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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밤 Apr 23. 2016

Tall size, Lethe  01

톨 사이즈 레테



<Tall size, Lethe: 톨 사이즈 레테 01>

                    Written by. 하얀 밤




그런게 있다. 흐르는 배경으로 남겨두는 것들 중에서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오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걷는 내 발자욱엔 헤아리기 어려운 감정이 배어나와 발목을 붙잡았다. 키 낮은 건물에 오밀조밀 꾸며진 몇 평 짜리 카페 앞에서 멈춘 내 발 끝은 가지런하지 못한채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삐죽빼죽 튀어나갔다. 손에 쥔 핸드폰을 꾹 말아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번엔 정돈되지 않은 아무 말이나 튀어나갈지 몰라서. 카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란히 놓인 빨간 팬지꽃에 물을 주는 그 사람, 그 뒷모습은. 



"...안녕."

"...응."



 언젠가의 옛 연인, 너였다. 



-



'어느 날'. 너에 대한 생각은 항상 어느 날로 시작했다. 어느 날 우리가 만나면 서로 알아차리긴 할 지. 어느 날 그래도 서로 마주한다면 어떤 표정을 할 지. 아니 대할 수는 있을지. 난 우리의 어느 날이 참 궁금했다. 사람 사이를 마치 서로 합이 안 맞는 블록 떼어내듯 쉽게 끊을 수 있단 생각으로 살아오던 날 모호하게 만든 너였으니까. 넌 언제나 타인을 물처럼 대했다. 뭉글뭉글, 손으로 쥐면 어떻게 해서라든지 손 틈 사이로 죄다 빠져나갈 질감의 덩어리처럼 굴었다. 그랬던 네가 제법 단호하게 '우리에게 다음은 없을거야. 다음은 함께라는 뜻이니까, 더 이상의 공통된 시간을 만들지 말자.'며 끝을 선포했었으니 궁금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잘 지냈냐고 물으면,"

"무례한 거야."

"묻지 말까."

"...응."



너는 그간의 일상을 나누길 거부한 대신 커피 한 잔을 내려줬다. 네가 할 수 있는 나름의 뭉글뭉글하고도 단호한 거부감이었다. 얇은 크림색 커피 잔 속으로 커피와 우유가 함께 휘말려 등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열어 놓은 창 틈 사이로 바람이 밀려 들었다. 고소한 커피 향이 실려 코 끝을 스쳤다. 흘러온 바람은 마음 위로 켜켜이 쌓인 먼지가 오스스 뒤로 밀리고, 그러면 난 그것들이 언제 마음 위를 덮어놓았던 것인가 잠시간 헷갈렸다. 나는 참 별게 다 신경쓰였다. 한 뼘도 자라지 못한 걸까. 예전처럼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날 바라보는 너는 그런 나를 조용히 헤아려 읽고 있었다. 



"여전하구나."

"뭐가."

"읽는 너."



그 말에 네가 조금 웃었다. 싱그러운 웃음이 그대로였다. 읽혀주는 너도 여전해. 네 모든 것 중 가장 불편해하는 걸 꼽아보라면 서슴치 않고 그 시선이라고 말할 만큼, 우리가 연인이었을 때부터 아니 혹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쩌면 넌 날 읽고 난 네게 읽히고 하는 게 각자 존재에게 규정된 의미인 것처럼. 그렇게도 네 시선이 싫었다. 졸아붙어 땅바닥을 기는 한 뼘 짜리 마음을 찾아내 일으키는 것도, 아닌 척 한없이 기울어진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도 다 너였기에. 



"어디, 가는 중이었어?" 

"퇴근."

"취직했어?"

"XX출판."

"그림은?"

"뜻대로 되나, 뭐." 

"하긴."



사는 게 마음대로 될 리가 있나. 넌 홀로 끄덕이며 손 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조금 갉작거렸다. 어두운 색 니트 바깥에 나온 손가락들은 여전히 가지런했다. 



-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같은 반이었던 건 일학년 때 뿐이지만 삼 년의 일상이 늘 너였다. 우린 대체적으로 도서관에 머물렀다, 잠잠하게, 물결에 맴도는 잎파리들처럼. 봄과 여름 사이. 하루 왼종일 적시며 비가 내리던 날. 가방을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은 어깨를 툭 건드리자 돌아보는 넌 푹 가라앉아 있었다. 딱히 헤아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아래를 헤메고 있구나. 지평선을 가늠치 못할 정도로 탁 트여 보이는 네 속은 의외로 늘상 우거진 풀숲이었다. 습하고 어두워 주인인 저조차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건드리지 않는다. 충분히 잃어야 홀가분하게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저 가만히 있다가, 견고한 심연에 틈이라도 생길 때를 노렸다가 널 낚아채 올려주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밍숭맹숭한 하루가 끝나갈 무렵 넌 갑자기 내게 물었다. 너 뭐 하면서 살거야? 책을 읽는둥 마는둥, 대충 먼 창밖이나 쳐다보고있던 나는 단지 할 말을 찾지 못해 잠시간 머물러 있다가. 흐린 하늘 위로 먹구름 짓뭉개진 모습이 꼭 유화 물감 같기도 하고. 또 네게로 돌린 시선 끝에 흡사 자를 대고 그린 마냥 올곧게 앉은 네 모습이 보여서. 생뚱맞게도 그림, 하고 대답했다. 



