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퐁유엔 밀크티와 잉글리시 국밥

수상한 메뉴와 민주화 시위대를 만난 날

by 시현

1.

붉은 국물엔 소세지, 토마토, 마카로니, 베이크드 빈즈가 둥둥 떠있었다. 써니 사이드 업도, 포치드 에그도 아닌 정겨운 계란 후라이도 함께. 말 그대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의 국밥 버전이었다. 부대찌개 뺨치는 동서양의 조화를 한 그릇에 구현한 느낌이랄까.



남자친구의 표정을 살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포크 대신 숟가락을 들고, 그는 한 숟갈씩 국밥을 퍼먹었다. 어떤지 묻자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물에 만 맛이야.”라고 했다. 그렇게 성의 없는 묘사가 어딨냐며 나도 한입 먹었는데,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2019년 어느 화창한 가을날, 아침을 먹으러 들른 이곳은 소호에 위치한 란퐁유엔. 음료와 간단한 식사를 함께 파는 차찬텡으로, 1951년에 문을 열었다. 역사가 길고 워낙 유명하다 보니 수십 년 단골과 관광객이 뒤섞이는 곳이다.

홍콩엔 세번째 방문이었지만, 말로만 듣던 란퐁유엔을 찾은 건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란퐁유엔 토스트와 홍콩식 밀크티를 골랐다. 원래 밀크티와 프렌치 토스트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대표 메뉴를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메뉴판을 이리저리 넘기던 남자친구는 놀라는 소리를 냈다. 어느 페이지 구석에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빨간 국물에 말아 놓은 사진이 있었다. 대학 시절 영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남친은 맛없는 음식에 상당한 면역이 있다. 딱 봐도 개밥 같은 비주얼이었지만, 그는 호기롭게 도전을 외쳤다.



먼저 나온 따끈따끈한 토스트를 나눠 먹기 좋게 잘랐다. 란퐁유엔 토스트는 기름을 듬뿍 두른 팬에 튀기듯 굽는 데다 연유와 카야잼을 아낌없이 쓰는 덕에 프렌치 토스트보다 달달하다. 느끼하고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반면 남친은 한 조각 맛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함께 나온 밀크티는 부드럽고 진하면서도 적당히 달착지근했다. 홍콩식 밀크티는 가는 실로 짠 면포에 찻잎 우린 물을 걸러내어 만든다. 우리면 우릴수록 면포는 점점 밀크티 색으로 물드는데, 그 모습이 스타킹을 닮아 ‘실크 스타킹 티’라고도 부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 토스트와 잘 어울렸다.



그릇을 싹싹 비운 나와 달리, 남자친구는 결국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국밥을 반쯤 남겼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홍콩 한복판, 이 작은 차찬텡에서는 왜 달달한 밀크티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국밥을 함께 팔게 된 걸까.





2.

19세기 초, 동인도회사가 광둥성 근처에 무역항을 건설하면서 홍콩에도 영국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문호를 강제 개방하고 무역을 시작한 영국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1840년, 영국은 제1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고, 이듬해 홍콩섬 센트럴을 점령했다.



국력이 약해진 청은 몇 억의 인구로도 몇 만의 영국군을 이기지 못했다. 아편 전쟁은 불과 2년만에 청나라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패전국 청은 홍콩섬 할양, 항구 추가 개방, 배상금 지불 등을 골자로 하는 난징 조약을 맺는다. 그 결과 홍콩섬에 영국이 다스리는 빅토리아 시티가 건립되고, 총독부가 신설되었다.



제국주의 정점기 영국인들에게 티타임은 매우 중요한 문화였다. 영국 정부는 차에 세금을 부과해 큰 수입을 벌었으므로 차 소비를 장려했다. 경쟁국들의 식민지에서 나오는 커피나 초콜릿과 달리 차는 영국이 독점한 거대한 식민지, 인도에서 생산되었다. 차 산업이 이윤 창출 및 식민지 권력 유지의 수단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차를 마시는 행위는 영국적인 것, 애국적인 것으로 포장되었다.



