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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재 Mar 19. 2023

작가를 완성시키는 디테일,
그에 담긴 생의 이면


사회적 거리두기로 처박혀 지루한 일상에 시집을 선물해보는 것은 어떤지. 시집 사는 데 돈이 아깝다면 먼지 자욱이 구석에 박힌 책을 꺼내도 좋다. 이 비상시국에 무슨 시 타령, 꽃 타령이냐고? 시가 밥 먹여주느냐고? 밥을 최우선으로 살다가도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시를 내세운다. 출사표를 던질 때, 사의를 표할 때, 사랑에 빠질 때, 버림받고 캄캄할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은 시 구절을, 시의 순간을 떠올린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당신의 손이 참으로 차갑다고 읊조리는 것처럼, 신종 폐렴의 공포가 이어져도 시적 순간은 늘 있다. 지나치는 바람처럼, 고치지 않아도 되는 버릇처럼.

봄빛과 그리움은 감염시킬 수 없다 – 박신규 2020.03.30. 한겨레 발췌문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신학 공부를 하여 목사가 되겠노라고 다짐했다.

지상의 양식, <생의 이면>, 이승우


  개인마다 다른 시적 순간은 개인이 향유한 경험들이 근간이 되어 발생한다. 가령, <생의 이면> 속 박부길은 동심이 부재한 유년기를 보냈으므로, 또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므로 감정 표현에 서툴렀을 것이다. 비 오는 날 우연히 피아노 소리를 듣고 교회당에 들어선 박부길은 그 선율을 만들어낸 연상의 여자 김종단에게 반하며, 그녀가 막연한 언젠가에는 목사와 결혼할 것이라는 바람을 듣는다. 그러니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고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은, 신학 공부를 하겠다는 일생일대의 선언이었다.


  나는 고백에서 어떤 말들을 전하고, 또 들었는가. 그 내용에는 나의 개인사가 하나의 디테일로 담긴다. 속세의 정치에 대해 관심 두기를 꺼려했던 박부길조차도 학우들에게 프락치로 오해 받아 구타를 당한 일이 신학대학을 떠나는 결정적인 일로 작용하며 학생 데모가 활발했던 시대 배경이 그의 인생에 묻어 있다. 나의 사례로는 인스타그램이 한창 유행하는 현대와, 대학생들이 혈안이 되는 학점 문제가 반영되었다. 내가 주고받았던 말들 중에는 “(너와의 기억을) 인스타 하이라이트(인스타그램의 기능 중 하나)에 저장은 못해도 인생 하이라이트에 저장해 놓겠다”며, 우리 또래들이 자주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언급되었는가 하면 “네가 무엇을 해도 에이쁠을 주겠다”는, 그런 살갑고 낯간지러운 고백의 예고에는 우리 대학생들이 운운하는 학점이 달려 있다. 나의 말에는 내 개인사가 디테일이 되어 드러난다. 이런 디테일들이 곧 한 사람의 생의 이면이다.


  내 삶에는 디테일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있다. 어떤 편집자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는 큰 책을 읽을 때 큰 외피보다 작은 디테일들을 사랑한다며, 문장에서 언급되는 한 단어, 주인공의 대사 몇 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KBS 다큐멘터리 3일에서 별다른 음악도 없이, 웅웅대는 어선의 엔진 소리를 배경으로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이형기의 『낙화』와 조지훈의 『사모』를 인용해 시 구절을 읊조리는 선장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 까닭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가 초점을 맞춘 ‘디테일’이라는 단어에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문학은 허구로 채워넣는 스토리야. 시인의 글귀를 인용해 읊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저 선장님의 모습을 보며 가슴을 뭉클이는 건 저 분이 낭송 자체를 잘해서, 배경이 좋아서보다는 앞선 말씀을 귀담아들으며 어떤 아픈 과거가 있던 분일지, 어떤 가슴 시린 사연이 있을지 우리 스스로 상상해서 낭송의 의미에 살을 보태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흰 도화지 한 폭에 점 하나 찍어서 몇억을 번다고 비난하기보다는 그 화가의 삶에 사람들이 어떤 의미 부여를 했는지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예술이듯이 창작품은 곧 창작자에 대한 스토리(진실이든 우리의 상상으로 입힌 허구든)로 그 가치가 만들어지는데 이건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분류하지 않는 어떤 장르에서든, 삶의 모든 분야에서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 같다.