'그림?'

'그림.'

'못 그리잖아.'

'안 그린거지.'

'...뭐 그릴건데?'

'보이는거 그냥 다.'

'됐어.'

'아니면 안 보이는 거 다.'

'안 보이는 걸 어떻게 그려.'



내게 기울어진 고개, 반신반의하는 표정, 올곧게 펼쳐진 시선과 차분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몸짓. 그 주변으로 퍼지는 오후 나절 즈음의 주홍색 석양빛. 



'아니면 너.'

'......'

'너 그릴게.'



순간을 퍼올릴 수 있다면. 그 순간을 퍼올려 마음 사이 조그만 홈에 심어 놓았을 텐데. 물을 주고 말을 걸어 살피며 끝끝내 꽃이 피도록. 혀 끝을 감싸던 단어를 구체화해 입 밖으로 밀어냈다. 너를 그릴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난 널 그리며 살아갈 거라고. 



-



아무튼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케치북과 4B 연필을 사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살피고 담아 손 끝에서 굴려 그렸다. 너는 내 하루의 맨 마지막 그림이 되어주었다. 자세가 곧아 선이 반듯해 그리기 좋은 옆모습은 그릴수록 새로웠다. 너는 짧으면 20분, 길면 한 시간 넘는 시간 동안 그대로 머물러주었다. 네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하루에 한 장 씩.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 네 모습이 담긴 스케치북은 쌓이고 쌓여서, 베이지 않았다면 자랐을 한 그루 나무의 키처럼 갈수록 높아졌다. 그건 내 미대 입시 합격의 근간이기도 했고, 너에 대한 마음의 물꼬를 틔워준 가교이기도 했으며, 또. 우리가 더 이상 함께하지 않기로 한 후 나를 대신해 몸을 불살라준 처절한 해소이기도 했다.



"회사 근처면 놀러와."

"커피 달다."

"단 거 좋아하잖아."

"......"

"그래서 달게..."

"너,"



널 멈췄다. 파묻었던 예전은 깊게 묻지도 못했는지 툭 채이는 발길에도 몸을 드러낸다. 



"고마워."

"......"

"말하고 나니까 나도 뜨악하다."

"......"

"늘 습관이었으니까."



차라리 네가 동요했으면 좋았을까. 혼란스러워하고 거기에 화까지 더해서 내줬더라면. 난 이 시점에서 좀 괜찮았을까. 넌 내게 습관이었으니까. 서로에 대해 말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이었으니까. 그래, 근데. 그래서 뭐? 흐르는 일상을 얘기하는 듯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 속에 머무르는 널 보며 평형을 이루던 마음이 비딱하게 기울어졌다. 잘 정돈되어있던 마음들이 우르르 소리를 내며 기울어진 곳 가장 낮은 곳으로 쏟아져 내렸다. 역시 난 한 뼘도 자라지 못했어. 내 세계는 지금껏 해온 온갖 노력이 무색하리만치 유약했다. 세계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 목이 타 커피를 들이켰다. 오만상이 찌푸려질 만큼 썼다. 아주 썼다. 뭐 이런 게 다 있을 정도로. 



"가볼게."

 "......"



가방을 움켜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말없이 날 물끄러미 올려보는 네 시선은,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시간이 다 돼서, 뒤에 약속 있거든, 친구. 갑자기 생긴 어줍잖은 계획을 늘어놓았다. 카페 문을 빠져나오는 내 뒤로 또 놀러와, 말간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기울어진 게 아니라 그냥 툭 끊어져 저 아래로 추락해버린 거였음을. 카페 안에서도 볼 수 없을만큼 멀리 걸어, 아니 도망쳐 나온 거리 한 복판에 서서. 할 수 있는 건 가방 속 스케치북을 꺼내 펼쳐보는 일이었다. 펄럭펄럭 급한 손길로 넘어가는 종이에선 하도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해 배여버린 연필심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거기엔 내가 아는 모든 모습의 네가, 깨끗한 니트에 청바지를 입었던 마지막 모습 이전 모두의 네가 그려져 있었다. 



난 여전히 너를 그리며 살고 있었다. 






<Tall size, Lethe: 톨 사이즈 레테 01> 








-

담담한 재회를 쓰고 싶었다. 

술렁이는 재회를 쓰고 싶기도 했다. 


시간이 더해졌기에 이미 어느 한 쪽에겐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지 않은, 

그로 인해 어느 한 쪽은 시간이 더해졌어도 더더욱 더욱 심란해지는. 

행복한 것도 타이밍이지만 슬픈 것도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이야기가 좀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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