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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재 Nov 20. 2023

번역할 수 없는 말들

'cause nothing last forever.


번역일을 하다 보면 종종 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되나 싶은 난관에 봉착한다. 이런 어려움은 짧게는 5~10분, 길게는 일주일 동안 고민하다 겨우 괜찮은 번역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번역가를 자칭하며 이런 말을 하긴 참 그렇지만 그런 고민을 며칠째 안고 끙끙 앓다보면, 때로는 번역할 수 없는 말들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끔 생소한 팝송들 중에서 번역하기 어려운, 되게 신박한 표현이 꽂히는 구절이  있으면 유튜브 덧글 중에서 노래 가사를 적은 덧글을 찾아본다. 그리고는 이 노랫말을 한국어로 옮긴 가사 번역 영상들이 유튜브에 있는지까지 검색을 해본다. 간혹 해석 영상이 아예 없거나 특정 구절에 대한 번역이 빈약한 영상들도 떠서, 이 노래들을 직접 번역하고, SubtitleEdit으로 자막을 달고, 블로그에 올리는 게 내 하나의 취미다. 하지만 내 번역은 공식 자막으로 쓰기에는 내 감상이 워낙 많이 첨가되어 있기에, 주관성이 짙다. 똑같은 노래를 들으며 각기 다른 감상을 꺼내는 게 사람이지만, 내 자막은 그걸 허용하기보단 사람들이 내 감상에 좀 더 몰입하게 만드는 편향성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이는 온전히 내 개인적인 취미이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뢰를 받고, 대금을 청구하며 작업하는 정식 번역에서는 어떨까? 그런 번역에서 번역할 수 없는 말을 만나면, 정말 골치가 아프다.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는 시한부 번역가로서 이렇게 큰 도전과제를 만나면 가슴이 뜨거워지지만 머리도 뜨거워져서 탈이 날 것만 같다. 다음은 우리 학과 교수님의 추천으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의뢰 받은 <어떤 만화>의 네컷만화 중 일부인데, 얼핏 보면 별 거 없어보이는 짤막한 그림과 텍스트 몇 마디일 뿐인데 이걸 번역하느라 일주일 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 굴인 만화

<어떤만화> 만화 컷 중 일부.

해당 컷에는 언어유희를 사용한 이중 반전을 통해 유머를 만든다. '먹는 굴'을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신선한 굴 팝니다" 팻말을 보고 손님들이 천막을 들어가보니 굴(땅 밑을 뚫어 만든 길)이 있어 실망한 채로 상점을 나갔는데, 알고 보니 땅굴 속에 진짜로 먹는 굴을 파는 매대가 있었다는 점으로 유머가 이루어진다. 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골치가 아팠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1컷 "신선한 굴 팝니다" 팻말의 공간 크기, "굴"이 쓰인 부분만 유독 크게 그려짐.

2. 1컷 팻말에 쓰인 문구와 2컷의 구덩이가 언어유희를 이뤄, 3컷에서 손님들이 실망한 표정을 짓는 게 납득이 가야 함. 손님들은 먹는 '굴'을 사려는 기대에 들어왔으나, '땅굴'을 보고 실망한 것.

3. 4컷 판매 중임을 나타내는 SALE 표시와 매대 위에 올려진 굴, 이를 또 앞의 언어유희와 어떻게 엮을 것인지가 어려움. 손님들이 원래 원했던 상품을 나타내거나, 적어도 앞 두 개의 언어유희와 똑같은 말을 활용해야 함. 이를 위해서는 "완전 반값" 문구를 창의적으로 번역할 필요가 있음.


고뇌했던 사고 과정을 전부 거두절미하고 내 결과물을 바로 보여주자면... 아래와 같다.


굴인 만화 → PIT TOON

신선한  팝니다 → HELLO, PIT STOP

완전 반값 → OLIVE PITS


언어유희의 기준점을, 텍스트가 아니라 그림으로 제시되는 '땅굴'로 잡았다. 텍스트는 내가 바꿀 수 있는 대상이지만 그림은 아니기에. 그렇다면 '땅굴'을 의미하는 영단어는 무엇으로 잡지? 여기서는 Thesauraus.com이 유용하게 사용되는데, 특정 단어를 입력하면 그 단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예를 들어 구덩이를 의미하는 pit을 입력하면 abyss, crater, mine, shaft, tomb, trench 등 유사한 단어들을 제시한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PIT으로 번역한 이유는, 4컷 문구보다는 1컷 문구와 언어유희를 이루기가 보다 더 수월해서였다. 원문은 굴을 판매하는 상점의 역할이었다면, 내 번역문에서는 Pit Stop (장기 여행 중의 휴식·식사 등을 위한) 정차: 네이버 사전으로, 만화상에서 방문하는 손님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 느낌으로 상황을 각색했다. 그리고 원문의 팻말 중 '굴' 텍스트가 쓰여진 부분이 좀 더 크기 때문에, 그 크기에 맞춰 HELLO, PIT STOP으로 PIT 글자를 강조하여 식자를 달 것을 유도했다.


