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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일루아의 고양이 Jan 18. 2019

이 남자의 삶

[유목민의 여행법 #4] 크루즈에서 만난 벼락같은 인연


신변 보호를 위해 그를 그저 "L"이라 칭하자.  


"L"은 현직 보안요원이자 영국 해병특공대 코만도 및 경찰 특수수사대 출신.

190cm가 넘는 큰 키에 떡 벌어진 우람한 체격의 그에게서는 존재 자체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탑승하고도 한참 후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집트에서 출항한 이번 크루즈는 소말리아 해적 출몰지로 악명 높은 아덴만을 통과하는 일정이었다. 어쩐지 유독 이 구간의 크루즈 할인율만 80%도 넘더라니... 뉴스를 통해서만 접하던 소말리아 해적들의 살기등등한 눈매가 떠올라 내심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식사 때 한 테이블에 모이면 다음 기항지에 대한 정보를 나누던 승객들이건만 크루즈선이 아덴만 쪽에 가까워질수록 어느샌가 온통 해적 이야기뿐이었다. 처음에는 여행 중에 겪는 신나는 모험담쯤으로 치부하던 이들조차도 해적 도발의 공포가 현실화되어가자 점차 긴장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해적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크루즈선사에서 운항 이래 처음으로 해양 특수 보안요원 3명을 선 내에 투입했다고 들었다. 희끗한 은발의 작전사령관풍 요원 한 명, 작지만 탄탄한 체구의 눈매가 깊은 흑인 요원 한 명, 그리고 그리즐리 곰 같은 압도적인 체구의 "L". 뭔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신뢰감 가는 구성의 정예부대가 언젠가부터 모두의 눈에 띄기 시작했고, 두려움에 찬 승객들이 삼삼오오 그들을 둘러싼 채 질문 세례를 퍼붓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드디어 에리트리아를 지나 아덴만을 통과하기 하루 전날.

해적 공격을 막기 위해 모든 선실의 철제 창문 덮개를 닫으라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고, 급기야 밤 10시 이후에는 옥외 데크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도 각 방에 배포되었다. 통상적인 대피 훈련이 아닌 해적 출몰 시에만 시행한다는 '코드 퍼플(Code Purple)' 훈련도 급히 편성되었다. '이러다 정말 피랍되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감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기에 모두들 밤늦도록 잠을 못 이루며 배가 무사히 아덴만을 빠져나가기만을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몰래 크루즈선에 잠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철조망

                        

다음날 아침, 우리는 한 명도 빠짐없이 무사했다!


조식 뷔페 줄을 서다가도, 수영장에서 수건을 받아가면서도 승객들은 하나같이 해적 무용담으로 들떠있었다. 모두가 뒤척이다 깊은 잠에 빠진 사이 실제로 해적선이 접근해왔었고, 해상 특수보안팀이 물대포로 이들을 물리친 덕분에 무사히 아덴만을 빠져나왔다는 전언이 어느새 배 안에 쫙 퍼졌다. 사실 우리야 밤새 불안해하며 뒤척인 것 밖에는 한 일이 없지만, 공통의 적을 물리친 유대감 때문일까? 다들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음악 소리가, 웃는 소리가, 무엇보다 살아있는 활기가 배 안을 감쌌다.


아덴만을 벗어나 오만을 거쳐 인도 뭄바이에 정박한 무렵, 하루 종일 덮어썼던 매캐한 릭샤 매연을 떨치려 느긋하게 옥외 온수풀에서 늘어져있던 나에게 어디선가 "L"이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걸었다. 해적과의 교전이 무사히 끝난 안도감 때문일까, 늘 꼿꼿한 자세와 매서운 눈초리로 바다를 응시하던 그도 긴장이 한층 풀어진 듯했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 속에 신기하게도 코드가 맞았던 우리는 그날부터 어울리지 않게 크루즈선 내 베프가 되었다.


그의 안내로 크루즈 조정실 탐방도 해보고 레이저총 사용법과 항로 변경법도 속성으로 익히며 크루즈 여행의 추억을 또 하나 아로새기게 되었다. 오랜 기간 한 배에 머물다 보니 오며 가며 서서히 상대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고 또 몇 마디 대화에 서로의 내면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런 묘미가 있어 크루즈 앓이가 내내 이어지는지 모른다.



"L"이 특수부대 요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8살 때였다고 했다. 군인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삶을 동경하여 16세에 자원입대를 했고, 이후 이십여 년 간 영국 최고의 특수부대 요원으로 또 경찰 특수수사대 소속으로 살아왔단다. 경찰의 길을 접고 해양 특수 보안요원으로 전직한 지는 이제 갓 4개월째. 경찰 시절 미국과의 공조 수사로 국제 마약거래조직 소탕을 위해 중남미 지역에 파견되기도 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 국내에만 머물며 일하는 단조로운 생활방식이 지겨워져서 예전처럼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할 수 있는 해양 특수 보안요원이 되었다고 했다.


벨리즈의 정글과 노르웨이의 빙벽을 두루 누비며 죽음의 공포가 매일의 일상을 드리우는 그에게,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죄책감은 내 삶의 일부야.
동료들은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는 그 느낌...
세상의 어두운 면을 너무 많이 보아 버린 난
이제 신을 믿지 않아.

인생은 너무도 짧고 한 치 앞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주어진 순간순간을 최대한 누리며 살아가려 해.
뒤돌아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그럴 시간조차 너무 아깝잖아?


온몸으로 직접 삶의 극한을 경험하며 살아온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간접 경험으로는 얻을 수 없는 '진짜'의 느낌이 강했다. 날것의 생생한 비린 내음 같은 그 강렬한 느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신을 부정하는 그에게서 되려 어딘지 모르게 종교적인 아우라마저 느껴졌다.


이제 곧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그에게, 삶이 몰캉몰캉한 구석을 좀 많이 내비쳐주길 온 마음을 담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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