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잠자』의 알레고리를 통해
세상에 눈을 처음으로 뜬 새로운 생명들은 각자의 인사말로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린다. 새들은 지저귀고, 강아지는 낑낑거리고, 신생아는 응애응애. 모두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 투성이다. “새들을 조심해요.” 잠자의 학습을 기다리고 있는 세계에게, 인간이 된 잠자는 생뚱맞은 인사말을 건넨다.
그레고리 잠자는 인간이라 볼 수 없다. 인간의 형태를 띄고는 있지만 인간 사회에 대해 무지하고, 행동양식이 전무하며 마주친 첫 인간에게 건네는 인사가 “새들을 조심해요.” 마치 바퀴벌레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동료 벌레에게 건넬 법한 인사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인간의 그것을 가지고 있다. 배우고자 하는 학습성이, 더욱 원초적으로는 사랑을 나누고픈 욕망이.
자물쇠를 고치러 자택을 방문한 꼽추 여자를 만난 잠자는 무언가 알지 못한 감정을 학습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아랫도리가 불룩해지는 것 또한 깨닫는다. 그리고는 그가 꼽추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과, 그녀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같이 이야기할 것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를 통해 세계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인간은 그런 감정이 들면 대개 ‘사랑’이라는 정의를 내리곤 한다.
왜 사랑을 할까? 다른 형태로 질문하자면, 사랑은 왜 생기는가? 사랑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할 수밖에 없게 설계됐는가? 사랑이 무엇인가.
우리가 사랑을 하는 이유에서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 없다. 철학자들의 이론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잔치(Symposium)』을 통해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반쪽을 채우기 위해 사랑한다고 주장했으며, 독일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사랑이란 번식을 위해 성욕에 기반한 관능적인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고독으로부터의 도피, 물리적 및 실리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 사랑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너무 부정적이고, 원초적인 상태의 잠자가 그와 같은 복잡한 이유로 꼽추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말하기에는 어불성설이다. 잠자가 확실하게 느낀 것은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다. “단지 나와 당신이 이야기해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탱크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브래지어에 대해서, 자물쇠에 대해서.” 배움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논하기 전에, 『사랑하는 잠자』에서는 잠자가 세계에 대해 새로이 학습하는 단어들 중에 탱크, 신, 브래지어, 그리고 자물쇠가 등장한다. 잠자의 호기심에 맞춘 이들 모두 사랑의 법칙과 밀접히 연관되어 설명할 수 있다.
자물쇠공 가족의 꼽추 여자는 시내에 총을 든 병사들, 진을 친 탱크들, 길거리에 세워진 검문소들을 지나쳐 잠자의 저택으로 온다. 시민들이 소리소문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규율의 시대. 그곳에서 꼽추 여자는 무력의 눈을 피해 잠자 앞으로 다가왔고, 한 사람에게 사랑을 싹피웠다. 다시 귀가할 채비를 할 때 잠자는 그녀에게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그러나 누군가를 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꼽추 여자는 답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잃어버린 세대를 극복해 미국은 후세대를 양성했고, 일제 강점기에도 한국의 정신은 생존했으며, 전쟁통에도 남녀는 눈을 맞아 아이를 낳았다. 탱크가 행사하는 폭력과 규율, 무력으로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도 사랑은 살아남아 어떻게든 길을 찾는다. 사랑의 제1법칙이다.
“고추가 그렇게 단단하게 커지는 건 퍽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별개다. 그저 심장 탓이다. 당신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예요? 신께 맹세해요?”
꼽추 여자는 보기 숭하게 불룩 튀어나온 잠자의 아랫도리를 보며 따지듯 묻는다. ‘신’, 잠자가 이 세계에 대해 학습한 두 번째 단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전승된 종교와 윤리라는 공동체적인 개념에 기반하여 행동한다. 신에 대한 믿음 또한 전승된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 없는 잠자가 ‘신’의 개념에 대해 알 리가 만무한 건, 교미라는 행위(퍽)에 대해 알 리가 만무한 것과 동일하다. 그래서 신께 맹세하냐는 꼽추 여자의 물음에 잠자는 답할 수가 없어 침묵을 지킨다. 그의 생리적 현상은 종교와 윤리 이전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어느 감정과 관련되어 발생한 일이다. 사랑의 두 번째 법칙이다. 종교와 윤리 이전에, 사랑은 이미 존재한다.
