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 엄마와 아들, 할머니의 삼각관계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그 남자를 향한 사랑

by 헤일릴리

"누구 강생이지?" "할머니 강생이"


질문도 대답도 늘 한결같건만 끝없이 묻고 답을 들어야 하는 관계가 있다. 우리 집에서는 시어머니와 아들의 대화가 그러하다. 아들은 유난히 할머니를 잘 따른다. 그렇지 않아도 손자 사랑이 남다른 할머니의 손을 끌어다 뽀뽀까지 해대니 할머니의 몸과 마음은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큰 아이를 키우는 동안 어머니는 첫째가 딸이니 둘째는 아들이어야 하지 않겠냐며 내 의지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은연중에 내비치셨다. 그럴 때면 나는 콕 집어 아들을 바라시는 거냐 물었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그래야 너도 좋고 나도 좋지 않겠냐고 돌직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백화점에서 어머니가 사주시는 딸아이의 옷은 분홍이 아닌 노랑, 회색이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남아선호사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냐며 아이 아빠를 붙잡아다 열변을 토했지만 결국 며느리는 며느리의 도리를 다해야만 했다. 밀려오는 둘째에 대한 압박과 노산에 대한 걱정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또 한 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성별을 확인하러 가던 날,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다짐했다.


'아들 아니면 셋 간다!'


이 집안에서 아들이란 존재가 남다르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면 '하나 더 낳으면 되지'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임산부인 나에게도 뱃속의 아이에게도 좋을 것만 같았다. 초음파상에서 아들 같아 보인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셋째는 없구나'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병원을 나오던 찰나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서 뭐라 카드노?"

"아~ 아들이래요."

"우와~!!!!"


기대 가득한 어머니의 물음에 심드렁한 내 대답이었지만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는 마치 김연아가 금메달을 땄을 때 보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때 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그날 마침 어머니는 계모임에 가셨는 데 초조한 마음에 연신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시니 친구분들이 지금쯤 결과가 나왔을 꺼라며 그냥 먼저 전화해보라며 부추기셨단다. 그렇게 아홉 명 할머니가 한 자리에 모여 통화 연결음을 배경 삼아 한 마음으로 아들을 기원하니 그 바람이 하늘에 닿아 아들을 점지해 주셨고, '아들'이란 한 마디에 모두가 손뼉 치며 환호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그날 할머니를 따라갔던 딸은 터를 잘 판 것이 기특하다며 꼬깃꼬깃한 현금 9만 원을 손에 쥔 채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마지막 태교 여행


시댁과 우리 집은 같은 대단지 아파트 안에서도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 왕래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는 시부모님 뿐만 아니라 시할머니, 사촌 아주버님, 사촌 시누이까지 모두 함께 모여사는 '시월드' 그 자체였다. 가끔 친구들에게 '그 동네에서 나는 길 가다 코도 못 판다' 농담을 했지만 베란다에 불 끄라는 전화를 받을 때면 그 말이 더 이상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틀이었다. 원래도 고분고분한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귀한 손자를 낳아 드렸으니 나는 집안에서 조금 더 목소리의 볼륨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와의 불편한 신경전에도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둘째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반가운 마음과 함께 떠오른 걱정은 다름 아닌 '카시트'였다. 수많은 육아 교실은 물론이고 매체에서도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연신 강조하지만 어머니 사전에는 그저 모성애가 없는 자들의 편협한 생각일 뿐이었다. 그렇게 첫째가 조리원에서 나오던 날부터 고부간의 카시트 전쟁이 시작되었다. 곧 죽어도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야 된다는 내게, 잠깐인데 안고 가면 되는 걸 뭘 그렇게 유난이냐고 돌아온 시어머니 대답은 고구마 백개가 아닌 천 개를 물 없이 한꺼번에 삼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덕분에 우리들의 나들이는 매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또 겪어야 한다니 머리가 지끈거렸고 이번에도 타협은 없을 거라며 미리 아이 아빠에게 선전포고를 해두었다. 그러다 결국 전쟁은 최후의 접전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사진관까지 아이 아빠와 둘째가 셋이서 함께 출퇴근을 하곤 했었다. 그날은 마침 사진관에 어머니가 오셔서 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 데 카시트에 앉아 목이 터져라 울고 있는 아이를 어머니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하셨다. 그러면서 아이를 안고 가야겠노라 소리치셨고 나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어머니는 도저히 못 듣겠으니 걸어가시겠다며 차를 세우라고 하셨다. 나는 이에 지지 않고 아이 아빠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한 뒤 어머니를 내려드렸다. 그날 이후 고부간의 갈등은 냉랭함으로 이어졌고 결국 몇 달 후 우리는 사진관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사를 나가던 날, 어머니는 눈물을 쏟아내셨는 데 그 눈물에 대한 지분 중 55%는 나에 대한 원망일 거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백만원을 더 주고 얻은 뷰 맛집


