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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양 Dec 31. 2021

사소하지만 강력한 어떤 순간

올해 가장 행복했던


퇴근이 늦었다.

 


아침 일찍부터 수출 포장 업체와 공장에서 설비들을 내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공장의 소음에 귀가 먹먹했고,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 한 켠에 몸을 들이니 남은 생기마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서 집에 닿기만을 바라며 서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좋아하는 먹방 유투버의 생방송 알림이었다.


먹는 모습보다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좋아 습관적으로 그녀의 영상을 틀어 놓는 편이었다. 핸드폰은 다시 주머니 속에 넣어둔 채 이어폰으로 그녀의 여행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그날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며, 그날 그 장면이 떠올랐는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ㅡ... 이동하는데 친구가 차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 살 냄새야~했는데, 한 20초 넘게 정적만 이어지다가 셋 다 빵 터진 거예요. 이렇게 말로 하니까 안 웃긴데 진짜 셋 다 엄청 웃었거든요. 그냥 별 거 아닌 일인데 그 순간 그 상황이 너무 재밌어가지고 올해 제일 많이 웃은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진짜 행복했어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근래 내 생활을 돌이켜보았는데, 행복한 순간이 있었나 싶었다. 터덜터덜, 지하철 역에서 빠져나오는데 걸을 때마다 부딪치는 바람에 두피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다. 머리는 그리 차가운데, 어쩐지 속은 미적지근하고 답답했다.











회사에선 밀도 높은 일들이 쏟아졌다. 일정이 자주 바뀌었고 빠르지만 완벽하게 끝마쳐야 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특히 저번 달부터 엔지니어들이 출장을 가있는 해외 공장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연달아 생기는 바람에 메일이며 각종 메신저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댔다.


 




그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느라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인지, 얼마 전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적적했을 고양이와 긴 인사를 나누고, 저녁밥을 챙겨주고, 감자와 맛동산(고양이의 소변, 대변을 그리 부른다)을 치우며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였는데, 그 다음 기억이 남아있질 않았다. 술을 마셔도 필름이 끊기거나 하는 편이 아닌데 맨 정신에 블랙아웃을 경험하다니...!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으나, 눈을 떴을 땐 방바닥 위에 누워있었다. 눈이 너무 따갑고 뻑뻑했는데, 빠질듯한 안구의 통증보다도 알람 소리에 깨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뇌리에 박혀 들었다. 헉-하고 황급히 핸드폰 액정을 두드렸다. 시간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 몇 초간 얼마나 심장이 쿵쾅대던지. 뿌연 시야 사이로 시간을 확인했다. 04:06 AM, 다행히 출근 시간을 넘기진 않았다.






옆으로 누워 잔 탓에 딱딱하게 굳은 왼쪽 어깨라던지, 몸속까지 들어찬 찬기라던지, 그런 것들이 뒤늦게 느껴졌다. 비척대면서 거울 앞으로 가서 장장 스무 시간이 넘도록 렌즈에게 수분을 빼앗긴 안구부터 구해주었다. 술에 진탕 취해도 클렌징이며, 샤워며, 렌즈 빼기도 절대 잊지 않고, 뽀송한 새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에야 잠드는 사람인데... 취기보다 지독한 곤기였다.






방을 둘러보니 정리하지 못한 가방, 뜯지 않은 채 현관에 옮겨놓기만 한 택배 상자, 미처 버리지 못한 꽉꽉 들어찬 쓰레기봉투, 그리고 방바닥에 잘게 찢긴 두루마리 휴지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루, 이틀 돌보지 못한 집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 사냥 놀이를 하지 못해 혼자서라도 에너지를 풀어보려던 간밤의 아이의 흔적이 내 속을 더 착잡하게 했다. 결국 내가 부족한 탓이라 미안함이 차오르면서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일 기력이 없어서 어서 주말이 오기만 바랄 뿐이었다.


 









정류장에 다다라서도 또 한참을 서있었다. 종점이라서 그런지, 버스 배차 간격이 너무 길었다. 딱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데 어둡고 길이 험해 걸어갈 수도 없었다. 운도 없어요, 정말.


그래, 요즘 난 행복과 멀어져 있었고 그런 나로 인해 아이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주변은 새까만 어둠, 어쩐지 처연한 정류장 불빛, 그 풍경 속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었다. 오늘도 집을 정돈하고 고양이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은 물 건너 가버렸다. 한숨이 하얗게 퍼져나갔다.  






십오 분 정도 후, 나는 집 현관 앞에 섰다. 회사에서 나와 집까지 오는 내내, 얼마나 얼굴의 움직임이 없었는지 얼굴 근육이 조금 아플 정도였다. 아이는 제 때 오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면서 자고 있으려나. 열쇠를 끼워 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고양이가 입을 오물거리며 뛰쳐나왔다. 순간, 마중을 나온 아이의 입에서 무언가 툭-하고 떨어졌다. 뭐지-? 잠시 멈칫하다 나는 곧 와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문을 닫지도 못한 채로 한참을 소리 내서 웃다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사료 알갱이, 고작 사료 한 알이었다.


늦어지는 엄마의 귀가에 녀석은 미리 저녁을 먹고 있던 모양인데,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사료를 마저 씹지도 못한 채 호다닥- 현관 앞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참으로 열렬한 환대에 아이를 품에 안고 들어와서도 한참 배실댔다. 내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녀석은 방바닥에서 뒹굴거리며 애옹 애옹- 수다스러운 입을 멈출 줄 몰랐다. 분명 문을 열기 전까지는 기분도 체력도 땅에 눌어붙은 듯 했는데 단 1초만에 내 속이 다시 초록빛 생기로 가득 차올랐다.





행복과 멀어져 있단 말은 취소해야겠다. 가장 큰 행복이 우리 집에 있었고, 그 덕분에 나도 영상 속 그녀처럼 시간이 지나서도 사료 한 알을 떠올리며 그 때 참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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