영국 문화는 자연스럽게 홍콩에 흘러들었지만, 뿌리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티타임 문화도 한동안 홍콩으로 건너온 영국인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영국 식문화가 홍콩 대중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진 건 20세기 초반이다. 본래 중국 차 문화, 특히 광둥식 전통을 따르던 이들도 이제 홍차에 우유를 타고 설탕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콩인들이 영국식 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다. 우유를 곁들이는 영국식 차는 ‘홍콩식 밀크티’로의 변신 과정을 거쳤다. 우유는 연유로 대체되었고, 작은 그릇에 따로 내지 않고 미리 부은 후 손님에게 대접했다. 기후가 고온다습하고 낙농업이 덜 발달한 동남아에서는 신선한 우유보다 연유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홍콩식 밀크티로 대표되는 현대적 식문화의 선봉에 차찬텡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물을 제공하는 서양식 레스토랑과 달리,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차를 제공하기에 차찬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국 통치 홍콩에서 새로 생긴 식사 공간이 (타자인) 전통 영국식 식당과의 구별을 통해 자아를 확립한 셈이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바야흐로 차찬텡의 황금기였다. 하층 계급도 매일 사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저렴했기에 차찬텡 문화는 빠르게 자리잡았다. 중국의 문화도, 영국의 문화도 아닌 홍콩만의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차찬텡에서는 밀크티 외에도 커피와 밀크티를 섞은 유엔양(鴛鴦), 레몬티(檸檬茶) 등이 신메뉴로 등장하며 인기를 끌었다.



차와 함께 판매한 요리는 광동 음식과 서양 음식을 조합한 것들이 많았다. 동서양의 식재료와 조리법이 섞이면서 간장을 넣은 양식(豉油西餐), 즉, 홍콩 식으로 재해석한 서양 요리가 등장했다. 서민들이 싼값에 한 끼를 해결하도록 토스트, 계란, 소세지, 수프 등 저렴한 서양 식자재를 주로 쓴 것이 특징이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국물에 말아 재해석한 메뉴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3.

란퐁유엔에 다녀온 그날 저녁, 민주화 시위대를 만났다.

빅토리아 피크에 다녀오는 길에 배가 너무 고파 호텔 근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배만 대충 채우고 수저를 내려놨다. 갑자기 밖에서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시끄러운 함성과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포함, 식당 손님 전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방에 있던 주인아저씨도 황급히 나와 유리문 너머를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PRESS 문구가 박힌 헬멧을 쓴 서양인들이었다. 그들은 손에 카메라나 폰을 들고 무언가를 촬영하며 뒤로 걷고 있었다. 이어서 무장 경찰들이 마찬가지로 뒤로 걷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커다란 총을 가슴팍에 갖다 댄 채, 헬멧과 방검복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그 뒤로 민주화 시위대가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젊은이들이 플랜카드를 들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는 자꾸만 펑펑하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시위대 규모도 꽤 큰듯 함성이 어마어마 했다.



식당 주인아저씨는 유리문의 위 아래에 있는 동그란 잠금장치를 서둘러 잠갔다. 그래봤자 문도 양옆의 창문도 온통 유리였기에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깨부술 터였다. 등에 식은 땀이 주룩 흘렀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단지 시위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들이 구타당하는 장면이.



얼른 먹고 호텔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남친은 걱정 말라며 여유를 부렸다. 밥 먹는 사람한테서 수저를 뺏을 수도 없어서 식탁 아래서 발만 동동 굴렀다. 어느 순간에든 아주 작은 계기로 싸움이 시작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 충분히 휘말릴 정도로 우리는 시위 현장 한복판에 있었다.



남친이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미리 일어나 계산을 마쳤다. 카드를 돌려주는 주인아저씨에게 혹시 다른 문으로 나갈 수 있는지 물었다. 아저씨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방을 통과해 뒷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러고는 정말 고맙게도 문을 조심스레 열어 주변이 안전한지 먼저 살피고 우리를 내보내줬다.



뒷문에서 호텔까지는 불과 2블럭 거리였고, 시위대가 전진하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남자친구의 손을 잡아 끌다시피 하고 걸음을 빨리 하며 걸었다. (사귄지 세 달도 안 된 시점이기는 했지만) 그의 느긋함이 답답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4.

