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 밤 Aug 06. 2016

 온전한 기와가 부서진 옥보다 낫다

'아 보람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를 읽고. (160806)



아 보람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P.98-99
 '일에 보람을 느끼며 노력하는 어른들의 모습'이나 '이 사회에 공헌함으로써 돈 이외의 기쁨을 얻는 어른들의 모습'을 잔뜩 보여주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느끼게 한다. 

'일을 통해 얻는 돈 이외의 다른 것'만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학생들은 '돈보다 보람이 중요하다'는 가치관이 정당하다고 믿게 된다. 




 꿈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때론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는 등 비현실적인 일마저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은 가능하지 않지만 언젠가 현실로 이룰' 소망을 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꿈이 뭐에요?'라는 질문은 꼭 '특정한 직업을 갖는 거에요'로 귀결되기 시작했다. 꿈이 꼭 직업이어야만 용인되는 사회 풍조가 형성된 것이다. 사회 내부에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명성을 얻는 직업을 꿈으로 설정하는 사람들은 이미 성공한 것처럼 대접받는다. 정해진 노선을 벗어나야만 하는, 즉 사회가 정해 놓은 올바른 노선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 이미 지레짐작 가능한 꿈은 혼이 난다. 존중받지 못한다. 대개 버스 기사가 되고 싶다거나, 식료품점 주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뭐가 되려고 저러냐며 타박하고 혀를 찬다. 


뭐가 되려고 저러니. 

대체 뭐가 돼야 옳은 거지? 


 우리 사회는 스스로의 시선보다 타인의 시선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는 보통 기성 세대에서 젊은 세대를 향해 이루어 진다. 남들이 봤을 때 뭐라고 하겠니, 라는 말이면 만사가 해결된다. 이처럼 사회는 이미 형성된 시스템을 잘 유지하기 위해, 이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선의 가치관을 정해 놓는다. 사회화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개개인들을 가치관 안에 넣어 재단한 후, 비집어 나온 건 자르고 아예 맞지 않는 것은 호되게 버린다. 




P.95
만약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이 내가 열심히 한다고 봐줄까?'라는 생각에만 빠져 있다면 당신이 속한 조직 환경에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뭐가 되려고 저러냐며 타박하는 말에, 아 그렇네요. 하며 무기력하게 순응하는 쪽이 아니라 뭐가 돼야 하냐고 되물을 수 있는 쪽으로 컸어야 한다. 되묻는다는 건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이다.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자신의 인생을 제 것이라고 인지할 수 있음을 뜻한다. 제가 지닌 인생이, 저 스스로 꾸려나갈 인생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인 중 대다수가 그렇지 못하다. 극한 말로 '그들에겐 자아가 없다'. 

 

 이는 자아실현이라는 맥락에서 쓰이는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올바른 교육을 통해 형성된 도덕 규범, 적절한 경험과 피드백을 통해 내면화 된 가치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립된 스스로의 신념. 이러한 세 가지의 결합을 통해 형성된다. 경험하고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생김새가 고유하듯 자아 또한 그 결이 고유하지만, 어떻게 디자인 될 지는 그걸 둘러싼 환경에 따라 차츰 바뀌어 나간다. 이 때에 환경이란 어떤 식으로 자아를 인지할지, 어떤 방법으로 자아를 대하고 형성해 나갈지, 어려움이 닥쳤을 땐 어떻게 극복하고 다독일 것인지 등에 대해 가르치고 자연스레 몸과 머릿속에 각인되게끔 공부시키는 견고한 정치, 교육, 문화적 시스템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시스템들을 단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과 그 자아를 존중하는 사회란  거의 환상에 가까운 일이다. 책으로나 접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이론이다. 이를 중요히 생각하자고 내는 목소리는 죄 묵살한다. 동조 압박, 조용히 하라는 은근한 경고. 이미 잘 형성해 유지되고 있는 시스템을 저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 다시 조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기회비용을 따졌을 때,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흔드느니 그보다는 작은 단위의 개개인을 애초부터 사회 체제에 잘 순응할 수 있도록 개조시키는 것이 더 빠르다. 따라서 개인은 하나의 부품으로만 끝없이 전락 당한다. 고유한 시선을 신경쓰다보니 자아가 없어졌거나, 자아가 없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이 중요해졌다거나 하는 인과관계는 중요치 않다. 결국 남는 건 타인의 시선을 끌어와 내면을 형성하는 텅 빈 껍데기들 뿐이다. 




P. 107
대학생은 특정 기업에 소속되지 않았으니 특정한 입장에 구애되지 않고 마음껏 사고하고 발언할 수 있다. 
사회의 패러다임이나 기업의 활동, 고등학생 때까지 학교 교육에서 배웠던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지침에 대해 대학에서는 전부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5학년 2학기 때까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줄곧 장래희망이 적힌 이름표를 달고 다녔다. '3학년 5반, 한의사, ㅇㅇㅇ'처럼. 필수였다. 내 이름표엔 수 개의 직업이 드나들었다. 그걸 적기 위해 설문지까지 따로 나왔다. '꿈이 뭐냐'는 질문이었다. 별다르게 되고 싶은 게 없던 친구들은 써내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은 뭐라도 적어 내라며 닦달했다. 난 분명 어디에서 주워 들었을 법한 몇 개의 직업을 적어 냈다. 패션 디자이너, 한의사, 검사, 소설가 등. 생각해보면 모두 날 향한 어른들의 기대감을 맞춰주기 위한 적당한 사탕발림이었다. 열 몇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저런 직업을 적어 놓으면 어른들이 좋아할 거란 걸 알았던 거였다. 그 때의 난 그냥 친구들과 펌프 점수로 경쟁하길 좋아하고 어떻게 하면 500원을 얻어서 내일 하굣길에 피카츄 돈까스를 먹을까를 고민하던 초등학생일 뿐이었다. 진짜 꿈은 한의사나 검사가 아닌 펌프나 피카츄 돈까스였을 것이다.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참 뜨악한 일이다. 자신의 적성, 취미, 능력에 대해 알기도 전에 '어딘가 좋아보이는 일'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다니. 



p.166
본래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모두와 똑같이'란 불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사실은 '남들과 똑같이' 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게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좀더 소중히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대충 '남들에게 맞추는' 일에만 에너지를 쓰면서 내키지 않는 인생을 살다가 끝나게 된다. 



 결국, 궁극적으로 우리는 온전해져야 한다. 좋고 싫은 걸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포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포기는 곧 책임과도 같다. 다 떠맡아 묵묵히 해내는 것만이 책임지는 게 아니다. 내 역량이 부족함을 알고 더 잘 할 수 있는 타인에게 넘길 줄 아는 포기. 그것 또한 책임지는 행동이다. 또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저 순응하기 보다는 다른 길이 무엇인지, 뭐가 될 것인지를. 그리고 내 자아가 어디 있는지를. 생각한다는 건 인지할 수 있다는 뜻이므로. 인지를 하고 안하고의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엄청나고도 숭고한 일로까지 연결되는 문제다. 내 옆의 친구, 가족, 동료는 이런 곳에서 함께 버텨내는 동료이지, 내 삶을 대신 운전해 줄 기사가 아니다. 

 


내 인생은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살아줄 수 없다.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는 인생 최대 낭비다.

자신의 가치관에 솔직해지자. 좀더 나 자신을 위해 살자.



엉망으로 얽힌 복잡한 사회를 탓만 하고 있기엔 각자의 인생이 너무 소중하므로.  






작가의 이전글 파편 0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