유대인 출신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대인의 고통을 다룬 ‘쉰들러 리스트’를, 범죄 환경에 노출된 어린 시절을 버티고 자란 마틴 스코세이지가 마피아 조직원들을 주인공으로 한 ‘좋은 친구들’을, 동성애자인 루카 구아다니노가 ‘콜미바이유어네임’을 연출해서 그 작품들의 가치가 더 고상하다고 믿는 이유는 누구나 큰 외피를 모방할 수 있어. 근데 작은 디테일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이 세상 자기 혼자만의 방식으로 오밀조밀 드러낼 수 있지 [...]

결국 한 사람의 진실된 인생이 담긴 작가의 가치관은 전체적인 그림이 아니라 그런 자잘한 디테일에 묻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단락들을 기억 속에 더 깊이 간직하게 되는 것 같다.

 

 작가(직업적 의미로서가 아닌 필자로서의 의미)를 이루는 것은 디테일이다. 그리고 그 디테일은 작가가 쓴 글에서 발견될 수 있다. <생의 이면>은 작가 박부길, 나아가서는 작가 이승우가 본인의 삶을 투영한 액자소설의 형태로 디테일을 숨겨놓았다. 소설 속의 가상 인물인 작가 박부길을 면담하고, 그의 소설들을 분석하며 그의 생애의 파편들을 모아 짜맞추는 인터뷰어 ‘나’를 통해 작가 이승우는 은연중에 자신의 삶을 드러내려고 한다.


나는 그 소설이 지나치게 자기 노출적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그가 이 소설을 발표한 후 깊은 회한에 빠져 들었으리라는 짐작이 쉽게 갔다. 소설이 하나의 고백의 형식일 수 있음을 그 소설은 내게 알게 했다. 

<생의 이면>, 이승우


 이승우 작가는 <생의 이면>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드러내며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을까? 그 의문을 고뇌하던 과정에서 나는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없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간혹 작품을 평론하고자 강박적으로 메시지를 찾으려던 나에게 새 경험을 선사할 수도 있다고 느꼈다. 이승우 작가와 내 삶은 다르다. 그의 삶에 공감하기보다는 그의 삶의 자전적 성찰을 통해 내 삶을 논하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성찰할지 모른다.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굴절과 왜곡은 그의 선택과 배제이고 그의 굴절과 왜곡이다. [...] 사실의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굴절과 왜곡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의 진정한, 의미 있는, 말해질 필요가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사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굴절하고 왜곡하는 그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바로 그것을 읽는다.
  한 작가의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그 작가인 것이다.

낯익은 결말, <생의 이면>, 이승우


  이승우 작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의 단순한 열거를 경계하고,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화’를 창작했다. 신화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으로, 한 사람의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을 부추기며 탄생하고, 받들어진다. 그러니 <생의 이면>은 이승우 작가의 신화로, 그의 개인사의 부드러운 왜곡이 반영된 장편 이야기다.


  가공 없는 글쓰기는 ‘배설’에 불과할 뿐이라던 이정현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일기를 쓸 때 그날 그날 있었던 일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크게 유의미한 글쓰기가 있을까. 하루하루가 일관되고 기계적인 일상을 사는 사람이나, 할 일이 없어 무료한 사람은 그렇다면 일기를 적을 명분이 모자라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밤에 잠을 취했다, 라는 식의 형식적인 일기보다는 하루의 활동을 통해 어떤 유의미한 경험을 쌓았는지 논하는 일기가 질적으로 훨씬 뛰어나지 않은가.


  그 ‘유의미한 경험’을 발견해 글쓰기로 연계시키기 위해 고뇌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창작의 고통은 그래서 존재한다. 벼를 심고 쌀을 수확하는 결실을 맺는 과정이 고되듯이 유의미한 경험을 낳아 기록으로 풀어내기 위한 생각의 과정 또한 고통스럽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압축기에 스스로를 넣어 온몸이 바스러지는 고통을 겪는 한탸처럼 글쓰기, 창작의 고통을 체화시켜 내놓은 결과물이 곧 문학이고, 그 고통의 결실이 곧 문학의 가치다. 그리고 그 문학에는 작가의 디테일들이, 즉 작가 생의 이면이 압축되어 끼워져 있다.


