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옆자리 동료가 가방이 없어졌다며소리를 질렀다. 뒷 테이블에 손님이 없어서 그쪽 의자에 올려놨는데, 대화에 열중한 사이 누군가 몰래 가져간 것이다.
때는 2018년 2월, 우리는 출장 차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건, 현지에 있는 대표님의 지인들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빤 꼰 또마떼로 시작해 쵸리쪼, 홍합 요리 등 까딸루냐 지역의 특산 요리까지 두 시간 넘게 식사를 즐긴 후였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밑이며 주변 자리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방은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그 구역에 남은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그곳엔 CCTV도 없었다. 식당 주인에게도 물어봤지만 신고된 분실물도 없고 수상한 사람도 못 봤다고 했다.
문제는 그 가방에 휴대폰, 여권, 지갑 등 개인 소지품은 물론, 남은 출장 경비가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출장 경비는 다른 동료가 맡고 있었는데, 하필 그날 저녁 가장 큰 가방을 메고 숙소를 나서는 그에게 잠시 맡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어쩔 수 없죠, 주변을 좀 찾아보죠.”
지인들을 돌려보낸 후, 대표님이 담담하게 말했다. 구글 지도 앱을 켜고 권역을 살핀 후, 우리는 팀을 나눠 식당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도둑이 현금과 휴대폰은 갖고 가도, 지갑과 카드, 여권이라도 버리고 가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2.
바르셀로나에는 유독 노숙자, 부랑자, 도둑들이 많다. 길거리 곳곳에서 구걸하는 이들, 널브러져 자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물을 배경으로 정물처럼 앉아있는 이들의 모습은 처음에는 충격적이지만 금방 도시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유럽 여러 도시를 가봤지만 바르셀로나만큼 노숙자들이 인상적인 곳은 없었다. 일단 대부분 노숙자들이 개를 데리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그리고 표정이 밝고 나이도 젊은 노숙자들이 많았다. 언뜻 보면 젊은 혈기로 세계를 두 눈에 담고자 무작정 떠난 배낭여행자처럼 보일 정도다.
기억에 남는 한 노숙자는 돗자리 앞에 종이컵 네 개를 놓고 앉아 있었다. 각 컵 앞에는 음식(food), 술(alcohol), 돈(money), 대마초(weed)가 적힌 골판지가 놓아둔 채로. 이렇게 구체적이고 당당하게 구걸하다니,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역시 표정이 참 밝았고 옆에는 길게 누운 개가 있었다.
노숙자가 수동적 부랑자라면 능동적 부랑자도 있다. 아예 대놓고 돈 좀 달라고 구걸하는 사람들이다. 하루는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앉아 에스트레야 맥주를 마시는데, 웬 청년이 오더니 다짜고짜 돈을 달라며 주위를 빙빙 맴돌기도 했다. 2월의 바르셀로나는 겨울 코트를 입어도 쌀쌀한데, 그는 반팔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자, 돈이 안 되면 맥주라도 달라고 했다.
바르셀로나 하면 도둑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도시다 보니, 두툼한 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들도 몰려든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까딸루냐 주는 스페인 내에서 부유한 지역에 속하나, 그곳에 사는 모두가 부유한 건 아니다.
얼마 전에는 한 도둑이 생방송 카메라에 찍히는 줄 모르고 가방을 훔쳤다가 덜미를 잡혔다. 지지리도 운 없는 (혹은 시야가 좁은) 이 도둑은 해변에서 관광객을 인터뷰하던 국영 방송 TVE 카메라에 포착됐다. 훔치는 장면과 도둑의 얼굴이 모두 공개됐기에 다행히 금방 잡았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경찰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도시 내에서 절도 사건은 하루 평균 225건, 강도 사건은 27건 발생한단다. 이쯤 되면 바르셀로나 여행 중 한 번도 도둑을 안 만나는 게 더 신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3.
동료 두 명과 함께 식당을 기준으로 북쪽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밤 11시가 넘은 데다 골목이 많은 지역이라 곳곳이 어두웠다. 고딕 지구는 이상하게도 가로등은 별로 없는데 쓰레기통은 꼭 골목마다 있었다. 길바닥을 꼼꼼히 살피며 걷는 것은 물론, 쓰레기통이 나올 때마다 안을 뒤졌다.
