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살아보려 애쓴 시간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이다.
운동을 하던 큰오빠는 종종 일찍 집에 왔다.
그럴 때면 집은 금세 긴장으로 가득 찼다.
“밥 차려와.”
그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엄마가 하던 걸 흉내 내며 밥상을 차렸지만,
결과는 상이 엎어지고,
잡히는 대로 맞거나 발로 차이는 것이었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어도
머리가 멍해지고, 손끝이 떨렸다.
성인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의 부재로 아빠의 밥을 준비했지만
돌아온 건 칭찬이 아닌 꾸중이었다.
“어떻게 차려드렸길래 개밥 소리가 나와?”
개밥을 드린 적은 없었다.
분명 잘 드셨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나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것 같다.
그때부터 주방과 요리는
나에게 두려움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혼자일 땐 괜찮았다.
하지만 ‘대상’이 생기는 순간,
머리는 하얘지고, 몸은 굳어버렸다.
바보같이 아무 생각도 못하고 떨면서
맞는 나 자신을 스스로 싫어했던 시절이었다.
그건 ‘바보’ 여서가 아니라,
기억의 몸짓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이
마냥 신기했던 어린 시절,
처음의 시작은 언제나 내 선택이었다.
그림도, 음악도, 운동도.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불안함이었다.
특히 운동부 시절이 그랬다.
신기함에 이끌려 들어갔지만
그 문을 나오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운동신경이 좋다는 이유로
강제로 붙들려 있었고,
‘그만두겠다’는 말엔
협박과 폭력이 돌아왔다.
그래서 나에게 재능은
불안과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빠는 늘 언니와 나를 비교했다.
언니는 앞에 나서길 좋아했고,
아빠의 자랑이었다.
나는 반대였다.
그래서 언제나 ‘쓸모없는 아이’라는
눈빛을 받았다.
그런 시선 속에서 자라며
나는 누군가 앞에 서는 걸
힘들어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인정받아야 하는 모든 순간이
나에겐 분노처럼 느껴졌다.
화과자 공방을 운영하는 남편의 지인이
임신 축하 선물을 보내왔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모양,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달콤함까지 —
그건 한참 우울증에 시달리던 나에게
정말 다정한 선물이었다.
남편에게 이것저것 묻다 보니
생각보다 꽤 비싼 선물이었다.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서 부모님과 언니에게도
비슷한 걸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중요한 선물이지.’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며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 후 혼자 사부작거리며 태교 삼아 만들었다.
명절날, 정성껏 포장한 선물을 내밀었을 때
남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거 샀어? 돈 없는데….”
“혼자 있으니까 태교도 할 겸 만들어 보겠다고 했었잖아요.”
“만든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 자기야. 손재주 진짜 대박이다.
당신이 공방 해도 되겠어.”
그때는 몰랐다.
그 말 한마디가
내 안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기억의 문을
조용히 열어젖히는 신호였다는 걸.
그 문틈 사이로
지워지지 않은 과거의 공포가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공방’이라는 단어 한마디는
그저 칭찬이 아니었다.
내가 잊고 살았던 두려움이
다시 무대로 올라오는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