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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집 Dec 01. 2021

우리

넷이 되었다

세상 예쁘고 귀한 것들 앞에는 '우리'가 붙는다. 우리 엄마, 우리 남편, 우리 강아지, 우리집.... 우리집에 막둥이 동생이 태어났을 때 아빠는 '우리'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우리집 막내딸이니까.... 우리가 어떠냐?" 

때는 1999년 세기말. 나는 당시 세기말 보다 암울한 고3 수험생이 되었고, 둘째는 언니 따라 공부한다며 독서실을 등록하고 로맨스, 판타지, 무협, 만화,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는 '독서'실 라이프를 실현 중이었다. 셋째는 십오 년째 이어 온 막내딸이라는 신분에 한 치의 의심도 품어본 적 없이.... 한 순간에 '언니'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렇게 넷째 딸 '우리'가 태어났다. 

처음 그녀의 존재를 느꼈던 건 '꽁치 통조림'이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꽁치 통조림 캔을 들고 다녔는데 부엌에서도, 텔레비전을 볼 때, 방에 들어갈 때에도 그 깡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치 휴대폰처럼. 그리고.... '카...악, 퉤!' 그 통 속에 침을 뱉었다. 입덧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비위가 상했다. 기다린 적도 바란 적도 없는 동생이 생기는 기분은 그렇게 생겨났다. 

당시에 나는 철이 좀 없었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고3 수험생이 된다는 게 스스로 엄청난 일처럼 느껴져서 갓 태어난 핏덩이 동생과 엄마가 그걸 빼앗아 갈까봐 조바심이 났다. 아기를 낳거나, 세상에 태어나는 일보다 몇 달 뒤 보게 될 수능시험에서 몇 점을 받고 어떤 대학을 갈 수 있느냐가 몇 십배는 더 중요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정말 그랬다.

새벽에 공부를 하다가 안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짜증스럽게 엠씨스퀘어를 귀에 꽂았다. 어쩌다 쉬는 주말에 엄마가 동생 좀 잠깐 봐달라고 하면 큰 인심 쓰듯 건네받으며 수험생 티를 팍팍 냈다. 왜 분유병도 자기 손으로 잡고 먹지 못하는지, 트림을 꼭 시켜줘야 하는지, 그렇게도 많은 똥을 싸 대는지 하찮고 하찮아 보였다. 그때의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시기에 있고, 그러니 주변인들이 모두 성심껏 떠받쳐 줘야 한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재수 없어.

그렇게 밀레니엄 학번이 되었다. 수험생에서 대학생으로의 신분 변화는 사실상 왕싸가지에 한심함 한 바가지 추가! 정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년 정도를 대딩으로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다. 엠티, 동아리, 미팅, 축제, 카페에서 죽치기, 술 마시기, 강의 째기, 염색, 노티카, 워커, 알바.... 

'별거 없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대학 생활이 시시하게 느껴질 때 즈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작은 꼬맹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갓 태어났을 때의 쭈글쭈글함과 빨간 피부는 어느새 뽀얗고 탱글탱글하게 여물어 있었다. '얘는.... 어떻게 이렇게 피부가 좋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볼을 집으면 동생이 까르르까르르 간지럽게 웃었다. 무엇보다 살 냄새가.... 핑 돌게 좋았다. 옷을 갈아 입히려고 벗겨 놓으면 동생이 구슬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와락 잡으면 폭신한 살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겨왔다. 나의 세븐 폰 바탕화면은 당장에 동생의 코 찡긋하며 웃는 얼굴로 채워졌다. 

동기들과 익숙한 술집, 카페 혹은 강의실에 앉아 맨날 하는 선배 얘기나 시험공부 하나도 안 한 척하는 얘기를 하는 게 하찮고 하찮게 느껴졌다. 슬며시 휴대폰을 열어 사진을 보며 '우리 우리나 보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 우리랑 베이비 모차르트 테이프 틀어놓고 춤추는 거 봐야지' 생각만 해도 좋았다. 동생이 세, 네 살이 되던 무렵부터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천장을 치고 오를 기세였다. 아빠의 퇴근 후 술자리도 이십 대의 세 언니들 캠퍼스 로망도 시시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복당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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