홍콩 여행을 계획할 무렵, 한국 언론에도 민주화 시위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당시엔 비폭력 시위만 지속되었고, 홍콩에 사는 지인도 상황이 안전하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홍콩에 머무는 사이 시위 규모가 커지고 양상이 격해졌다. 그 결과 시위대와 무장경찰을 함께 목격하게 된 것이다.



홍콩 민주화 운동을 설명하려면 중국과의 복잡한 관계, 일국양제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 영국은 두 차례 아편전쟁 이후 중국으로부터 홍콩 섬과 구룡반도를 할양받고, 1898년에는 신계를 99년간 조차한다. 1997년으로 예정된 홍콩 반환 시점이 돌아오자 영국은 사회주의 도입을 우려하며 조차를 연장하려 했다.



영국을 안심시키고자 중국은 대안으로 일국양제를 제시했다. 일국양제의 핵심은 중국이 홍콩의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 체제를 50년 동안 중국 본토와 별개의 체제로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홍콩에 사회주의 체제는 영구히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있었다. 발효 시점이 1997년이었으므로, 이 시스템은 2047년까지 유효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점점 홍콩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정치권에 친중파를 심고 서서히 언론을 장악한 후, 교육 과정에 중국 공산당에 우호적인 표현을 넣는 등 칼을 들이댔다. 이에 홍콩에서는 중국의 개입을 막으려면 정부의 수장인 행정장관을 직접 선거로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국 정부는 중국 의회에서 먼저 뽑은 후보자 3인 중 홍콩 주민들이 1명을 뽑는 ‘무늬만’ 직선제를 제안했다. 분노한 홍콩인들이 일으킨 시위가 바로 2014년 홍콩 우산 혁명(Umbrella Revolution)이다. 시민들이 우산으로 최루탄과 살수차를 막는 모습이 화제가 되어 이름 붙었다.

강경 진압 끝에 시위대가 해산하면서 우산 혁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2년 후 열린 홍콩 입법회 선거에서 우산 혁명을 주도했던 청년 운동가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이렇게 홍콩 민주화와 자유주의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시진핑이 홍콩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2019년 6월, ‘범죄인 인도 법안’으로 홍콩의 민주주의는 다시 한 번 벼랑 끝에 몰렸다. 법안이 통과되면, 홍콩에 있는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가 중국으로 강제 송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거리로 나섰다. 우리가 마주친 시위대는 바로 이들이었다. 양복 상의를 팔에 걸친 직장인, 백팩을 메고 교복을 입은 학생, 중년의 아주머니 등등.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지만, 20대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시위 현장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이들의 용기에 감탄하고 있었다.



모두의 내일을 지키기 위해 나의 오늘을 거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만약 내가 일제강점 치하 조선인이었다면, 1980년대 군부 독재 정권 하의 대학생이었다면, 나도 길거리에 나서 목소리를 높일 용기가 있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어떤 이들은 숭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설령 그들은 스러지더라도, 정신은 계승된다. 오늘날 자유로운 삶을 사는 우리는 이들에게 목숨만큼 큰 빚을 지고 있다.






5.

귀국 후, 홍콩 시위대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홍콩섬 인근 해안에서 시체가 떠오르고, 시위에 참여한 청년들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보도들이었다. 우리가 홍콩을 떠난 후 시위가 더욱 격해지면서 중국이 군대를 투입하고 무력진압이 행해졌다고 했다. 좋은 뉴스가 나올 때마다 혹시 내가 봤던 이들은 아닐까, 나와 눈이 마주쳤던 이들은 아닐까, 하며 가슴을 졸였다.



결국 2019년 홍콩 의회에서 범죄인 인도법은 통과되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중국은 이를 대체할 홍콩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홍콩 민주화 혁명은 실패했다. 중국은 망설임 없이 일국양제를 무너뜨렸고, 홍콩은 중국에 예속되었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국밥을 먹던 남자친구는 이듬해 남편이 되었다. 이따금 우리는 밀크티를 마시며 홍콩 여행을 추억한다. 홍콩식 밀크티를 앞으로도 계속 마실 수 있길, 언젠가 평화롭고 자유로운 홍콩에 다시 가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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