요즘 같은 세상에 사진관해서 먹고살겠냐던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보란 듯이 바빠진 며느리를 바라보며 어머니의 한숨은 어느새 감탄으로 바뀌었다. 오히려 육아와 살림을 맡게 된 아들에게 쏟아지는 잔소리가 더 많아지셨다. 그러다 아이 아빠가 사업을 해보겠노라 베트남으로 떠난 뒤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며느리를 위해 금요일 저녁이면 자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주셨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불금의 자유 부인이 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지만 이내 곧 엄청난 부작용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부터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2년 가까이 매주 월요일 오후가 되면 공포스러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말씀은 '주말만 지내고 오면 아이가 통제가 안 돼요!'였다.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나도, 나의 사과를 듣고 있는 선생님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는 주말 동안 천상천하 유아독존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티브이 앞에 앉아 밥을 받아먹었고 휴대폰이며 태블릿이 있으니 다른 장난감들은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주말에 자신을 데리고 가는 할머니가 아이에게는 최고의 존재였다. 그쯤 아이 아빠가 베트남에서 하던 사업이 코로나로 인해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어쩔 수 없이 시댁들이 몰려있는 시월드 속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걸 부족했던 손자를 매일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어머니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나는 유치원뿐만 아니라 태권도장에서 까지 수시로 전화를 받게 되었다.


"어머니, 아무래도 아하는 수업을 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도복을 갈아입지 않겠다며, 수업을 하지 않겠다며,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며. 수시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아이를 받아주는 것이 더 이상은 어려울 것 같다고 관장님은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나는 큰 아이와 함께 보내면 괜찮을 거라는 조건을 내걸어 어떻게든 아이를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운동이라도 해야 아이가 체력도 인내심도 배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전화를 받지 못하는 날에는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셨고 어머니는 아이가 안쓰러워 버선발로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셨다. 그렇게 1년 동안 유치원과 태권도장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손자에 대한 남다른 내리사랑이 자신의 것과는 다르다는 게 느껴졌던 것인지 어느 날 아옹이는 할머니에게 또랑 한 목소리로 당돌하게 팩폭을 날렸다.


"할머니가 그렇게 오냐오냐 하니깐 아하가 버릇이 없잖아요!"


퇴근 후 집으로 온 나를 붙잡고 그날 있었던 일을 전해주시던 어머니는 기가 막히다는 말로는 심정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듯 눈물을 훔치셨다. 그리고 그날의 그 눈물에는 그 엄마의 그 딸이라는 뜻이 75% 정도 섞여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이야 유치원이니 어떻게든 넘어간다지만 학교에 가서도 저러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걱정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걱정 끝에 호주 유학을 결정하게 되며 나의 또 다른 걱정은 이 사실을 어떻게 어머니께 전하냐는 걸로 바뀌게 되었다. 출국까지 한 달을 앞둔 주말 저녁, 그간의 날들처럼 평범하게 시댁에서 저녁을 먹고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곧 유학을 가게 됐다고 말씀드렸다. 아버님의 반응은 '느그 새끼 느그가 알아서 해라'였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이 생애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을 애절하게 사모하는 손자와의 생 이별에 이미 나라를 잃은 듯한 허망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그리고는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잘할 애들을 세상 참 별나게도 키운다'라는 말로 며느리를 향한 원망을 쏟아내셨다. 그래도 이 정도면 무난하게 지나갔다 싶었지만 어머니의 눈물이 한 달 동안 마르지 않았는 것을 보며 나는 한 달이 어서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학교 앞 흔한 공원 뷰