1컷과 2컷이 언어유희를 이루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었으나, 해결방안을 찾는 데 가장 진절머리가 났던 것은 1+2컷 & 4컷과의 조화였다. 4컷 그림상 보이는 물체는 아무리 봐도 굴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이 번역 프로젝트를 맡는 동안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 며칠 동안 이 구간을 잠시 잊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림상의 굴이 매우 작게 보이는 점, 색깔에 따라 자칫하면 광물이나 돌덩이, 다른 물체로도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pit"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다양한 물체들을 수 시간 동안 구글링했다. 그 결과...

Olive Pits! 심지어 굴처럼 식재료다! 출처: 구글 이미지

4컷 그림상의 물체와 시각적으로 유사해보이는, pit이 들어가는 물체를 찾았다! 4컷의 물체를 설명하기 위한 내 해답은 "olive pit"으로, 올리브 씨앗을 의미하는데 위 사진을 보다시피 그림상의 물체와 그나마 근접해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올리브 씨앗의 사진을 구글에서 발견하고, 그 이미지를 만화와 대조해봤을 때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린 번역 중 하나였고 나름 뿌듯하게 여기는 번역 중 하나다. (먼 훗날 이 글을 다시 읽었을 때 이런 개구린 번역을 보고 뿌듯해했었다니, 하며 이불킥할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야 고민을 오래 해서 꽤 괜찮은 번역이라 느끼는 거지, 이 만화를 처음 접하는 영문 독자가 이 컷을 읽었을 때 센스 있게 읽힐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만화에서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들(배경이 바다라는 점, 바다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굴 / 반면 올리브 씨앗과 바다 배경은 잘 어울리지 않음)을 감안하면 한국어 원문을 읽는 것과 내 영어 번역문을 읽는 것에서 독자에게 결코 동등한 효과를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이를 번역할 수 없는 말의 사례로 꼽기 적절하다 느꼈다.


<어떤만화>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영문으로 출판할 예정인데, 1차 번역자였던 나의 작업이 고스란히 최종 결과물에 반영되어 나온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꽤 자랑스러울 것 같다. 이 글을 읽은 다른 번역 꿈나무들로부터 더 좋은 대안이 나올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 대안을 내게도 알려준다면 영광스럽겠다!





# Nothing Last Forever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 자동재생을 무한히 틀어놓으며 멍하니 길을 걷다 보면 우연히 내 맘에 닿는 곡들이 생긴다. 내가 기타와 영어 가사를 좋아해서 그런지 어쿠스틱 바이브의 팝송이 들리는 순간 웬만하면 바로 매료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알게 된 노래인 Like Strangers Do에서, 정말 똑똑한 가사라 감탄했던 구절이 있다.

유튜브 기몽초 - 헤어지고 마주치면 모르는 척 해줘 : AJ Mitchell - Like Strangers Do [가사/해석/lyrics]

(캡처 화면은 유튜브 기몽초 님의 번역이다. 그렇지만 이 문장은 번역이 담아낼 수 없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기몽초 님은 노래의 감성을 살려 번역을 매우 잘하시는 분이다. 결코 번역을 폄하하는 의미가 아님을 사전에 분명히 밝힌다)


You and me, what are we if we're not together?
It could be nothing 'cause nothing last forever.

Pre-chorus는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와 내가 함께가 아니라면, 우린 대체 뭐지?"의 의미를 담는 첫번째 문장과, "It could be nothing 'cause nothing last forever." 두번째 문장.


참 단순한 문장이지만, 이 노래를 들은 순간부터 이 구절에 꽂혔던 나는 이 문장이 전하는 바를 온전히 번역하려고 몇달 간 고심했고, 그 끝에 이 또한 번역할 수 없는 말이라 규정하기로 했다. 사실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 자체도 오로지 이 문장 하나를 간직하기 위한 바람에서였다.


두번째 문장에 대한 유튜브 기몽초 님의 번역을 먼저 살펴보면, 첫번째 문장에 대한 대답으로 "아무것도 아닐 테지, 왜냐면 영원한 건 없거든"이라는 말로 해석이 되었다. 사이가 끝났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 그리고 영원한 건 없다는 비관적인 체념. 이렇게 해석하면,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뻔한 이별 문구가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원문이 담는 뉘앙스는 얼핏 다르다. 분석적으로 접근하면, 두 구절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각각의 구절 모두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It could be nothing.

1.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

2. 무(無)일 수 있어.


"무(無)일 수 있어"라는 번역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엉터리 번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아님=즉, 무(無)라는 의미만 생각하고 일단 감안해달라.


(Be)cause nothing last forever.

1.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2. 무(無)란 영원하기 때문에.


처음 가사를 들었을 때 가장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경로는 1번이다.


"(우리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사이도 영원하지 않다.


어디서든 찾아볼 법한 흔한 이별 문구로 포장된 이 문장은, 사실 다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는) 무(無)일 수 있어, 무(無)는 영원하기 때문에." 비록 우리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영원할 수 있다.


