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hyeon Mar 31. 2017

우리는 밤을 새고, 시간을 쌓다

-제 7 호 -


 나는 버리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최근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방 정리를 했다. 청소와 정리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정리는 '덜어내기'에 가깝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기 위해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곁에 두고 시작해 한 번당 장장 8시간 가까이 소요했다. 쓰레기 한 보따리가 나왔지만 여전히 내 방 수납공간엔 빈자리 하나 없다. 나는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한 물건을 버리기까지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최소 세 번은 고민했다. 그럴 때면 그 물건을 갖게 된 순간을 추억하면서부터 미래에 어떤 쓸모가 있을지 상상하기까지 했다.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다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기 일쑤였다.


 그 세 번의 고민은 내 머릿속 여러 기준 절차를 통과하는 수순과 같다. 우선은 비용이 마음에 걸린다. '이 물건을 얼마 주고 샀기 때문에 버리기 아깝다.' 따위의 생각이 들어 버리기를 주저한다. 그다음엔 이 물건이 훗날 필요하게 될까 걱정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나 '유행은 돌고 돈다'와 같다. 실제로 어떤 것을 버렸다가 나중에 애타게 찾은 경험이 있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은 그 물건이 지닌 추억이다. 방 한편에 유치원생 때부터 쓴 일기장들을 모아놨다. 종이 먹는 벌레가 생길까 뭘 잡아먹는 하마같은 걸 놔둬야 할 정도로 오래됐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어린 날에 뭘 안다고. 마음에서 우러나 쓴 것도 아니며, 학교에서 숙제라고 하니까 꾸역꾸역 영혼 없이 써놓은 기록들. 심지어 어떤 날엔 정말 '밥을 먹었다. 맛있었다.'가 끝인 장들. 20여 년 살아오면서 한 두 번 펼쳐보고 말았던 글들. 그럼에도 정리에서 살아남아 방 한편을 차지하는 것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건 일기장이 거쳐왔을 시간이다. 엄마와 문방구에 들러 일기장을 골랐을 시간, 그 일기장이 어린 내 손에 채워졌을 시간, 담임선생님의 참 잘했어요 도장 같은 시간들 말이다. 돌이킬 수도, 가질 수도 없기에 손에 쥘 수 있는 걸로 대신하고 있다. 이 버릇은 필름 사진을 시작하면서 더 심해졌다. 버리지 않고 남겨뒀던 것(필름 카메라)이 훗날 빛을 발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은 거기서 나아가 더 사 모으기까지 하고 있다. 이제는 몇 종류 남아 있지 않은 필름이 차례차례 단종되어가고 있다. 언제 어떻게 없어질지 모르니 그전에 최대한 써보고자 다양하게 사고 있다.


필름들, by juhyeon, 2017


 지난해 유독 눈에 띈 두 시류가 있다. 미니멀리즘과 복고다. 차분한 색감과 단순한 구조를 지닌 인테리어 가구들이 주목받으면서 이케아, 무인양품과 같은 미니멀리즘 숍이 인기를 끌었고, 서점가에는 어떻게 하면 잘 버리고 심플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패션계에는 복고 바람이 불어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장롱에서 20년 전 부모님이 입던 옷을 꺼내 입어도 무색하지 않았다. 사진 업로드 SNS인 인스타그램이나 시중에 출판된 사진집을 살펴보면 집안 깊숙한 곳 묻혀 있던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든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토록 상충되는 개념이 또 있을까. 한쪽에선 버리라, 한쪽에선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간직해라, 하고 있다.


 그러니 답은 없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말고는.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해 수도 없이 도전했지만 결국 내가 맥시멈리스트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버린 걸 후회하는 건 돌이킬 수 없지만 버리지 않아 후회하는 건 앞으로 언제든 버릴 기회가 남아있다, 는 식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어느새 물건들이 좁은 수납장을 비집고 나와 책상 위까지 점령해가고 있다. 오늘도 밤을 새고, 책상 귀퉁이, 시간이 켜켜이 쌓인다.

   




all right reserved by juhyeon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밤을 새고, 첫 롤을 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