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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밤 Mar 31. 2017

우리는 밤을 새고, 시간을 써 내려가다.

- 제 7 호 -







 어렴풋이 떠오르는 최초의 기억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산맥 줄기를 바라보며 시를 짓던 모습이다. 아빠가 신기해하고 엄마가 박수를 치고 오빠가 뾰로통하여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굉장히 신났다. 그 후의 기억에도 나는 늘 글을 썼다. 잘 썼든 못 썼든, 아무튼 간 마음 안쪽에서 차오르는 단어를 자꾸만 밖으로 퍼냈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가족을 벗어나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을 때엔 만화 그리기에 취미를 붙였다. 동그랗고 빨간 안경테를 쓴 친구와 하얀 A4용지 한가득 서로를 닮은 그림을 그리고, 이름을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친구들에게 읽어보라고 나눠주기도 했고, 또 제법 재미있었던 건지 손에서 손을 타고 반에서 반으로 넘나들어서 최후엔 종적을 감춰버린 적이 두어 번 있기도 했다. 


 온 동네를 헤집으며 도둑과 경찰을 하던 초등학생은 나이를 먹어 중학생이 되고, 당연하게 사춘기가 찾아들었다. 참으로 조용하고 은밀한 사춘기였다. 이사를 갔으니 망정이지 고작 몇 개월 전만 해도 참으로 신나게 뛰어놀던 애가 온 천지 불행은 제가 다 떠맡은 줄 알고서 다 큰 척 편 가르는 눈을 하고 있었으니. 만일 같이 놀던 친구들이 봤더라면 재수 밥맛이라고 할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사춘기 감정에 짓눌렸다기보다 오히려 즐겼다고 얘기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해를 요청하거나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나 혼자만의 결핍이었고, 그 속에 틀어앉아 심연의 뿌리를 찾는 행위가 제법 근사해서였을까. 에너지를 자꾸만 바깥으로 표출하던 이전과는 달리 계속 안으로, 안으로만 가라앉았다. 


 내 속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를 얽어 나가기 위해선 가지각색 종류별 노트가 필요했다. 까슬한 종이가 좋았고 쨍한 색보다는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표지를,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절반보다 조금 더 넓은 칸과 교과서 사이에 숨길 수 있게 약간은 작은 사이즈의 노트를 샀다. 기껏 노트 하나 사는 데에 뭐 그리 까다롭게 굴었나 싶었지만, 그 과정 모두가 '나' 존재를 형성시키는 단계였다. 어린애였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걸 살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순히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그건 내 감정을 쏟아낼 '공간'이었다. 



 존재의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런 게 꼭 있어야 할까? 살아가기 위한 구실로써 살아가는 것 같다. 주어진 삶이 있기에, 왜 주어졌는지도 모를 삶을 위해. 큰 의미를 담거나 목표를 세우기엔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다. (2014년, 가을의 일기)



 그렇게 근 9년 동안 글을 썼다. 9년. 거의 10년에 가까운 그 시간 동안-

 -공간 속에 별의별 생각을 다 털어놨다. 털어놓은 생각은 강물이 되거나 바다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울창한 숲 속이나 세찬 바람이 불어대는 갈대밭이 되기도 했다. 언제 벗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길고 긴 터널 같기도 했다. 좁고 음습하진 않았으나 끝에서 드는 빛이 너무 어렴풋한. 악을 지르면 사방으로 목소리가 퍼졌으나 텅 비어서 더 칠흑 같은 공간이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렇게나 텅 빈 사람이구나. 

 





 그리고 참으로 어느 날. 그건 정말로 '그리고', '참으로', '어느 날'. 세 단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마치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발을 올리고 서있던 계단을 드디어 하나 밟고 올라선 것만 같은, 그런 순간.

 

 글에 '대답'이 있었다. 10 년 동안 글 속에 단 한 번 나타난 적 없던 종류의. 



 지금껏 적당히 아는 척 해왔다. 다 아는 양 굴면서 실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알려고 노력한 적 없다.
말만 번지르르 늘어놨던 거 아닐까. 버석거리는 모래로 만든 하잘것없이 연약한 말뿐을.

  (...) 이제껏 눈 앞에 우울과 심연의 커튼을 쳐놓고 그 뒤에 숨어 있었다. 
내가 가진 양면성을 인정해야겠다. 추악하거나 추잡하더라도, 속물적이거나 표독스러워도.
내 본성이 비굴하거나 궁상맞아도 결국 그게 나 자신인 것을 뭐 어겠는가. 
사는 게 업인 사람으로서 그런 양면성과 이면성은 적당하며 당연하다.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만 그 좋지 않은 면을 고쳐나갈 수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드디어 홀로, 바로 설 수 있다. 

(2017년, 겨울의 일기)



 내 속에 들어찬 것들을 쏟아내다 보니 모두 텅 비었고, 그래서 오히려 윤곽만 뚜렷하게 남았다. 바깥세상과 나를 구분하는 건 우선 경계부터 명확하게 긋고 시작해야 할 일이었다. 이젠 대답을 해 나갈 차례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결을 가졌고 이제 여기에 무엇을 차곡차곡 채워 넣을 건지. 그간 허공에 던져놓은 나의 질문에 내가 답을 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다른 어떤 것보다 나를 잘 아는 질문이었다. 또한 선생님이었고, 조언자였다. 오묘했다. 이렇게 돌아올 줄 몰랐는데. 단지 적는 행위가 좋아서 글을 쓴다고 여겼다. 도저히 틀어막힐 리 없어 보이는 밑 깨진 독에 글을 퍼붓는다고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캄캄한 길을 걸어갈 나를 위해 흩뿌려놓은 길잡이 별이었다. 참으로 묘한 패러독스였다. 깊게 가라앉은 생각이 반짝거리는 길잡이가 되고, 대답이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사실 무한한 대답이 내포되어 있었구나, 하는. 그런 패러독스. 



 “우리가 갖고 있는 내면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우리가 능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가장 깊은 공포는 우리가 모든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강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가장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어두움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발하는 빛입니다. 

  우리는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빛나고 밝고 재능 있고 근사한 존재가 되어야 할 나는 누구인가? 그러한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할 당신은 누구인가? (...) 소심하게 사는 것은 세상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타인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 내 자신을 편협하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빛이 아닙니다. 

빛이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이 갖는 것이 아니며 빛은 우리 각자의 안에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고유의 빛이 반짝이도록 둡시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타인들도 반짝이도록 허할 것입니다. 
 우리의 맘속에 숨어 있던 그 두려움을 떨치면서, 우리의 존재는 자연히 타인에게도 자유를 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식 연설 중 (1994.05.10)



 요즘도 버리지 않고 죄 모아둔 노트를 수시 때때로 꺼내 읽어본다. 나를 향해 이야기를 건네는 나의 열네 살 겨울의 시간, 열일곱 살 여름의 시간, 스무 살 가을의 시간. 가지각색의 시간이 담긴 별들은 내 머리 위를 밝히고, 나는 이제 밝은 공간 속에서 컴컴한 암흑을 지나는 타인을 향해 길잡이 별을 던진다. 낡은 질문이 새로운 대답이 되고 그게 또다시 다른 질문이 되고. 

 비었던 허공 가득히 선량한 빛이 들어찬다. 어두웠던 공간이 넓고 풍요로운 곳으로 바뀐 그곳에 새로운 시간과 글을 써 내려가며, 나만이 할 수 있는 힘과 글이 가진 힘을 발견한다. 

 오늘도 밤을 새우며 나를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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