같은 문장임에도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냐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담는 말이 된다. 결국 '이별한 상황' 자체는 똑같지만, 이 문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어떤 마음가짐을 먹느냐가 갈리는 것이다. 


이를 똑같이 이중적 의미를 지닌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이 불가능한 이유는, Nothing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보통 "아무것도 아닌"이라는 수식의 형태를 띄어야만 자연스러운 문장 성분으로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에서처럼 단일한 명사로 활용하려면 '무(無)'로 번역할 수 있는데, 누가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를 "우린 무(無)야"라고 말하는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읽혀질 수가 없는 번역이다. 이 간결한 문장을 번역하기 위해 이런저런 복잡한 의역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지만, "It could be nothing"과 "Nothing last forever"이라는 담백한 문장으로 심오한 의미를 담는 이 완벽한 표현을 깔끔하게 옮길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지만,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우리는 영원하다는 말. 혹은 우리는 영원하니까, (그렇지만 영원한 건 없으니까) 즉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단순한 체념보다 얼마나 무게가 실린 말인지. 번역할 수 없는 말처럼, 내가 어떻게 고쳐볼 수 없는 '우리'를 표현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문장이다. 나는 그래서 이 문장이 오랫동안 인상에 남았다.





# Would you?

오랫동안 홀로 이 노래를 들었다가, 유튜브에서 가장 유명한 해석 영상은 이 노래를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해 찾아봐서 기몽초 님의 영상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 감상이 나와 많이 달라 의외였다. 그 원인은 Would you?를 일종의 부탁으로 해석하는지, 일종의 궁금증으로 해석하는지에 따른 차이였다.


If you saw me on the train would you look the other way? And if you passed me on the street, would you look down at your feet and move on through?


기몽초 님은 이걸 ~~해줄래? 라는 부탁의 식으로 번역을 했다. 어쩌면 이 쪽이 원래 의도에 더 근접한 해석일지도 모르는 것이, Would you의 보편적 의미는 보통 '부탁'으로 통한다. 네이버 사전에 검색해도 그렇고, 영문으로 구글링해도 웬만하면 그 뜻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노래를 홀로 해석해왔던 나는 Would you를 들을 때마다 매번 ~~ 그럴 거니? 라는 의문형으로 받아들였다.

아직도 이해하기 아리송한 말. 언제쯤이면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출처: 영화 컨택트 Arrival)

Would you는 실제로 부탁의 의미로만 통하지 않는다. 위 대사를 예시로 들자. "If you could see your whole life from start to finish, would you change things?"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볼 수 있다면, 인생을 바꾸려고 들겠는가?라는 의미의 질문이다. 인생을 바꿔주겠니?와 같은 부탁하는 질문이 아니다. Like Strangers Do의 노랫말도 같은 케이스라고 볼 여지가 있다.


원문은 청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 중의성까지를 완벽히 한국어로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또 다시, 번역할 수 없는 말인 셈이다. 이는 번역에 대한 부족한 이해 같은 지식의 한계 때문이 아니다. 언어마다 그 언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아이디어가 있고, 때문에 해당 언어 사용자가 내놓은 심상은 다른 언어 사용자가 이해하기 난해한 경우가 존재한다.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피어 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을 나는 그래서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노래의 내용은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면 더 정확히 번역할 수 있었을 테지만 노래란, 시란, 문학이란 독자의 해석과 감상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러니 내가 유튜버 기몽초였다면... 다음과 같이 번역했을 것이다. 결국에는 이번 가사 번역 또한, 내 감상이 많이 개입되었다. 

Like Strangers Do - 김현재 번역

(번역을 애초에 워낙 잘하셔서 대부분 그대로 뒀기에 엄연히 말하면 제 번역이 아니라, 유튜버 기몽초 님의 번역을 미세하게 수정한 버전입니다.)


이처럼 한국어로 완벽히 표현할 수 없는 영어가 존재하고, 영어로 완벽히 표현할 수 없는 한국어가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때로 한국어로는 쓰려는 말이 써지지가 않아 영어로 작문할 때가 이따끔씩 있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는 show off는 아니다. 어쩌면 내 모국어조차 완벽히 통달하지 않았음을, 어휘력이 부족함을 입증하는 꼴일지도 모른다. 내 삶에서 그저 어떤 것들은 영어로 표현하는 게 그 의미에 좀 더 와닿고, 간혹 그 언어의 방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을 뿐이다. (훗날 한-영 번역도 전문적으로 하는 번역가가 된다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동시에 영어 어휘를 풍부하게 연습하려는 속셈도 조금 내재한다.)


다른 언어로는 흉내만 낼 뿐이지, 결코 완벽히 따라할 수 없는 언어의 고유한 속성은 얼마나 개성적인가? 번역가를 자처하는 나는, 목표 언어의 문학적인 말들을 그와 거의 동등한 도착 언어의 말로 표현해낼 때 희열을 느끼지만, 어떤 수를 써봐도 번역할 수 없는 말들은 좌절감보다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언어를 번역을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을 때, 나는 다시 한번 겸손함을 느낀다.


당신에 대한 기억의 잔상들.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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