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리안 유학생의 런던일지 #1
2019 / 05 / 03 FRI
벌써 런던에서 유학을 시작한지 4개월 째다. 처음 Term 1은 일상생활을 구축하고 학교에 적응하느라 여념 없었고 잠깐 봄방학을 보내고 Term 2를 위해 다시 돌아온 런던은 처음보다 익숙했고 또 새롭게 낯설다. 튜브에서 엘티이가 터지지 않는다거나 버스에서 콜드 파스타로 세미 식사를 하는 장면은 적당히 익숙해졌지만.
요즘엔 이 나라에서 사람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런던만 특별히 그런진 모르겠는데 여기에선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서로 의지하고 기댄다.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서로 만나면 두 팔 벌려 환영하고 볼에 키스를 하고 다정히 등이나 팔을 쓰다듬으며 잘 지냈냐고 묻는다. 처음엔 다들 연인이구나 했지만 좀 지나고 보니 딱히 연인이 아니어도 서로 그런다. 남녀노소 모두 인사가 그런 식이다. 오늘 하루 어땠어? 좋은 하루였어? How everything is going? It is a good day? 처음엔 저게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걸까, 왜 이렇게 가식적이지, 체면 차리는 나라구나, 괜한 마음으로 빈정거렸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질문을 당하고 대답을 해보고 진지하게 듣는 눈을 바라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어보니 이게 진심인걸 알게 됐다. 물론 사람마다 진심의 깊이 차이는 있겠지만 대다수가 빈 말이 아니다.
혼란스러워서 별 게 다 손에 안 잡히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다정함이 독이 되는 환경에서 살아왔다는걸, 런던에서 깨달았다. 타지에서 타자가 되어보니 한국에서의 내 모습을 인지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낯선 사람이 아니라 나의 친구에게, 가족에게, 나아가 연인에게 어느 정도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그걸 어느 정도 감추면서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런던에서 너무 정반대인 상황을 쌩으로 마주하니 어떻게 내면을 조정해야할 지 모르겠다. 제일 아연실색하게 되는 지점은, 분명 내가 내면적인 부분이나 타인을 대하는 감정적인 부분이 현재 이렇게 굳어진 이유가 있을 텐데 거기에 시간이 더해지고 새로운 경험이 더해지니까 원형의 감정이 기억도 안 나도록 희미해져버렸단 점이다.
내가 이 문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바뀌지 않는 이상 몸은 적응하되 심리적으로는 계속 떠도는 이방인으로 남을 텐데, 나한테 바뀌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 똘똘 뭉쳤던 나름의 소신과 강단이 이제 와서는 아집과 고집이었단 사실을 인지하는 일련의 과정이 혼란스럽고 버겁다. 분명 오늘보다 나중의 미래가, 지금의 내게 변화를 요구하는 사인을 보내고 있단 것도 알지만 정말 변화라는게 쉬운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