돌아다닌 지 이십 분쯤 지났을까. 아무래도 못 찾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 서 커다란 트럭이 삐ㅡ삐ㅡ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형광 연두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환경미화원들이 길거리 쓰레기통을 비우기 시작한 것이다.
까딸란어(바르셀로나가 속한 까딸루냐 주에서 쓰는 스페인어)는 잘 모르지만, 그나마 까스떼야노(수도인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쓰는 표준 스페인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환경미화원들에게 말을 걸었다.
“Perdone, estoy buscando un bolso cuadrado y gris...(실례합니다. 네모난 회색 가방을 찾고 있는데요...)"
그러나 가방이나 개인 소지품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로도 한 시간 넘게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반대 방향으로 갔던 대표님과 다른 동료도 빈손으로 돌아왔다. 결국 우리는 수색을 중단하고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졸지에 여권, 지갑, 스마트폰을 전부 분실한 동료는 다음 날 일정을 취소했다. 새벽부터 경찰서에 가서 도난 신고를 하고, 임시 폰을 개통하느라 그의 하루는 우리보다 일찍 시작했다. 게다가 바르셀로나에서는 임시 여권 발급이 안 된다고 해서 당일치기로 마드리드까지 다녀와야 했다.
4.
그나마 도난 사건 다음 날은 출장 공식 일정 마지막 날이었다. 반나절 조금 지나 일정이 끝났고, 오후에는 각자 자유롭게 시간을 쓰기로 했다. 전날의 안 좋은 기억은 뒤로 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구불구불한 골목을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가 남긴 건축 유산들로 유명하지만, 사실 나는 고딕 지구 근처의 오래된 건축물을 더 좋아한다. 까딸루냐 광장에서 바다 쪽으로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바르셀로나 대성당이며 로마 시대의 성벽 유적 등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건축물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근처에 왕의 광장(plaza del rey)이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여왕에게 신대륙 발견을 보고했다는 역사적 장소다. 제노바 공국 출신으로 추정되는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의 군주들에게 신항로 개척을 제안했다. 연이어 거절당한 후, 마지막으로 눈길을 돌린 곳이 스페인이었다.
15세기 중후반은 스페인 역사에서 여러 모로 가장 중요한 시기다. 바로 이 무렵,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가톨릭 신앙과 강력한 왕권을 특징으로 하는 민족 국가로서의 에스파냐 왕국이 성립했다.
그 단초가 된 것은 1469년, 아라곤 왕국의 왕자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 이사벨의 결혼이다. 이들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공동 왕이 되었고, 무슬림들에 맞서 국토 회복 전쟁을 벌였다. 이를 레꼰끼스따(Reconquista, 재정복) 운동이라고 부른다.
1492년 1월, 무함마드 12세가 이베리아 반도 남부 도시 그라나다를 떠나면서 약 800년간 지속된 무슬림 세력의 지배가 끝났다. 이후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를 등용하면서 같은 해 8월, 마침내 콜럼버스가 4척의 배를 이끌고 항해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기존 루트와 정반대로 인도에 가겠다는 계획은 워낙 무모했기에 참여하겠다는 선원이 많지 않았다. 결국 악행을 면벌(免罰)한다는 조건으로 범죄자와 부랑자들을 모집해 승무원 수를 채웠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이들이야말로 가장 간절히 신세계를 바라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아메리카 대륙은 ‘발견’되었고, 여러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콜럼버스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신대륙 ‘탐험’을 통해 스페인은 많은 것을 훔쳤다. 사람, 식물, 동물, 은, 금, 기타 등등. 스페인으로 흘러간 부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 쓰였고, 지중해 항로를 통한 무역은 점차 힘을 잃었다.
원주민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한 콜럼버스는 위인, 영웅, 모험가의 칭호를 얻었다. 그 자신도 도둑이었고, 열강의 도둑질에 앞장섰던 콜럼버스는 이제 람블라 거리 끝 기념비에 우뚝 서서 바르셀로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도시를 배회하는 요즘 도둑들은 콜럼버스 따위엔 관심도 없겠지만.
다음 날, 우리는 우연히 그 식당 근처를 다시 지나게 되었다. 잠깐 들러 결국 분실물을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멋진 수염을 기른 가게 주인은 위로의 말을 건네며 공짜 술을 한 잔씩 줬다. 그의 친절은 달콤했지만, 들이킨 술잔의 끝맛은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