“그가 아는 건 자신의 마음이 다시 한번 그 꼽추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뿐이었다. 무척 만나고 싶다. 둘이 마주앉아 실컷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둘이서 조금씩 이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고 싶다. 그녀가 굽실굽실 입체적으로 몸을 뒤틀며 브래지어를 바로잡는 동작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싶다. 그 피부의 감촉을, 온기를 손끝으로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온 세상의 여러 계단을 둘이서 나란히 오르내리고 싶다.”
잠자는 브래지어라는 사물의 목적을 추측만 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를 사랑과 연관지어 체감한다. 그녀가 매력 없는 몸뚱아리를 지녔음에도 어찌됐건 잠자는 그녀의 몸을 만지며 그녀와 함께 세상에 대해 이것저것을 학습하고 싶어한다. 통상적으로 남성은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미인을 사랑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통상적이지 않은 사람들 또한 사람들이다. 누구는 몸매에 연연하지 않고, 누구는 동성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사랑하는 사람과 몸을 부둥키며 자유롭게 세상을 만나길 원한다. 사랑의 제3법칙, 성(에로스)은 사랑을 배우는 데 필수적이다.
“이상한 일이죠. 세계 자체가 이렇게 무너져가는 판에 고장난 자물쇠 같은 걸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잠자가 갇혔던 방에는 고장난 자물쇠가 걸려 있다. 자물쇠가 고장나지 않았다면 잠자는 방 밖으로 나와 자택을 돌아다니며 현관문을 열어 꼽추 여자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세계를 학습하는 데 있어 자물쇠의 파손, 즉 금기의 해체가 필요했다. 잠자의 가족은 왜 자물쇠로 잠자를 가뒀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잠자를 병사들과 탱크가 돌아다니는 위험한 바깥 세계에 노출시키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학습을 방해하는 그러한 금기들은 현실 사회에도 만연하다. 술과 담배는 미성년에게 금지되었고, 극단적으로는 성인이 된 자녀까지 유흥을 금지하는 부모도 존재한다. 야동과 같은 음란물도 한국의 경우에는 성인까지 시청할 수 없게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온갖 이상한 위험들이 도사리는 세계로부터 “순수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 장치지만, 동시의 세계의 학습을 막는 금기로 작용한다. 술을 마시지 못한 사람은 훗날 사회에 나가면 필연적으로 있을 회식 자리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성인까지 성적인 욕망을 억눌린 사람은 연인과 건전한 사랑을 나누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너져가는 세계는 위험하지만, 그러한 세계를 학습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금기는 더더욱 위험하다. 위험에 맞닥뜨려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할지라도, 그게 곧 배움의 과정이다. 사랑의 제4법칙. 사랑을 배우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학습해야 할 것이 많은 잠자는 아직 원초적이며, 그에게는 우리 인간이 ‘사랑’이라 정의하는 감정에 기반해 세계를 배우고자 한다. 즉, 배움에는 사랑이 기반한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을 빌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와 합쳐지고자 하는 열망, 그 과정 속에서의 학습을 통해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실의 건강한 연인들은 서로를 지지해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자아를 초월하게 하며 자신의 삶과 나아가 이 세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지만, 사랑은 일희일비를 반복하며 세계를 배우는 일에는 틀림없다. 그 과정을 헤쳐나가는 우리는 자신을 잃을 수도, 찾을 수도, 가슴 아파할 수도, 행복해할 수도 있다. 잠자가 맞이한 인간 세상처럼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지만, 사랑의 진실을 깨우치려면 그 배움을 우선 찾아 나설 수밖에. 꼽추 여자를 떠나보내지만, 그녀를 생각하고 떠올리자 생기를 얻는 잠자는 학습에 대한 활력이 솟아난다. 그의 학습을 기다리고 있는 세계 앞에는 열린 결말이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