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안은 아니었던 터라 어릴 적 나에겐 온전한 내 것이랄 게 없었다. 한 때 언니 것이었던 물건,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언니가 입었던 옷, 언니가 신었던 신발, 언니가 썼던 가방, 언니가 쓰던 핸드폰….
심지어 조금 큰 뒤로는 내 방을 가져본 적도 없다.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은 언니는 등장만으로 집 안 분위기를 남극으로 만들었고, 부모님조차 숨 막혀하는 식사 자리에서 나도 방을 갖고 싶다고, 감히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내 잠자리는 부모님 침대 옆 방바닥이었다.
언니와 나는 가운데 이름에 돌림자를 써서 마지막 글자만 "희"와 "현"으로 다르다. 그 덕에 언니가 쓰다 졸업한, 손때 탄, 그러나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들은 아주 감쪽같이 내 것이 되었다. 물건 위 언니 이름을 덮을 필요도 없이 "희"자에다가 작대기 세 개만 그으면 내 이름이 됐으니까. 니은 자의 길이가 비정상적으로 긴 물건들은 전부 그렇게 내 것이 됐던 거였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서고부터 언니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 같아 늘 억울했고 가끔은 나도 고집을 부렸다. 언니는 새 핸드폰이 나오면 그게 손에 들어올 때까지 까탈을 부렸으면서, 내 부탁은 들어주지 않는 부모님께 탄원서(!)를 써붙였을 땐,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나에게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다. (말이 좋아 까탈이지 사실 쓰고 싶은 표현은 따로 있다. 지ㄹ....ㅏ.....큼큼..)
더 억울했던 건, 언니와 내가 하. 필. 세 살 터울이라는 거다. 내가 입학을 하면 언니는 졸업을 해서 나는 교복마저 물려 입는 신세였다. 그 전까진 잘만 그랬으면서 왜 그리 억울했나 생각해보면, 친구들 교복과 내 교복의 디자인이 꽤나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리뉴얼되어 세련되고 핏도 예쁜 친구들의 교복에 비해, 내 건 어딘가 한 끗차이로 몸을 더 벙벙하게 보이게 하는 구형이었다. 한창 꾸미기 좋아하고 날씬해 보이고 싶은 사춘기 소녀에게 허리를 잡아주는 핏, 그 봉제선 하나 없는 게 얼마나 서러웠던지….
천적 같았던 혈육.
세 살이나 어린 내가 봐도 참 이기적인 사람.
10대 시절, 나에게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상하다. 제목은 분명 따뜻했는데, 내용은 그렇지 못하네.)
“가끔 우리 딸이 너무 불쌍해. 혼자 놀고 있으면 너무 외로워 보여.”
나보다 여섯 살이 많은 나의 베프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20대 중반이 된 나는 이렇게 답했다.
“하긴. 언니가 있으면 되게 좋은데.”
20대, 내게 언니는 오글거리는 갖가지 수식어의 주인공, 하나뿐인 소중한, 그런 사람이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지난날 어린 행동들을 본인 입으로 꺼내며 머쓱해하는 어른이 되었고, 가족보다 친구가 더 소중했던 시절을 지나 결국 돌아갈 구석은 가족이라는 걸 깨달은 후였다.
무엇보다 이제 나에게 언니는 그리고 언니에게 나는 서로의 친정집 같은 존재였다.
부모님은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하셨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내 인생에 엄마는 없었다. 참 많이 미웠는데. 혹여나 학생인 내게 불이익이 있을까 봐,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기로 했단다. 성인이 되어 그 말을 들으니, 더는 미워할 수도 없었다.
고등학생의 나는 언니에게 탐폰 사용법을물었고, 대학에갓 입학한 언니는 내 앞에서 함께 쇼핑할 엄마가 없다는 게 싫다며 울었다.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가 채워줄 수 없는 것이었다. 언니가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면서,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 되었던 건, 그날부터였을지도.
ㅡ인천가고프다..토일월쉬는데
글을 쓰고 있는데 마침 언니에게 문자가 왔다. 멀리 대한민국 땅 남쪽에 있는 언니는 시간이 나면 인천집에 올라와 자고 간다. 나도 있고 내 아들(고양이)도 있으니, 적적함을 달래러 먼 길을 건너온다. 며칠 전부터 인천에 오겠다고 했었는데, 수도권에 감염자가 늘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쉬워서 농담이나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