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ft.com)
얼마 전 생일 선물로 스누피 인형을 받았다.
만화와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고, 별다른 캐릭터 상품 수집벽도 없는 나이건만 어째 스누피한테 만큼은 자동 무장 해제. 심형탁에게 있어 도라에몽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꺾은 칠순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스누피에게 절로 눈이 쏠리고 지갑이 열려왔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아아, 나는 어찌 매번 이리 쉽사리 스누피에게 마음이 흔들린단 말인가? 한 번쯤 곰곰이 반추해 보고픈 사안인지라 마침내 집중 탐구에 나섰다.
스누피는 단언컨대, 진정한 르네상스형 견공이다.
비행기 조종에 서핑은 물론이요, 수준급 실력을 갖춘 기타 연주자이기도 하다. 미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친구들 초상화도 곧잘 그려주고, 집 안을 고흐 그림으로 고혹적으로 장식해 놓을 줄도 안다. 심지어 마술쇼도 종종 열 만큼 잡기에 능하기까지 하다. 어디 그뿐이랴. 추수감사절 날이면 칠면조 한 마리 노릇노릇 찰지게 구워 친구들에게 대접할 줄도 아는 베풂형 요리 천재가 바로 스누피올시다. 요컨대, 오늘날 이 사회가 요구하는 통섭형 견재인 것이다.
스누피의 다재다능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알고 보면 그는 주택 개조의 귀재! 평소에는 폐소 공포증 때문에 지붕 위에서 잠을 청하지만, 빨간 개집 안을 슬쩍 들여다보면 빽빽한 책꽂이로 둘러싸인 번듯한 서재와 당구대쯤은 우습게 들어가는 넉넉한 크기의 거실, 심지어 비밀 실험실까지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노후 주택을 수익형 부동산으로 환골탈태시키는 투자의 귀재이자 은둔형 과학자이기도 했던 것.
곰돌이 푸우와 피글렛 이후 최고의 콤비를 자랑하는 우드스탁(Woodstock)과의 찰떡궁합도 관전 포인트. 어젯밤 유튜브에서 본 에피소드에선 스누피가 정원용품샵에서 우드스탁에게 선물할 새집을 멋지게 현금 결제하는 장면이 나왔다. 죽마고우를 위해서라면 그깟 집 한 채쯤은 가볍게 쏴주시는 이 엄청난 배포! 와아... 졌다 졌어. 돈보다 우정을 귀히 여길 줄도 아는 너란 견공, 스누피.
흠, 좀 멋지다.
요모조모 톺아보니 스누피는 나의 롤모델이자,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다재다능한 만물박사이자 예술 애호가, 만능 스포츠맨인 그의 넘치는 매력은 물론이요, 언제나 친구들에게 쿨하게 헌신적인 그의 휴머니스트적인 면모 또한 내 마음에 아로새겨졌나 보다. 바탕이 선하지만 소심한 찰리 브라운의 연애 사업을 늘 앞장서서 돕는 스누피의 따스한 의리는 그래서 더 찡하게 다가온다. 나만 아는 이기적인 천재가 아니라 감성 지수까지 높은 지덕체(智德體)를 두루 갖춘 견공이기에.
올해 처음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니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훑고 말았던 스누피의 고군분투 집필담마저도 새롭게 읽힌다. 번번이 출판사 측으로부터 퇴짜를 맞으면서도 끝내 집필 의지를 꺾지 않는 그 불굴의 정신력에서 용기를 얻었는지도? 편집자가 어제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은 까닭은 단지 몸이 안 좋아서였을 것이라고 넘겨짚는 스누피의 끝없는 긍정의 힘까지도 모조리 닮고 싶어 진다.
스누피 애호가로서 언젠가 가보고픈 성지가 두어 곳이 있다.
먼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로사 시에 위치한 찰스 엠 슐츠 박물관(Charles M. Schulz Museum).
실제 스누피의 모티브가 된 비글종 강아지를 키웠던 슐츠는 1950년부터 무려 50년간 신문에 '피너츠(Peanuts)' 만화를 연재했다. 그가 작고한 후 2년 뒤인 2002년에 세워진 이 박물관에는 피너츠 만화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함께 생전 그의 작업실 모습을 재연해 놓는 등 스누피 팬이라면 반드시 마음에 담고픈 보물 같은 소장품들로 가득하다.
박물관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더없이 인자하고 따뜻한 모습의 슐츠 할아버지가 반겨주시는데, 본인의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투영해 탄생시킨 찰리 브라운의 캐릭터가 오버랩되어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슐츠 박물관에는 다양한 행사가 마련되어 있다. '찰리 브라운의 첫사랑, 빨간 머리 소녀에 얽힌 이야기', '사랑, 평화 그리고 우드스탁(Woodstock)' 등 테마별 기획전은 물론이요, 금요일 밤 피너츠 영화의 날, 박물관 내 캠핑, 심지어 생일파티까지도 기획해 준다. 사랑해 마지않는 스누피와 피너츠 친구들에 둘러싸인 생일이라니! 오랜 스누피 팬으로서 이렇게 내 환갑잔치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추가해 본다.
슐츠 박물관은 세계 순회 전시회도 종종 개최하고 있다. 그동안 일본, 캐나다 등에서 다양한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작년 3월부터 9월까지 롯폰기의 도쿄 스누피 박물관에서 개최된 전시를 놓친 것이 두고두고 애석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더없이 반가운 소식! 올 가을 일본 도쿄도 마치다시에서 다시금 순회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니 미리미리 저가 항공권을 알아볼 일. 갑자기 두근두근 심장이 용솟음친다.
또 한 곳은 작년 8월 일본 고베시에 개장한 따끈따끈한 신상 피너츠 호텔 (Peanuts Hotel).
일본은 워낙 스누피 팬들의 집결지로 알려져 있어 어쩌면 스누피와 피너츠 친구들을 테마로 한 호텔이 이 곳에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기념품에 대한 물욕을 제법 굳세게 자제하는 나조차도 일본에만 다녀오면 봉투 한가득 스누피 용품을 담아오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3개 층 18개의 객실로 구성된 피너츠 호텔은 각 방의 테마를 피너츠 만화의 주제인 '행복', '사랑', '상상' 등에 맞춰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호텔 로비와 레스토랑은 구석구석 스누피 용품으로 세심하게 꾸며놓아서 스누피 팬들에게는 천국에서의 하룻밤 같은 추억이 될 듯하다. 1층에 위치한 피너츠 카페에서는 문구류와 에코백 등 다양한 스누피 굿즈를 판매한다고 하니 예산을 넉넉히 책정해 갈 일이다.
내가 묵고 싶은 객실은 스누피와 피너츠 친구들로 교토 료안지의 모래 정원 같은 장식을 해놓은 방. 더없이 일본적인 색채도 함께 느낄 수 있어 고베에서의 행복한 하룻밤을 더 오래오래 추억할 수 있을 듯하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행복이 그리운 날이면, 다시금 스누피를 떠올린다. 나의 영원한 뮤즈여, 곧 보러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