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 호 -
2014년, 3년 전 기억도 안 나는 그 어느 날. 나는 빨갛고 노란 코닥 필름 한 롤을 사뒀다. 언젠가 쓰다가 만 필름 카메라로 때 되고 날 되면 꼭 찍어야지, 그런데 그 '때'와 '날'이라는 게 생각보다 쉽게 오질 않았다. 두 말할 여지없이 타고난 게으름 때문이었다. 결국 그건 쓸 타이밍을 놓친 필기용품들처럼 이리저리 서랍장 속을 뒹굴기만 했다. 부피라도 컸으면 해치우자는 생각에 진즉 사용했을 건데, 하필 손바닥만 한 크기라 눈에 잘 띄지도 않아서.
더욱이 2014년이면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보다는 DSLR이 훨씬 유행할 때였다. 난 사진 전공과목을 핑계로 마련한 DSLR로 원 없이 사진을 찍어제꼈다.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2017년 지금까지 근 5천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뭔가 불편했다면 금세 흥미를 잃었을 건데 DSLR의 즉시성이 특성이 내 성격과 잘 맞았다. 뷰파인더로 몇 번씩이나 잘 찍고 있는지 확인하며 찍을 수 있다는 것, 별로면 곧장 지우고 다시 찍을 수 있다는 것 등등. 초점 나간 사진, 구도 비뚤어진 사진, 색감 엉망인 사진 보는 게 그렇게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수시로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사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어쩌면 현실보다 더 멋있게 기억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어서. 아무도 완벽하게 찍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냥 내가 그랬다. 우연히 잘 찍힌 사진은 필요 없었다. 세심하게 공들여 잘 찍힌 사진이 필요했다. 미숙한 완벽주의와 그로 인한 폐해였다. 그 기깔나게 고집스러운 성격은 뭘 제대로 도와주는 것도 없으면서 내 마음 한편에 오롯이 뿌리내리곤 무럭무럭 오만함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나는 당연한 수순처럼 사진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사진 촬영도 기술인지라 자꾸 하다 보면 제법 늘어야 하는데 느는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에 비해 특출한 기법이나 콘셉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얼추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여러 대학생 중 적당히 찍어내는 한 명이었을 뿐. 가능성도 없을 만큼 못 찍으면 관두기라도 할 텐데 '어떻게 잘만 하면' 될 것 같았으나 그 어떻게를 어떻게 해낼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그런 와중에 일 년 전, 유독 사진 취향이 잘 맞는 친구가 필름 카메라를 찍기 시작했다. 그간 봐왔던 사진과는 영 다른 매력이었다. 분명 2016년이라는 현재를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십 년대 말, 이천 년대 초반의 분위기가 서린 사진이었다. 워낙 순간의 공백을 잘 포착해내는 친구였다. 지나가는 일상을 무거운 추로 꾹 눌러 밀봉시켜 놓은 분위기가 참 좋았다.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나서 처음 사용했을 카메라는 아마 하얗고 초록색 종이곽에 둘러싸인 후지필름 일회용 카메라였다. 종이곽 색깔과 비슷한 진한 초록색 표면엔 투박한 고딕체로 FUJI-FILM이 적혀 있었다. 일회용 답게 허술하게 만들어진 지라 까딱하면 빛이 새어 들어가 필름을 버리기 일쑤였지만, 아무 슈퍼에나 들어가서 카메라 주세요 하면 2500원인가 4500원에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기술적 연유로 가정마다 멀쩡한 카메라 한 대 갖기가 어렵던 때였던 만큼, 이 일회용 카메라는 엄마의 의무감을 돕는 조력자였다. 커가는 자식들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해 둬야겠다는 나름의 사명이기도 했다. 엄마는 바느질, 자수, 뜨개질, 퀼트, 요리 등 손으로 하는 취미활동엔 죽었다 깨도 관심 없다고 말하는 유형이었지만 하릴없이 가족의 일상을 필름 위에 꾹꾹 눌러 찍어 부지런히 인화하고 심지어 앨범까지 몇 권씩 만들어 두셨다. 지금 와서 앨범을 들춰 보며 어떻게 1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질리지 않고 찍을 수 있었는지, 비법이 뭔지 여쭤보면, 그냥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고 대답하신다.
그 대답에 오랫동안 끼고 있어 뿌얘진 렌즈 안쪽 단면처럼 애매하던 감각들이 천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약간 빳빳한 재질의 종이를 손 끝으로 매만지던 감각, 구겨져 하얗게 실금 간 모서리를 눌러 펴던 감각, 특별한 일 없이 방 정리를 하다가 우수수 떨어져 나온 사진을 붙잡고 종일 예전을 추억하던 감각. 시간이 일렁거리며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은 사진들. 서있거나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냉장고를 열어보는 뒷모습, 이 빠진 채 훤하게 웃고 있는 망충한 남매, 술독에 푹 담궜다 꺼낸 것 같은 아빠의 주말 모습. 참 별 거 아닌 일상이 올올이 모여 커다란 추억으로 남아 넘실거렸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미아는 세바스찬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People love what other people are passionate about.'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열정에 이끌리게 되어있다고. 친구의 필름 사진에 대한 열망, 엄마의 일상 기록에 대한 당연함이 내 마음속에 묵혀 두었던 필름 한 롤을 발아시켰다. 단언컨대 분명한 계기다. 더불어 이젠 각 맞춰 열 맞춰 찍은 사진도 좋지만, 우연으로 찍힌 사진도 좋다는 걸 알게 됐다. 언뜻 불빛 번지듯 흔들린 사진, 예상치 못하게 초점이 풀려 찍힌 사진,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버릴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과 표정이 담긴 사진. 크게 놓고 보면 모든 일이 참으로 필연적이지만 순간순간은 우연이며, 현재를 살아나갈 뿐인 우리는 순간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러니 스물 네 장 중 단 네 장만 살아남은 첫 롤을 감는다. 아무래도 좋다. 어리숙한 순간들이 모여 나만의 결을 만들어 나갈 거라는, 제법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All rights reserved by. HayanBam
Filmed at Namsan, Iteawon.
Photograpic specification, Olympus mu:2, kodak colorpls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