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하양 Nov 18. 2021

뜨개질과 연애

다락방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10월의 어느 날, 하룻밤 새 겨울이 들이닥쳐서 서둘러 다락방을 정돈했다. 그러다 오래된 상자 속 뜨개질 거리를 발견했다. 지난날 그에게 선물하려던 목도리였다.





예상치 못한 과거를 마주하게 된 나는 잠시 고민하다 가까이서 그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첫눈 오는 날만 고대하며 밤마다 만지작거렸을 짜임들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주인을 잃은 물건을 거두는 것도 퍽 난처한 일이었다. 나는 실타래를 남김없이 풀어냈다. 갈기갈기 아프게 갈라진 실가닥이, 결마다 깊게도 새겨진 주름이 보인다. 완벽하게 짜내기 위해 수십 번 풀어내고 수십 번 같은 자리를 맴돈 흔적이었다. 더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처럼 엉망이 된 털실을 보니 지난날 나를 보는 듯했다.










4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완벽한 이상형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무난하고 재미없는 나와 달리 그에게선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와 함께라면 나 역시 특별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등바등 그와의 관계를 이어가려 애썼고, 그와 꼭 맞는 완벽한 파트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먹고, 즐겁지 않은 취미 생활을 공유했다. 괴로운 줄도 몰랐다. 몇 번을 다듬고 다듬어서 보이는 모습일지라도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게 비록 내가 아닐지라도.






그는 나를 사랑했으나 나는 늘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가 사랑하는 건 진짜 내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첫 줄에서부터 잘못 매어진 가닥을 보았으면서 눈 앞의 현실을 내일로, 다음 날로, 또 그 다음 날로 미루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우리는 완벽한 한 쌍인 척하면서.






그 사람과의 연애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별 후, 나는 그와 함께 했던 기간만큼 홀로 앓았다. 일상을 소화하는 것이 버거워 주저앉았고, 극한으로 치닫는 감정에 스스로에게 지치는 날이 허다했다. 오롯이 혼자 남은 밤이면 미련, 그리움, 서러움 같은 것들이 과거의 장면을 수십 번도 넘 구현해냈다. 그렇게 허상이 새벽 내 나를 들쑤시고 가버리는 날이면 나는 어찌할 수 없이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울음을 토해냈다.

 




그 시절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그 감정의 실체는 공허함이었다. 알 수 없는 공허함. 그저 상대와 알지 못했던, 최초의 관계로 돌아갔을 뿐인데 어쩐지 사람 하나가 아닌 그 이상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너무 좋아했던 상대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랜 기간 고통 속에 머물렀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나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설프고 평범했다. 그러나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바늘을 잡았다. 내가 만들어내는 엉성한 짜임들을 인정하지 않고 기어코 몇 번씩 감았다 풀며 모양을 갖추었다. 이상이 되기 위해서, 그에게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러나 결국 뜨개질은 감각의 문제라서, 어느 지점엔 힘이 들어가고 또 어느 지점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공장의 기계가 아닌 이상 완벽하게 갖춰진 짜임이라는 건 허상이다. 촘촘하면 촘촘한 대로, 느슨하면 느슨한 대로, 내가 만들어낸 짜임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어야 했다. 연애도 뜨개질과 같다는 걸 그때의 난 알지 못했다.





스스로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8개월 후의 이야기.

나는 아픈 연애라 칭했던 이 경험을 실패한 연애라고 칭했다.



그 사람을 열렬히 사랑했으나 나의 연애는 실패였다. 연애의 기간이 짧아서가 아니었다. 나를 지키지 못한 연애였기 때문이다. 상대를 아끼는 만큼 나를 아꼈어야 했다.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만큼 나를 이해하려 노력했어야 했다. 상대를 존중했던 만큼 나를 존중했어야 했다. 나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나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연애가 끝나자 나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 잃어버렸다. 그렇게 연애 후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고 더는 평범하지도 않았다.





털뭉치와 완성하지 못한 목도리 끝이 이어진 실을 따라갔다. 갈라지지 않은 곳, 주름이 접히지 않은 곳까지 털실을 늘어뜨리고 그 지점에서 실을 끊어냈다. 그리고 그간 꽁꽁 매여있던 목도리의 짜임도 풀어냈다. 꽤 많은 양이었다. 쓰레기봉투를 들고와 곱슬대는 실가닥을 주워 담았다. 이제 다시 멀끔한 나머지 실가닥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촘촘하면 촘촘한 대로, 느슨하면 느슨한 대로, 그냥 나답게, 나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