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여행법 #2]
한동안 장기 여행을 떠난다 하면 열에 일곱은 크루즈 여행이기 십상이어서 주변에서 한결같이 던지는 질문이 있었다.
대체 크루즈 여행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처음엔, 나도 잘 몰랐다.
어째서 첫 크루즈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당연한 듯 다음 장기 유랑은 또다시 크루즈 여행이어야 했는지를.
하지만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픈 마음이 들 때마다 지난 크루즈 여행만의 매력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이후 2주, 3주, 40일까지 점차 크루즈 여행기간을 늘려가게 되었으며, 지금은 크루즈로 하는 세계일주를 꿈꾸며 짬짬이 구간 종주 여행도 즐기고 있다.
자유여행이든 패키지여행이든 한꺼번에 여러 도시를 여행하는 일정의 최대 난제는 바로 내 몸만 한 배낭이나 캐리어를 끌고 숙소 사이를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아닐까? 하루 종일 여행지를 돌아다니고 와서는 그저 눕고만 싶은데, 야밤에 짐을 싸서 다음 날 새로운 숙소에 도착해 처음부터 다시 짐을 풀러야 하는 현실. 이 끝없는 고생의 뫼비우스 띠를 경험하다 보면 짐 정리를 딱 한 번만 해도 되는 크루즈 여행의 간편함에 탄복하게 된다.
아늑한 선실에서 실컷 자고 아침을 먹으러 조식당으로 향하면 큼지막한 통창 밖으로 어제와는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점 또한 크루즈 여행의 묘미. 좁은 기차 칸이나 비행기 좌석에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이동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던 기존의 여행법과는 차원이 다른 안락함이 기다리고 있다. 더불어, 평소에 육로로 가기 어려운 작은 항구 도시에 쉽게 다다를 수 있는 비법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크루즈 여행을 망설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행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쌀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 크루즈 여행비는 언뜻 고가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책정가에 숙박비, 식비, 문화생활비, 레포츠비, 일부 교통비 등이 상당 부분 포함된 가격이라 따져볼수록 합리적이다.
또한, 대다수의 크루즈는 조기 예약이나 출항 마감 임박 시 80%에 이르는 할인율로 여행 프로그램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세일가만 잘 찾아도 배낭여행에 버금가는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인천, 부산, 제주 등 우리나라 항구를 기항지로 포함한 크루즈 라인도 점차 늘어나고 있고, 가까운 일본 도쿄나 중국 상하이를 출항지로 삼으면 최소한의 항공료로 뉴욕, 밴쿠버, 시드니, 런던, 두바이 등을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크루즈선 내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카지노와 공연장, 온수풀 외에 상상도 못 한 다양한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다. 그동안 내가 승선한 크루즈선들에는 이런 기본 시설은 물론 옥외 서핑장과 골프장, 암벽 등반장에 심지어 실내 스케이트장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기항지 관광을 마치고 배로 돌아와서도 즐겁게 분주한 하루가 이어졌다.
흔히 크루즈 여행 프로그램을 정할 때 기항지 간의 이동 기간인 해상일(At Sea Day)이 적은 일정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행 목적과 크루즈선 별 부대시설에 따라 오히려 해상일이 많은 일정을 선택해 배 안에서 편안하게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기는 방법도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이런 일정일수록 크루즈 여행단가가 대체로 더 저렴하기 때문에 선 내에서 한달살기 등 장기 체류 여행을 꿈꾸거나, 바쁜 관광 일정을 줄이고 안락한 배 안에서 힐링을 하고 싶은 분들에게 권할만하다.
혼자 여행을 떠나도 유랑 중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고 싶거나,
친구끼리 함께 가도 '따로 또 같이' 일정으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거나,
한 번쯤 여행지에서 영화 <비포 선라이즈> 같은 로맨스를 꿈꿔왔던 이들이라면,
크루즈 여행을 주목하라!
숙소를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자유여행과는 달리 크루즈 여행은 기항지는 바뀌어도 선상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같은 일정 내에서는 동일하다. 때문에 아침 요가 시간이나 저녁 살사춤 강좌 때 안면을 튼 이들과 배 안에서 오며 가며 친해지고, 기항지에 내려 함께 시내 관광을 하다 보면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보통의 여행 일정이라면 그저 스쳐 지나갈 찰나의 인연도, 마주치는 빈도가 높은 크루즈 안에서는 종종 여행 후에도 연락을 지속하고 서로의 사는 곳을 방문하기도 하는 오랜 친구로도 남게 된다.
크루즈 안에서는 여행 중 각종 문화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저녁마다 다양한 분야의 스펙터클한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고, 영화관에서는 고전 명작이나 최신영화 상영과 함께 갓 튀긴 팝콘을 종이봉지에 담아 나눠주기도 한다. 공예시간에는 테이블 냅킨 접기, 책 커버 만들기 등을 곰손이라도 쉽게 배울 수 있고, 특화된 강좌 시간에는 기항지 정보는 물론 천체 관측, 앤티크 감상법, 동아프리카의 국제 정세 등 실로 다채롭고도 전문성 있는 강의를 수강할 수도 있다. 종교 시설과 결혼식장까지 갖춘 크루즈선도 있어서 크루즈 내에서 접할 수 있는 문화 다양성의 범위는 실로 방대하다.
중남미나 중동, 아프리카와 같이 비교적 여행 난이도나 위험도가 높은 지역의 경우 맛보기 여행으로 크루즈 여행을 추천한다. 원할 경우 크루즈에서 제공하는 공식 투어에 참가할 수도 있고, 같은 크루즈 탑승객이라 신원이 어느 정도 보장된 이들과 그룹을 지어 자유 관광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 기항지에서 보통 사흘 이상 머물지 않고, 숙박은 크루즈로 돌아와서 하며 여행의 특성상 현지에서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적다. 아울러, 유사시 크루즈 담당자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비상연락망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어 만에 하나 아는 이 하나 없는 막막한 여행지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대처하기가 쉽다.
장기간 여행을 하다 보면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하루쯤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자유여행의 경우 숙소에 남아 쉬는 방법이 있지만, 몸이 아파서 밥을 챙겨 먹을 기운조차 없거나 현지에서 약국이나 병원을 찾아야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을 경우 막막할 수가 있다. 크루즈 안에는 의료진이 함께 탑승하고 있어 위급 시 배 안에서 급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별도 비용 없이 선실로 룸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서 끼니를 챙겨 먹으러 나서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또한, 크루즈 내에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어, 심심하지만 아직 관광을 다닐 체력은 회복하지 못했을 때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