  박부길의 인터뷰어가 그의 작품들을 그의 생애와 조합해가며 작가의 연보(年譜)를 적는 과정에서 작가 박부길이라는 인물이 완성된다. 작가 박부길의 소설들이 하나둘씩 인용되는 내용상의 구성을 보며 내 개인 블로그를 떠올렸다. 2012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10년 넘게 글을 써온 내 블로그에는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이 된 나에 이르기까지 내가 살아온 시간대의 ‘나’가 쓴 글들이 함축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나의 블로그는 나의 삶의 파편들로 이루어졌다. 나의 블로그는 곧 나의 삶을 닮는다. 내 블로그 ‘현재로’. 블로그에 적은 기록들로 말미암아 나의 신화가 쓰였다. 나의 글들이 지금의 나가 되었으며, 나(현재)를 완성시킨다. 즉, 블로그 속 나의 파편들은 “현재로” 귀결되었다.


  고작 내 이름으로 말장난이나 하려고 장문의 해설을 덧붙인 건 아니다. 단지 “한 작가의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그 작가인 것이다.”라는 말을 내 블로그에 적용해봤을 때, 작가 박부길의 연보와 블로그 ‘현재로’는 기능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게다가 박부길과 나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음에도 유년기의 고독함을 경험했다는 공통의 소재가 있어 그의 심리를 이해하기가 수월한 동시에 그에게 일어났지만 아직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을 반면교사 삼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나는 아주 간절하게 동지를 찾고 있었다. 그 욕망은, 모든 다른 욕망이 그러한 것처럼, 결핍에서 말미암은 욕망이었다. 결핍이 큰 만큼 욕망도 컸지만, 동시에 그만큼 두렵기도 한 욕망이었다. 큰 욕망은 큰 결핍, 욕망이 곧 결핍의 다른 쪽 얼굴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는 아무와도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귀지 못했다. 누구에게서도 동질성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특별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람들은 나와 너무나 특별하게 달랐다. 물론 사람들은 나를 향해 특별하다고 말했다. 특별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너다……. 그것이 이단자를 칭하는 그들의 어법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내가 특별하다면, 그들의 의도에 충실하자면, 그것은 특별하게 지진아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 판단의 빌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어울려 무슨 화제인가로 대화를 나누다가, 부길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대답을 못하거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서 반 아이들로부터 핀잔을 맞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지상의 양식, <생의 이면>, 이승우


  그러나 교복을 입으면 평범함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내 섣부른 착각이었다. 내 나이대 친구들은 방과후가 되면 무엇을 하는지,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는 무엇인지, 말은 어떻게 거는지까지 기본이고 상식이었다. 청소년기 나이라면 다들 습득하고 배웠을 ‘기본’은 난 배울 기회도 없이 박탈당했다. 때문에 고등학교 초기의 나는 그런 생활의 ‘기본’조차 결렬된, 소위 ‘눈치’가 없는 어딘가 모자란 그런 친구였다.

  내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나는 많은 아픔과 외로움을 감내해야 했다. 투병 생활이 끝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평범함에 젖어들지 못한 채 겉돌던 때가 잦았고 대인 관계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이 학교 공부보다도 어려웠다. 간혹 그 무게를 버티기가 버거워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결석을 여러 차례 한 적도 있다. 내 고등학교 생기부엔 ‘병결’로 기록된 항목이 사실은 신체적인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을 나타낸다는 걸 내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아마 모를 것이다.

<건강을 되찾고, 평범함을 갈구하며, 낭만을 뒤쫓던 때>, 김현재


  박부길이라는 인간이 겪은 일에는 내가 겪었던 과거, 겪고 있는 현재, 겪지 못한 미래의 일들이 심상적으로 겹치면서 소름 끼치는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1960년대 후반 무렵 학생 신분의 박부길이 체감했던 고독감은 거의 50년이 동떨어진 21세기 학생이 체감한 그것과 흡사하다. 사랑이란 감정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도 그의 인식은 아주 섬세하다. 때론 내가 느낀 것을 서술해주기도, 내가 겪지 않은 것을 조언해주기도 한다.


