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여행법 #3]
그녀의 이름은, 카멜라.
캐나다 앨버타주 출신.
일찍이 일군 탄탄한 커리어와 안정적인 수입을 잠시 접어두고 시작한 지구촌 유랑을 10년째 이어가고 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왜 사서 고생을?"이라 묻는 이들에게 그녀는 답한다.
사무실 칸막이에 갇혀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편이 훨씬 견디기 힘겨웠노라고.
모두가 그녀처럼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나를 부르는 일터가 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에 모두가 이런 일상을 불행하다 여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수가 택한 쭉 뻗은 고속도로를 거부하고 나만의 거친 오솔길을 새롭게 밟아 나아가는 이들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래의 어느 행복할 날을 위해 오늘의 나를 담보로 잡는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내 일상을 갉아먹는 느낌인지를 나 또한 잘 알기 때문이다.
카멜라를 알게 된 건 오만의 살랄라(Salalah) 항구. 15분 거리의 시내까지 무조건 80불이라는 택시비 폭리 정책에 모두들 웅성거리던 순간이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순순히 택시에 오르는 사람들 틈에서 열띠게 흥정을 하고 있는 화려한 터키석 색 민속의상의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모험을 해보지 않겠냐는 그녀의 제안에 이끌려 '설마 이런 곳까지 택시가?' 싶은 곳을 향해 몇 분간 뙤약볕 아래를 걸으니 거짓말처럼 모퉁이를 돌아 택시가 서 있었다. 그리고 짧은 실랑이 끝에 택시비를 일인당 5불까지 깎을 수 있었다.
흥정의 귀재인 그녀의 꿀팁 한 조각.
내가 부르는 값이 이 세상의 유일한 값이라고 스스로 믿고 흥정하면
결국은 그 값을 받게 되어 있다고!
알고 보니 그녀 역시 나처럼 이집트 사파가(Safaga)에서 같은 크루즈선에 탑승했더랬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더니 인도 뭄바이(Mumbai)에서 내려 푸네(Pune)로 가서 반년 간 살아보려 한다 했다. "가서 뭐할 건데?"라고 물으니 아직 정한 건 하나도 없지만 말 그대로 그냥 한 번 살아본단다. 그런 무계획에 걱정스러운 마음보다는 가슴 뛰는 전율이 앞선 걸 보면 그녀의 가뿐한 마음가짐과 용감한 시도가 그저 부러웠던가 보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그녀가 지킨 철칙 한 가지는 바로 일기 쓰기이다. 풀타임 유목민의 삶은 어떤가 싶어 살며시 그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았다. 빨간 사과가 그려있는 분홍색 노트가 씩씩한 그녀 답지 않게 앙증맞아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알고 보면 누구에게나 말랑말랑한 구석이란 있는 법이니까.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내려 간 10년간의 기록.
머나먼 타지의 길 위에서 그녀는 그동안 무엇을 느껴왔던 걸까?
그리고 무엇이 아직도 그녀를 이 길 위에 붙잡아두는 걸까?
손으로 꾹꾹 눌러쓴 일기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자신의 여행 블로그에 올려놓기도 한단다. 뜻밖에 중동의 어딘가에서 자신을 알아본 현지인을 만난 이후로 더 이상 자신의 여행기가 독백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한다.
여행담을 출판하자는 제의도 벌써 3개국에서 받았고, 크루즈선의 요청으로 선상에서 여행일지 작성법을 가르치게 되었다고도 했다. 그저 틀에 박힌 사무실 생활이 답답하여 유랑하기 시작했을 뿐인데, 10년이란 세월이 주는 경험이 쌓이다 보니 어느덧 자신이 여행 작가로 또 강사로 새롭게 커가고 있다고 들뜬 듯이 말했다.
인생이란 이래서 참 살아볼 만한 것이다. 불안정한 삶을 추구한 결과가 반드시 비극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니까. 예측 불허한 선택이 선사하는 즐거움이란 뜻밖이어서 더 놀라운 것이 아닐까?
내 마음속에 여전히 카멜라의 이미지로 남아 있는 모습은 바로 그녀의 단출한 짐가방이다.
반년이나 인도에 눌러살 거라면서 준비한 짐이라곤 고작 이 작은 배낭 하나가 전부라니!
지퍼락 봉투에 속옷을 잔뜩 말아 넣곤 엉덩이로 깔고 앉아 진공상태로 만드는 본새가 과연 한 두 해 쌓인 유랑 내공이 아닌 듯했다. 그 흔한 노트북도 없이 휴대폰과 둘둘 말리는 휴대용 키보드로 홈피에 일기를 올린다고도 했다.
노마드로 살아가려면 단출함이 생명이야.
배낭도 비우고, 마음도 비우고.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란 결국 하나씩 비워내는 작업에 다름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비워내야 또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채울 자리도 생기는 법이니까.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긴 금과옥조 한 마디.
지금도 일상이 버거울 때면 이 한 마디가 마음에 파도를 일렁인다.
네 삶에서 'should'를 버려봐!
뭔가를 해야 한다는 무거움을 내려놓고 나면
사는 게 훨씬 재밌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