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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양세계 Feb 26. 2023

우주충돌

희윤의 아침은 고요하게 시작된다.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물같이 잔잔한 일상이 흘러간다. 매일 아침 알람 없이 일어난 희윤은 의식을 준비하는 사제처럼 경건하게 당근의 껍질을 벗기고 채칼로 잘게 썰어서 라페로 만든다. 따뜻한 바게트에 차가운 당근 라페를 올려 한입 베어 물면 짭조름하면서 상큼한 당근의 맛이 고소한 빵의 이불을 덮고 들어와 입안 가득 퍼진다. 조용한 식탁에 바게트가 와삭와삭 부서지는 소리만이 울린다. 고요한 자기만의 우주, 그것이 희윤의 방이다.




평소 밖에 잘 나가지 않는 희윤이었지만 오늘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특별히 외출을 감행했다. 희윤은 모두가 일하는 시간에 쬐는 자유의 햇살을 만끽하며 평일 대낮의 한적한 번화가를 걸었다. 친구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향수 가게의 문을 열자 경쾌한 종소리가 딸랑하고 울렸다. 가게 안에 놓여있는 나뭇결이 살아있는 탁자가 마치 누군가의 서재 같은 편안한 느낌을 줬다. 앞치마를 두른 조향사가 가게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어서 오세요. 어떤 향을 찾으세요?”

“아, 친구한테 선물하려고 하는데 추천해 주세요.”

희윤은 흘긋 조향사를 쳐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 그는 눈썹이 반듯하다는 인상이었다. 숱이 고른 아치형 눈썹이 서글서글한 눈매 위를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 향은 이번에 나온 신제품인데 우주를 모티브로 제작된 향이에요. 한번 시향 해보시겠어요?”

그는 솜씨 좋게 시향지에 향수를 뿌려서 희윤에게 건넸다. 머스크가 섞인 우디향이 코로 확 스며들어왔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담한 공간에 가득 찬 짙은 향기 때문인지, 눈썹이 취향인 사람 앞에서 급속히 피어오르는 친해지고 싶은 열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새로운 우주를 마주치는 사건이다. 희윤은 새로운 우주를 탐험하는 일을 좋아한다. 저마다 천장만큼의 우주를 갖는 것이라면 희윤의 우주는 어떤 모양일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가만히 누워 까만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상상을 한다. 눈을 감고 어둠 속을 떠다니다 보면 살면서 만나게 되는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희윤은 그들이 내뿜는 야광별을 하나둘 주워서 방안의 우주를 꾸며왔다. 살면서 주워 온 조금씩 다른 모양의 별들이 천장에서 고요히 연두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포장해 드릴까요? 각인도 필요하신가요?”

“네, 둘 다 부탁드려요.”

희윤은 흘긋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고작 눈썹만으로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 있는 걸까? 희윤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슬며시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눈썹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정빈은 희윤이 학창 시절 제일 좋아했던 친구였다. 정빈의 눈썹은 햇볕에 식빵을 굽는 고양이의 보송한 털같이 섬세했고 결을 따라 정갈히 누운 가느다란 그 눈썹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마음이 간지러워졌다. 자주 독창적이었고 때때로 시니컬했던 정빈은 헤드폰을 쓰고 항상 펑크나 얼터너티브 록 같은 음악을 듣고 있었다. 자주 이어폰으로 정빈의 음악을 나눠 들었던 희윤의 플레이리스트는 정빈이 좋아하는 음악들로 점점 채워졌다.



고등학생일 때 희윤은 학교 독서실에서 밤늦게 공부하다가 졸릴 때면 정빈과 함께 자판기로 갔다. 정빈이 코코아와 커피를 반씩 섞어서 만들어 준 ‘커코아’는 잠을 깨는데 특효약이었다. 그날도 달콤하고 씁쓸한 ‘커코아’를 마시며 학교 독서실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늦여름의 별자리는 무수히 빛났고 잔디밭은 풀벌레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저건 무슨 별자리일까? ”

“잠시만.”

눈을 찌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정빈을 보며 희윤은 문득 궁금해졌다. 저 우주에선 어떤 별이 뜨는 걸까. 눈썹처럼 살랑이는 풀밭에 누워서 어떤 별자리가 뜨는지 탐구하고 싶었다.

“저건 백조자리야.”

“오, 그러고 보니 정말 백조처럼 생겼다.”

