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천천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르게 살아보려 애쓴 시간들

by 가을꽃나무

지금껏

칼로 무 자르듯 단번에 잘라낼 수 있는 관계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서서히

아주 천천히, 마음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의지’였다.


남편은 힘들게 살아온 나를 보고 말했다.

“이제는 나를 좀 의지해줬으면 좋겠다.”


결혼 후에도 씩씩하게 살아가던 나의 모습을

안타깝게 보며 한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픽, 웃음이 났다.


이럴 거면 왜 그때

‘의지하라’고 말했을까.


그 말은 결국,

마음을 얻기 위한 말에 불과했다.

그 사실이 헛헛했다.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조용히 말했다.

“서류, 정리해 줘요.”


그는 놀랐다.

이혼 이야기는 여러 번 나왔지만,

그에겐 늘 ‘그저 말뿐인 이야기’였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야 할 단계가 되어버렸다.


그는 “나중에 얘기하자”며 자리를 피했고,

또 피했다.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면 화내는 척했고,

진짜 화가 났을 때면

눈빛과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의 패턴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태도가 변한 걸 느꼈는지

그는 크게 화를 냈다.


솔이를 앞에 두고

곧 싸움이라도 날 듯 공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숨을 고르고,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공방의 구조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고,

내 몸은 상처로 빼곡히 채워져 갔다.


칼에 베이는 일은 다반사였고,

하루 일하고 하루 앓아눕는 날들의 반복.

주방이 높아 발을 접질려 넘어지기 일쑤,

깨지고 부딪쳐 멍이 들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


보이는 손과 다리는 멀쩡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움직였다.

움직여야만 할 것 같았다.


삐걱거리며 그렇게,

살아 있으려 애쓰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자연스럽게 운영까지 나와 함께할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만들기만 해, 나머진 내가 다 할게.”


그 말을 그래도 믿었다.

그러나 디저트 제작이 시작되자

그는 하루 세 시간만 돕고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대뜸 아무 일 없었던 듯 말을 이었다.


“아는 형의 지인분이 사람 구한다고 해서, 면접 보러 가기로 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페이는 맞춰주겠다고 하더라고. 내일 갈 거야.”

그는 당연한 듯 말을 덧붙였다.


“일하게 되면 그곳에 숙소 잡아야 할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이곳은 여전히 정리할 것 투성이었고,


그가 떠나고 나면,

나는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그는 또 다른 일로 발을 돌렸다.


하지만 그에게 체근하지 않았다.

지금껏 생활비를 몇 번 가져오지 못했을 때도,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물론 나의 통장은 마이너스가 되어갔고

결국 조용히 대출을 받아 생활을 이어고 있었다.

그럼에도 돈 걱정하는 그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어떤 말도 그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알았어요.” 한마디로 넘겼다.




나는 남편을 여전히 사랑했다.

그래서 또 나를 지우려 했다.

그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던 마음.

그 마음이 문제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내 안의 나는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처럼

온몸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움직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남편은 늘

나의 손재주를 자랑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자랑을 지켜주기 위해

나는 주방에 틀어박혀 메뉴를 개발했다.


공방 운영도 해야 했기에

프로그램을 짜고

원데이 클래스를 준비했다.


그리고 첫 수업을 신청한 사람은

예전에 내가 원데이를 들으러 갔을 때 만났던 분이었다.

그분이 내 소식을 듣고

수업을 신청해 주신 거였다.




하지만 그 수업을 준비하던 중,

채칼에 손가락을 깊게 베여

응급실로 가 꿰맸다.


상황을 설명하자

그분은 “괜찮아요.”라며 예정대로 수업에 오셨다.


그렇게 한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수업을 진행했다.


화과자는 예쁘게 포장되어 나갔고,

모두 잘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나만 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내 안의 문제를.




손가락을 꿰매어

움직임이 불편했던 덕분에

그분은 내 떨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떨림은 단순히 손끝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거였다.


숨쉬기도 힘들었고,

손의 떨림도 멈출 수 없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내 안의 문제를

마주해야 한다.”




예전의 나는

그저 ‘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젠

하나하나 바로잡아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솔이를,

솔이답게 자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다음 수업을 잡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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