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굴었다. 세상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한데도. 더 주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마주한 이별에 밑바닥까지 퍼내지 못한 감정이 향할 곳을 잃고 고여갔다. 스멀스멀 지독한 냄새가 나더니 곧 거기서 눅눅한 곰팡이가 피었다. 그때 쓴 글을 읽고 있으면 온몸을 문질러 닦아도 쾌쾌하게 박혀있던 곰팡이 냄새가 떠오른다.
내 생활로 돌아가는데 1년이 걸렸다. 고작 8개월의 연애. 그 끝에 남은 건 자존감 한 톨 남지 않은 나. 내 속까지 비워서 상대를 채우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그때는 몰랐다. 내 속이 먼저 차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실연에서 이어진 관계에 대한 회의는 나를 더욱 관계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나는 누군가 필요했다. 그 사람을 대신해 지켜볼 다른 존재가 필요했다. 내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아 줄, 그래서 나 역시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존재. 내가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절대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
그렇게 내 방에 가녀린 고양이와 작은 새싹이 찾아왔다.
좁은 방과 서늘한 공기. 자랑할만한 건 빌린 아침 햇살 밖에 없는 곳에서 고작 천 원짜리 씨앗을 흙 속에 묻으며 염치도 없이 바랐다. 네가 자라주면, 자라만 준다면, 내가 바라볼 대상이 되어준다면 하고.
해바라기 씨앗은 삼일 만에 싹을 띄웠고, 성격 급한 가녀린 초록대를 보며 영판 내 가족이다하며 아주 오랜만에 웃었다. 성격 급한 사람 하나, 고양이 하나, 새싹 하나.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두 존재의 위로가 얼마나 크고 충만했는지. 공평하게 아침 햇살을 나눠 맞을 때 행복이 진하게 차오름을 느꼈다. 까실하게 잘 마른 수건의 포근한 냄새가 다시 내 삶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얀 창틀,
창가에 놓인 화분들,
햇살을 받고 빛나는 초록잎들.
창틀에 올라 서 화분을 들여다보는 나의 고양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들.
내 사랑을 먹고 크는 것들.
나는 받지 못했지만 너희에겐 닳도록 줄 수 있어, 하고 중얼거리던 날들. 잠에서 깨 울음을 토해내던 날들 속에서도 싹이 트기만을 기다리던 게,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초록빛을 바라보던 게, 작은 네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 걸 지켜보던 게 내겐 큰 위로였다.
창틀 위에 있던 새싹은 바닥에 내려두어도 가슴께에 닿을 만큼 훌쩍 자랐다. 두꺼워진 줄기, 어느 명화 속에서 본 것 같은 샛노란 꽃잎. 그 가운데 설익은 씨앗을 품고 너는 여름을 보냈다. 나는 그때마다 큰 화분과 그 안에 채울 흙을 사들이기에 바빴다. 그렇게 세 번째 분갈이를 마쳤을 때 즈음, 겨울이 찾아왔다.
이제 자랑거리가 하나도 남지 않은 내 자취방에서, 해바라기는 생기를 잃고 바스락 소리를 내며 말라갔다. 내 안에 남은 찌꺼기들을 대신 받아먹고 나 대신 지고 있는 걸까. 이파리의 절반이 검게 변해 축 늘어지자 결국 가위로 줄기를 잘라내고 화분을 정리했다. 나를 지켜주던 초록대를 잘라내는데 마음이 아팠다. 익지 못한 씨앗이 서글펐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라나던 푸른빛들이 얼마나 나를 가슴 뛰게 했는지 잊지 못한다.
그 뒤로 나는 매년 봄이 되면 해바라기를 심는다. 내 고양이와 바라기씨와 내가 만난 날을 축하하는 작은 행사인 셈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 없던 내가 해바라기를 좋아하게 된 것도 4년째. 아마 다음 해, 또 그다음 해에도 봄이 되면 나는 또 흙을 덮고, 씨앗을 심으며, 해바라기를 기다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