 걸 원했고,
시어머니는 금박이 화려한 옷을 고르셨다.
나는 그저, 준비된 옷을 입을 뿐이었다.


식사 자리에서도 시어머니는 엄마의 의견을 가볍게 눌렀다.
“그건 너무 평범하잖아요. 이게 더 비싸고 맛있어요.”
그날의 모든 장면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존중은 없었고, 배려는 일방적이었다.


결혼식 전날,
엄마는 조심스레 말했다.
“아빠는 못 가실 것 같다.”


순간, 멍해졌다.
다리에 힘이 없어 걷지 못하는 것도,
기저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보다 먼저,
분노가 올라왔다.
그보다 더 연로하신 남편의 증조할머니도 휠체어를 타고 오신다는데,
내 아버지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느낀 건 슬픔이 아니라, 참담함이었다.
이유를 알고 있어도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날, 마음 한쪽이 조용히 무너지는 걸 느꼈다.
“축복받아야 하는 날인데,
나는 광대 같았다.”


아마도 그날의 예감은
이미 내 안 어딘가에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어떤 변수로 또 나를 무너뜨릴지 모르는 불안.
그날 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스스로의 축복조차 받지 못한 채
불행한 신부가 되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또 다른 장(章)이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며칠 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큰 조카의 목소리였다.
“고모,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별이하고 통화하고 싶어? 연락하고 싶어?”


그 순간, 결혼식의 불길한 예감이
왜 나를 따라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통화를 끝내지도 못한 채,
오래된 공포와 죄책감이 다시 깨어나는 걸 느꼈다.


그 이야기를 뒤로,
결혼식 전날의 통화 내용이 전해졌다.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상처 밑에서
무거운 돌 하나가 천천히 굴러 내렸다.


별이는 어릴 적, 잠시 함께 살았던 나에게
그때의 폭력에 대해 묻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큰 조카는 조용히 말했다.
“작은 고모는 이유 없이 때린 적은 없어.
나도 도둑질해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았었지.
그러니 맞은 기억만 떠올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 대화는 단순한 통화가 아니었다.
내 과거의 그림자가 조카를 통해
다시 내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나는 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시절의 나는 너무 어두웠고,
체벌이 나쁘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큰 조카에게는 예전에 잘못을 빌었었다.
몰랐어도, 잘못은 잘못이니까.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그 여자의 딸인 그 아이에게는
도저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태도도 그 여자의 죄까지
함께 용서하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죄는 내 가슴에 남아 있다.
희미해졌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죄가 없다.
다만, 부모를 잘못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죄’라 하기에도 너무 가혹한 벌이다.
그 무력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나도 안다.


하지만 그걸 품어줄 여유조차
지금의 나는 없다.
그래서 조카에게 말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내가 지은 죄를 안다.
어두웠던 시절,
그때의 나는 무너져 있었다.
그 시절의 벌은 달게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의 죄만은, 아직도 용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내 인생을 폐허로 만든,
재앙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나는 나로서의 삶을 잃었고,
다시 세워진 지금의 나는
그 잔해 위에 서기까지
수많은 어둠을 지나왔다.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 남아
빛이 닿을 때마다 그늘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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