호주에서 처음 초등학교를 다니게 된 아하는 호주의 학교 생활이 꽤나 잘 맞는 것 같았다. 개인의 학습 방식을 고려해 앉거나 서거나 심지어 누워서도(?)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 아이는 빠르게 적응했다. 비록 여전히 똥고집을 부려 곤란한 때도 가끔 있었지만 말 안 통하는 학교에서 도시락을 비워 오는 것만으로도 그저 기특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특출 난 친화력을 뽐내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고 하루가 다르게 영어 실력이 늘어나더니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교장선생님 상'을 받게 되었다. 뭐든지 척척 잘하는 '김아옹'이 아닌 뭐든지 일단 모른다가 먼저인 '김아하'가 전교생 앞에서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단상으로 올라가는 그 모습은 지금도 마음을 몽글해지게 만든다. 그렇게 낯선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 엄마로서는 뿌듯한 일이었지만 할머니로서는 내심 섭섭한 일이었다. 그래도 2년이 금방 지나가리라, 곧 그날이 오리라 손꼽아 기다리시는 어머니에게 이혼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나의 폭탄 발언은 다시 한번 가슴에 대못을 정으로 내리치는 일과도 같았다. 물론 이곳의 생활이 마냥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며 쑥쑥 자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선택이 옳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1년 6개월 만에 한국에서 아이들의 키를 다시 쟀을 때 큰 아이는 13cm, 작은 아이는 10cm 정도가 자라 있었다. 자라난 것은 키뿐만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그런 아이들을 대견스레 자랑해 보이는 나의 마음과는 달리 어머니에게는 그저 어린것들이 얼마나 고생했겠냐는 모습으로만 비쳤다. 그리고 또다시 내리사랑을 앞세워 티브이 앞에 아이를 앉히고는 밥을 떠먹여 주셨다. 3주간의 한국 생활은 아이가 예전 습관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그렇게 내가 정성스레 쌓아 올린 공든 탑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호주로 다시 돌아오던 날, 나는 또다시 애들을 데리고 가냐는 어머니의 원망을 들어야 했고 며칠 뒤엔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아이의 응석을 받아내야 했다.


이곳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요즘 아이들과 나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대화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이들의 책장에는 한국어 책이 영어 책에 가려지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 속 말들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다. 할머니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자랑스레 그림을 내밀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할매는 그런 꼬부랑글씨 몰라, 한국말로 해!'였고 아이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럼 나는 실력 없는 통역을 자처하지만 아이는 곧 흥미가 없다는 듯 화면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럼 나는 기어코 다시 아이를 끌어다 옆구리를 찔러가며 더 통화를 하라며 눈치를 주고 아이는 아픈 옆구리를 문질러가며 나를 흘겨본다. 그런 아이의 눈빛을 놓치지 않는 어머니는 왜 귀한 손자를 타박하냐며 기어코 나를 향해 한 마디 쏘아 부치시고는 아이가 기가 죽을세라 서둘러 전화를 끊으신다. 이 복잡한 삼각관계는 마치 먹이사슬과도 같아 누구 하나는 반드시 희생양이 되어야만 하고 그건 당연하게도 내가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어머니의 단골 멘트는 '누구 손자가 이렇게 잘 생겼노', '눈썹부터 콧구멍까지 하나 삐뚤어진 게 없다'로 아들의 외모를 극찬하신다. 매번 듣는 우리야 익숙하지만 이따금 옆에 계신 어머니 친구분들은 그 말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그럼 어머니는 본인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직접 보라며 휴대전화를 들이대시고 끝내 잘 생겼다는 대답이 나와야 돌려받으신다. 예전에 친정 엄마가 손주 자랑 하려면 500원씩 내고 해야 된다는 말을 하셨는 데 실제로 어머니가 그래야 했다면 이미 42평 아파트는 날아가고 없었을 것 같다.


꼬부랑 글씨로만 가득 채워진 뉴스페이퍼


이런 일들을 되짚어 보자니 아마 나는 아이들이 받고 있는 무한한 사랑을 내심 질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볼 때마다 쏟아지는 예쁘다는 말과 밥만 잘 먹어도 듣게 되는 칭찬, 존재만으로도 귀하게 여겨지는 그 말들이 그저 부럽다. 그리고 그런 시어머니가 우리 아이들의 할머니라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비록 이제는 '전'이 붙게 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지만 12년의 세월 동안 고운 정, 미운 정이 쌓인 만큼 훗날 첫 제사상만큼은 내가 차리리라 아이 아빠에게 큰소리쳐두었다. 물론 '새'며느리가 들어온다면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만 지금의 내 마음으로는 꼭 그렇게 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제사상 중앙에는 적당히 매운 아귀찜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게 어머니와 내가 유일하게 같이 좋아했던 음식이었으니 아마도 그날만큼은 어머니도 나의 선택을 이해하시리라 생각된다. 그날이 아주 나중이었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잘생긴 손자이자,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의 아들에게 백수연 축하까지 다 받으실 수 있도록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만수무강하십시오, 황여사님.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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