  1992년 초판이 발행되었다. 내가 태어나기 무려 8년이나 전에. ‘생’이란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되풀이되는 것일까? 내가 느낀 바들이, 내가 내 언어로 풀어썼어야 할 말들을 이승우의 <생의 이면>이 선수를 쳤다. 내가 느낀 바 또한 이승우 작가가 선수를 쳤다. 역사가 반복되듯, 전기(傳記)도 반복되는 것인가.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 사랑이라는 것이 상당한 노력과 의지를 필요로 하는 고도의 기술임을 끝끝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 그렇게밖에 사랑하지 못한, 그것이 나의 불행이었고, 나의 사랑의 예정된 비극이었다.

사랑의 어려움, 산문집 <행복한 마네킹> 57~58면, <생의 이면>, 이승우

나는 그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했다는 것을 몰랐다. […]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 안에 투영된 나, 그녀를 통해 메우고 채워질 나라는 걸 나는 몰랐다.
“그때, 한밤중에 부랑자처럼 쳐들어와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며 횡설수설할 때 내쫓아 버렸어야 하는 건데. 종단이 이년이 뭐에 눈이 씌웠던 건지……”
“우리는 언제나 좀 아슬아슬한 사이였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어.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부길이는 내게 중요한 남자였어. 그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아. 이 말만은 하고 싶었어.”
그녀는 떠났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생의 이면>, 이승우


  사랑을 한다고 느끼는 나는, 때로는 내 자신이 박부길처럼 “그녀를 통해 메우고 채워질 나”라는 점을 은연중에 감상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한다. 연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결핍까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기술. 그 기술을 연습하는 과정에 나는 있다. <생의 이면>이 그 이론이라면, 현실은 실습이다.


  과거의 기억들이 되돌릴 수 없는 실수로 매장되는 두려움. 이 공포감은 상상만 해도 그 절망감이 너무 무섭고 섬뜩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체념을 하고, 완전한 이별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이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과오의 대응으로 돌아오는 일방적인 통보는, 결코 적응할 수 없는 깨달음임을 <생의 이면>은 내게 상기시킨다.


  결론적으로 <생의 이면>이 나에게 가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역사가 되풀이되듯, 전기도 되풀이된다. 나는 이승우 작가가 풀어낸 작가 박부길의 심리가 비록 생애가 나와는 다를지라도 내가 느낀 것과 가깝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학교 도서관에 앉아 오후 7시 42분부터 시작해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장장 10시간 동안을 좁은 칸막이 책상에 앉아 읽어내렸다. 픽션 소셜을 읽는다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아닌 생의 진리를 탐구하듯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읽었다. 페이지마다 와닿는 디테일들을 밑줄 쳐가며, 인용구를 따로 노트에 한땀한땀 필기했다. 긴 시간 끝에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는 생에 대한 한편의 소설이 아닌 한편의 논문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고난을 자처하며 <생의 이면>을 읽은 데는 이런 심리가 주요하다. 이 사람의 뼈아픈 실패를 통한 반성과 후회를 내가 자진하며, 덜 아픈 방향으로 깨달음을 얻어가자.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건강하게 즐거움을 누리고, 사랑을 하고, 생을 살자. 과거의 이승우 작가가 작품에 수놓은 수많은 디테일은 20세기 중반에 학생이었던 사람이든 21세기 초반에 학생인 사람이든 두 생의 이면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납득시켰다. 이승우 작가가 실감한 그러한 사실들은, 작가의 말을 빌려 “아마도 두껍고 엷은 내 복잡한 심리 기제의 층들을 작살처럼 관통하고 있을, 결정적인 단 하나의 인상만을 기록”하는 데 밑바탕이 되며 작가 본인으로 귀결되는 동시에 그의 독자인 지금의 나로도 귀결되었다. 과거에 이미 이승우 작가가 발견한 ‘생의 이면’은 현재에도 진리로 통하는 하나의 신화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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