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여행법 #1]
어느 날 훌쩍 익숙한 일상을 떠나 마치 전생을 떠나온 듯 낯선 터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는 이들이 있다.
한 달, 두 달, 길게는 일 년까지 스스로에게 허락한 시간은 다양하지만 대개 '한달살기'라는 이름 아래 자신에게 이방인의 호기심 어린 반짝이는 눈망울을 되찾아주는 시간. 영구적인 떠남이 아니라 돌아올 기한이 확실하기에 이민자가 가진 영원한 아웃사이더 같은 외로움보다는 여행자의 달뜬 설렘이 더 강한 선물 같은 기간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금 시간 부자가 되었을 때 한달살기처로 낙점한 곳은 어느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바로 끝없이 부유하는 크루즈선이었다. 처음 크루즈 여행을 시작한 것은 11년 전. 이 분야에 대해 문외한이던 나에게 크루즈 여행의 이미지는 돈도 시간도 넉넉한 부자들이 은퇴 후에 즐기는 호화로운 여유의 표상 같은 것이었다. 여우의 신포도 같고 남의 떡 같기만 한 그저 부러운 여행.
찬찬히 들여다보면 대학생 때 온갖 생고생을 다하고 다니는 배낭여행보다도 어쩌면 가성비가 더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 내가 고3이던 시절에도 배낭 하나 짊어지고 인도로 홀연히 떠나실 만큼 자유롭고 용감한 영혼을 지닌 나의 엄마. 칠순을 넘기신 연세에도 여전히 늦가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몽골 사막 게르에서의 별똥별 헤는 밤에 도전하는 우리 엄마. 그런 진취적인 멘토에게 처음 접한 신세계로의 탐험은 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지금까지도 시간과 잔고가 허락할 때면 종종 이어지고 있다.
크루즈 여행의 숨은 매력 중 하나는 원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넋 놓고 멍하니 지낼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다음 기항지까지 향하는 며칠 동안 배 안에서는 창 밖에 넘실대는 짙푸른 파도를 보며 말없이 내 안으로 침잠할 여유가 주어진다. 때문에 크루즈 여행 일정을 정할 때 일부러 기항지 간의 이동 기간인 해상일(At Sea Day)이 많은 프로그램을 선택하기도 한다.
배 안에서는 종종 작심삼일로 끝나곤 하는 일기도 술술 써지고, 보고픈 이들에게 여행지에서 골라 온 엽서도 손글씨로 꾹꾹 눌러쓰게 되니, 어쩐지 한결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돌아간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냥 화려하고 향락적일 것만 같은 크루즈 여행이지만, 의외로 느린 삶과 내면으로의 여행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도 권할만한 여행법이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잔잔한 수평선이 아닌 사방이 진청색으로 물든 망망대해의 적막함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자고 일어나니 비췻빛으로 곱고 투명하게 펼쳐진 항구가 눈 앞에 펼쳐지길 원한다면,
처음 보는 이들과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단내 짠내 다 털어놓는 찐득한 사이로 남아보고 싶다면,
망설임 없이,
크루즈 한달살기 시작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