둘은 말없이 벤치에 앉아서 ‘커코아’를 홀짝였다. 풀벌레 소리가 정적을 뚫고 점점 크게 울렸다.

“넌 나중에 뭐 할거야? 대학 들어가고 나서 말이야.”

“난 나중에 펑크밴드 만들 거야. 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래.”

“그럼 네가 공연할 때 내가 첫 관객 할게.”

정빈은 말없이 눈썹을 만지며 미소만 지었다. 그건 할 말이 없거나 곤란할 때 나오는 정빈의 오랜 버릇이었다. 희윤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 정빈은 한순간에 예전 친구들과 모두 연락을 끊었다. 소문에 의하면 자퇴했다고도 하고 재수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아무도 정빈과 연락이 되지 않아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정빈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고 그렇게 희윤의 인생에서 정빈은 완전히 사라졌다.

두 궤도의 겹침은 혜성 같은 찰나의 스침일까, 위성같이 계속될 공전일까. 정빈은 희윤에게 별똥별 같은 사람이었다. 잠시 반짝이다가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존재. 희윤은 정빈의 눈썹의 긴 아치와 우주처럼 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떠올렸다.



희윤은 당근 케이크로 유명한 근처 카페로 들어가 오늘 약속의 주인공을 기다렸다. 일찍 퇴근하고 온 채은은 피곤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고 들뜬 두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너 살아있었네?”

아메리카노를 수혈하듯 쭉 빨아 마신 채은은 희윤의 고등학교 친구이다. 채은의 페디큐어가 작고 하얀 발에서 반짝 빛났다. 채은은 발끝까지도 예쁜 요정 같은 사람이었고 그런 채은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몽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희윤은 채은의 가냘파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강단 있는 성격과 시원한 유머 감각을 좋아했다.

"이거 선물이야. 너 다음 주에 생일이잖아."

"뭐야,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 고마워."

채은은 기분 좋게 선물을 받아 들고 당근케이크를 퍼먹으면서 말을 꺼냈다.

"참 그러고 보니 그거 알아? 우리랑 같은 학교 다녔던 정빈이 있잖아. 걔 아예 이민 간 거 같더라.”

"뭐?"

너무 오랜만에 들은 이름에 희윤은 잠시 멍해졌다. 멀어지더라도 다른 사람의 삶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궤도를 돌면서 계속 이어지지만 너무 오랜만에 소식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갑자기 깨달아서 놀라게 된다.

“너 걔랑 계속 연락했었어? 애들이랑 전부 연락 끊은 줄 알았는데.”

“아니 안 했었지! 그런데 얼마 전에 추천 친구에 갑자기 뜨길래 들어가 보니까 걔더라고. 신기하지? 피드 보니까 거기서 밴드도 만들고 재밌게 잘 사나 봐."

채은은 희윤에게 정빈의 SNS 사진을 보여줬다. 커트 코베인과 비슷한 선글라스를 쓰고 일렉기타를 맨 채 브이하고 있는 정빈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희윤이 아는 정빈은 SNS 같은 건 전혀 안 할 것 같은 이미지였던 터라 그 계정의 존재가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피드에 있는 사람은 정빈의 생김새를 했지만 희윤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좋아했던 부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낯선 정빈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결국 꿈을 이뤘구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정빈이 너무 잘살고 있어서 희윤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채은이 떠나고 난 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희윤은 씩씩하게 유리컵에 담긴 물을 단숨에 비웠고 탁 소리를 내며 컵을 내려놓은 뒤 헤드폰을 끼고 밖으로 나왔다. 하루의 마무리로 밤의 양재천을 달리는 희윤의 다리는 가뿐했다. 강가에 늘어선 버드나무들이 짙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희윤은 문득 자신에게 정빈의 조각들이 아직 곳곳에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윤의 궤도에서는 영영 사라졌을지 몰라도 정빈이 줬던 야광별들은 남아서 희윤의 우주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희윤은 정빈과 함께 듣던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한 뒤 힘차게 달렸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쳐 갔고 헤드폰에서는 Post Malone의 Circles가 흘러나온다. 희윤은 달리면서 강물을 바라봤다. 흐르면서 계속 모양이 변하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강물에서 주워 올린 별들로 장식한 나의 우주도 언젠가 예쁘게 빛나고 있겠지. 까만 강물에 비친 불빛이 별처럼 영롱하게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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