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된 딸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그곳에서 나오는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뭐 듣고 있어?"
"엄마, 오나까스이따는 배고프다는 뜻이야."
"너 설마 지금 일본어 공부하는 거야?!"
그렇다. 딸은 대유행에 발맞추어 일본의 캐릭터 전문 기업인 산리오의 시나모롤에 푹 빠져있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시나모롤로 꾸미고 싶다고 말할 정도이니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그런 딸이 첫 조카라서 그런지 딸을 마냥 예뻐하는 딸의 고모는 "OO야, 우리 비행기 타고 일본 가야지."라는 말을 뱉었고 굳이 일본에 가야 할 이유가 없는 엄마, 아빠의 속사정은 모른 채 딸은 그 한 마디에 신이 나서 시키지도 않은 일본어를 찾아 듣고 있었던 것이다.
4년 전 부르짖기 시작한 'NO JAPAN'은 온 데 간 데 없고 포켓몬 빵의 부활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은 캐릭터에 열광하고 있다. 아직 한글을 잘 모르는 아들은 가르쳐 준 적이 없는 '뮤'(포켓몬스터 캐릭터 중 '뮤츠'가 있다)를 자신 있게 읽고, 친구들이 자랑하듯 들고 다니는 띠부띠부실이 갖고 싶은 딸은 깜깜한 밤에 편의점에 나가 줄을 서겠다고 고집을 피운 적이 있다. 포켓몬 빵의 열기가 가라앉나 싶더니 바통 터치라도 하듯 산리오의 캐릭터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사십 평생 캐릭터를 좋아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뜨겁게 타오르는 이 용광로 같은 현실이 개탄스럽다. 고객 확보와 이윤 창출이 목적인 기업의 입장에서는 주저할 것 없이 용광로에 뛰어들겠지만 띠부띠부실만 확인하고 버려지는 빵들을 보면 화가 나고, 아이스크림과 도넛의 판매를 위해 캐릭터 굿즈(goods)로 소비자를 현혹시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사전예약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못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이 좋아하는 문제는 달랐다. 기꺼이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이번엔 또 뭔데?' 하는 심정으로 기웃거리게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다 쉽게 구매할 수 있다기에 산리오 캐릭터빵을 샀고 실내화가 작아졌다기에 시나모롤 실내화를 구매했다. 실내화를 신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행복해하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렇게 좋아한다고? 사주길 잘했네.' 생각하면서도 이제는 여기서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딸에게 엄마가 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를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이야기하며 엄마는 잘못을 해놓고 사과하지 않는 친구랑 계속 잘 지내기는 힘든데 일본도 그런 친구 같다며 빗대었다. 진짜 그랬냐며 화가 난다고 말하던 딸은 "그런데 엄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라며 캐릭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제 엄마가 사주는 시나모롤 제품은 갖게 될 일은 없겠지만 동네 절친한 이모로부터 시나모롤 손목시계와 머리빗을 생일 선물로 받았고 아이의 고모가 사전 예약에 성공한 시나모롤 미니 캐리백을 수령할 수 있는 날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은 믿고 있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시나모롤 가방을 선물해 달라고 빌고 있는 딸을 보며 이제 그만 산타의 존재를 까발릴까 싶다가도 딸의 취향을 존중해 일단은 눈 감아 보기로 한다. 음, 이왕 시작한 일본어는 계속 밀어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