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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양 May 03. 2024

연락과 애정의 상관관계



오랜만에 일본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숏폼 콘텐츠를 보다가 외국에 사는 친구에게 소포를 보내는 영상에서 내 생각이 났다고, 먹고 싶은 일본 과자가 있냐고 물었다.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는데다 웬만하면 한국에서도 거의 구할 수 있을 테지만, 선물을 고르고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 자체가 새삼스럽다는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녀의 취향을 담아 보내기로 했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건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일본에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니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퍼지고 있었다. 그 뒤로는 내가 곧장 취업을 하게 되면서 이전처럼 느긋하게 일상을 묻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지 오래였다.



서로 안부를 묻지 못해 미안해하거나 서운해하지는 않았다. 처음 관계 맺은 몇 년 전과는 달리 각자의 생활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고, 가끔은 아기 울음소리나 회사 메신저 알람에 지쳐 오랜만에 받은 문자에도 한참이나 답장을 미루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런 서로의 고단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 기이한 인연이 꽤 된다. 가늘고 길지만 이상하게 깊은 관계 말이다. 중학생 때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팬 카페에서 두 살이 많은 언니를 알게 됐다. (당시만 해도 네이버, 다음 같은 포털 팬카페가 대세였다.) 우리는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고 전화도 딱 한 번만 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녀는 내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콕 박혀 있었는데, 추종하던 오빠들 외에 학창 시절 따돌림을 당했던 공통의 경험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여섯, 일곱쯤 되었던 친구들 무리에 있다가 갑작스레 외톨이가 되었다. 지금이야 인생 대부분은 혼자 알아서 잘 헤쳐 나가야 하며, 인간관계란 지극히 소쇄한 것으로 인해 어긋날 수 있고, 그렇기에 가끔은 손절이란 단도를 먼저 꺼내드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알지만, 중학생 사춘기 소녀에게 친구란 그 세상의 축이며 그들과의 사소한 오해나 말다툼은 세상을 흔드는 자연재해쯤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폭우와 폭염과 쓰나미가 지나간 뒤 그 소녀의 세상이 폐허가 되었을 무렵,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언니의 고향은 울산이었다. 1년 뒤, 언니는 다른 도시에 있었다. 왕따를 당해 전학을 가게 된 것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때리고 괴롭힌 가해자의 고개는 빳빳하다. 상처 입고 속앓이 하는 피해자가 제 발로 지옥에서 멀어질 방법을 찾아야 하고, 때때로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희생하며 떠나야 한다. 언니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적응이 어렵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흘러 들어갔는지 전학 사유가 왕따라는 게 퍼지면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다고 했다.



매일같이 들락거리던 팬카페엔 일곱 시를 조금 넘기면 접속자 리스트에서 언니의 닉네임을 찾을 수 있었고, 나는 언니의 오늘을 물었다. 어제와 실상 다른 게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면, 전날 방송에 나왔던 따끈따끈한 오빠들의 영상을 언니와 나눠보았다. 잠시나마 언니의 시선을 현실에서 거두어 내는 것, 그 정도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몇 년 전, 언니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핸드폰을 바꾸었는데 메신저에 내 이름이 뜨길래 한 번 연락을 넣어봤다고 했다. 연락처를 한 번도 바꾸지 않은 덕에 거진 10년 만에 나의 ‘온라인 언니’와 채팅을 하게 된 것이다. 언니는 결혼을 했다. 그때와 또 다른 도시에 살고 있다. 둘째 아이가 곧 태어날 예정이었다.






어 선생님으로 일하며 만났던 대학원생 선생님도 그런 인연 중 하나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가치관이 흐리고 선입견은 깔린 물렁거리는 사람이었다. 고작 스물두 살 철없던 나에게 스물일곱 대학원생 선생님은 배움도 풍부하고, 칵테일 한 잔만 손에 쥐면 풍미 깊은 글을 뚝딱뚝딱 지어내는 멋진 예술가였다.




언젠가 거리를 지나며 진한 화장을 한 여성을 보고 ‘화장을 왜 저렇게 진하게 하는 걸까, 별로다’하며 입 밖으로 평가를 뱉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평소와 같은 점잖은 목소리로, 그리고 아주 따듯한 말투로 내게 경고했다. 화장 진하게 하면 어때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알고 저렇게 표현하는 거 멋지지 않아요? 




머리가 댕, 하고 울렸다. 내 눈에 ‘적당’ 하지 않다고 해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되는 법이거늘. 그 당시만 해도 나는 타인과 자신의 겉보기에 시선을 많이 두는 사람이었고, 부끄럽게도 그런 생각을 그때 난생 처음으로 해본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좁디좁은 내 세상에만 갇힌 생활을 조금은 빨리 청산할 수 있었다. 스물둘이나 되어서야 한 발자국 나아간 세상을 경험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자주 술을  사주었다. 실연에 힘들어할 땐 매주 나를 문래동으로 불렀다. 소박하지만 멋들어진 이자카야에서 좋은 음식이며 좋은 사람들을 구경시키고, 목이 타들어가는 위스키를 경험시켰다. 그렇게 취해서 화장실 계단에 주저앉아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엉엉 울고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 어깨를 토닥여주다가도 다시는 이런 짓 말라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내 기억 속에서 선생님은 자주 아프곤 했는데, 그 이유로 일을 그만두고는 한참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굳이 잘 지내냐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선생님의 심정과 같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때때로 나에 대한 어떤 소식도 새어 나가지 않았으면 싶고, 그렇게 일정 기간 동안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고 싶은 기분을 알기 때문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바뀌는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꼭꼭 잘 숨어서 잘 쉬고 계시는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일 년 전 선생님에게 연락을 받았다. 잘 지냈느냐고, 그동안 많이 아파서 회복하는 데 온 힘을 쓰느라 주변을 챙기지 못했다고. 돌아다닐만큼 기운 차려서 내게 먼저 연락했다고. 




아주 오랜만에 그녀와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돈 없고 힘없고 줏대 없던 대학생은 여전히 돈 없고 힘도 없지만 줏대는 조금 생긴 20대 중반이 되었고, 드디어 지난날의 신세를 아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사회초년생이었다. 대학원생이었던 선생님도 알바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을 텐데, 어린 동생까지 밥 먹이고 술 먹이고 경험까지 떠먹이느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얼마나 고생했을지. 당시 그 어린 동생은 제 감정과 현실에 시근대느라 그것까지 생각할 깜냥은 못 되는 그렇게 어린것이었다. 그런 미안함을 내비쳤더니 선생님이 그렇게 답했다.




“나중에 선생님 같은 동생이 나타나면 그때 똑같이 해줘요. 그게 갚는 거야.”





노력은 했는데 선생님처럼 좋은 언니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앞으로도 그녀와 만나면 술값은 내 몫이다, 당연히. 


나의 애정은 연락의 빈도와 비례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기이하고 진귀한 인연들에게 그동안 참 무심하고 투박했던 건 아닌가 후회한다. 이젠 손바닥만 한 월급도 들어오지 않는 백수이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얼마를 더 살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에 가늘고 길고 깊게 연을 그어준 그녀들에게 보답하는 한 해가 되어야겠다고, 적어도 먼저 안부를 묻는 한 해를 보내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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