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말에 대하어
내가 중학생일 때.
몇몇 어른들과 대화를 하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러나, 손등을 반대쪽 손으로 세게 긁고, 손톱을 세워 주먹을 쥐듯이 엄지를 쥐어뜯고, 눈을 크게 부릅뜨면서 위쪽으로 눈알을 굴리고, 턱이 살짝 저릴 때까지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았다. 참고 있으니까, 울고 싶은 눈이 맞았다. 또, 우는 모습을 보이기가 죽도록 싫어 자존심을 부린 치기도 맞았다. 누군가는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기도 했고, 거기에 나는 눈물을 더 참아야 하는 상태가 되어 목구멍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하는 편이 나에겐 더 불편하고 싫다고, 대답했다. 내 속은 언제부터 왜 그렇게, 탈수 돌린 빨랫감처럼 쥐어짜면 물이 나올까 말까 한 텁텁한 상태가 되었을까.
그저 중2병이라고 넘기기엔 평생 조금씩 뜯어봐야 할 더러운 벽지 같아서, 나는 그때 생각을 종종 한다.
그때 나의 '울 것 같은 눈'을 언급해 준 사람들을, 나는 고맙게 여겼었나? 국어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들,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 중3 담임 선생님.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어른들의 관심은 당시 나에게 와닿기엔 너무나 멀었다. 너무도 멀고, 미숙하고, 생경해서 붙잡을 수 없었고, 결국에 그건 생각할수록 더 아파지는 말들로 남았다.
"너 지금 이러는 거 나중에 어른되면 기억도 안 날걸?"
"괜찮니? 네가 아까 화장실 문을 너무 세게 열고 들어가길래 깜짝 놀랐어.... 괜찮다고 해줄래?"
상처가 되기도 했고, 살면서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친절한 동시에 가장 불편한 말이 되기도 했다.
도대체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나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길래 이리도 싫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유년기부터 어른이라고 다 어른이 아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먹기 싫은 미역줄기를 갈기갈기 젓가락으로 찢어놓는 나를 두고, 옆반 선생님과 서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재는 왜 저러는 거야?"
"먹기 싫어서 저러는 거지 뭐."
라는 대화를 나눴던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
손세정제를 치약으로 착각하여 칫솔에 묻혀 입에 넣고는 뜨악하며 눈물 흘리는 친구를 하하 웃으며 두 팔을 대롱대롱 잡고 우리 반까지 와서
"OOO, 치약이랑 데톨이랑 헷갈렸대요~"
하며 창피를 준 유치원 옆반 선생님.
내가 수저통을 깜박해서, 1층 조리실에 수저를 빌리러 갔을 때, 경비실 같은 방 안에서 미닫이 창문을 조금 열고 앞에 명단을 적고 가져가라는 말을 하고는 창을 닫으셔서, "네"라고 대답을 했다가, 못 들으셨지 싶어 고개를 끄덕끄덕했는데, 대뜸 문을 열고 나와서 어디 어른한테 버릇없게 고개만 까딱까딱하냐고 화를 낸 초등학교 영양사 선생님.
아이 양손을 잡고 원심력으로 빙빙 돌리는 장난으로 체육 시간에 아이들을 놀아주다가 본인이 운동장 바닥에 아이를 내팽개치고는, 넘어져 우는 친구한테
"아~ OOO 또 울어?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래."
라고 말한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
전부 기억난다. 차곡차곡 꾸준히 쌓인 감정의 기피가. 이미 사춘기를 겪기 전, 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한가득 안았다. 미숙한 나에게, 어쩌면 더 미숙한 모습을 보여준 그들은 지울 수 없었고 다만 이제 와서야 타산지석 삼는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나에게 이런 사람들은 선생님이 아니었으며, 어른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 기억들을 끝끝내 곱씹으며 도달한 결론은 이런 것이다. 나였으면 그때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했을까 하는 것들.
이러한 이유로 오은영 박사님의 방송에 한창 빠져있던 때가 있다. 금쪽같은 내 세끼를 보면 나는 항상 아이의 입장이 더 이해가 잘됐다.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박사님이 말해주기 전에 그 아이의 행동 원인을 척척 맞췄다. 내가 알지 못한 건, 그때 어른이 해줘야 할 말들이었다. 그건, 응당 어른이라면 가지게 되는 것 같은 게 아니었다. 어릴 적에 받지 못했다면, 성인이 되어서 부단히도 노력하여 배워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방송을 보며, 어린 시절 나의 금 간 마음에 풀칠을 했다. '어른'이 해주길 그토록 바랬지만 나조차 그게 뭔지 모르던 말들을 적확한 언어로 들으며 배웠다. 나도 어이가 없을 만큼 조금 많이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청소년기 때까지만 해도 이런 자신을 두고 스스로, 모자람 없이 자랐건만, 뭐가 그리도 허했을까. 의문이던 것들. 결국엔 스크린을 통해 전달받은 어른의 말이 나를 녹였다.
당연히, 아이를 다루는 건 어렵다. 좋은 말 수십 번 해도, 정말 정신없고 힘들 때 툭 나온 말 한마디 같은 게 아이 마음엔 쿡 박히기 십상이니까. 아마 나에게 박힌 말들도 비슷한 연유에서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짧지만 1년 조금 넘게 어린이 영어 클래스를 해보고 뼈저리게 느꼈다(지금은 그만둔 지 오래다). 그럼 수시간씩 몇십 명의 아이를 돌보는 선생님이나, 하루 종일 붙어있는 부모는 오죽할까. 사실 그 일을 시작한 후, 어려울 때 박사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튜브에 올라온 방송을 보기 시작한 게 계기였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의 속마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비슷한 사례를 검색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이럴 때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그런 걸 배웠다.
놀랍게도 오은영 박사님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고 효과를 톡톡히 봤다. 실제 수업 시간에 내가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며, 거의 공격적이지 않은 언어로도 아이들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 내 어린 시절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 내가 어렸을 때 선생님이 이렇게 말해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말들을 내 입으로 했다. 그 순간만큼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족감 같은 것이 들었다. 당연히, 내가 언제나 오은영 박사님 같은 선생님이었을 리는 없다. 딱딱한 언어로 아이를 대하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차갑게 대하는 날도 수두룩이었을 테다.
다만 이젠 무엇이 '어른의 말'인지 조금은 안다. 후회할 말을 뱉었다면, 속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살살 수정한다. 나중에 아이한테 사과를 한 적도 있다. 비단 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태도만이 아니라, 내 전반적인 삶의 태도에도 영향을 많이 미쳤기에 난 이것을 굉장히 중요한 경험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내 결론은 이거다
편식을 하는 아이한테는
"OO아 혹시 이거 못 먹겠니? 선상님이랑 같이 딱 한 번만 먹어볼까? 아주 조금만! 맛보니까 어때? 아 OO 이는 미역이 미끈미끈해서 싫었구나"
실수를 한 아이한테는
"괜찮아 아이고 놀랐지? 그랬구나, 입 헹구면 되지 괜찮아 진짜 이상한 맛이 나겠다 괜찮아? 가글 한번 할 수 있겠니?"
넘어져 우는 아이한테는
"선생님이 미안해. 괜찮니? 놀랐겠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어, 조심했어야 하는데. 여기가 아프겠구나, 후하- 숨을 천천히 깊게 쉬어볼까? 진정이 좀 되니? 속상했겠다. 보건실 갈 수 있겠니?"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자!
1,2 문단 초안
오존 - jon1, jon2 앨범을 들으며 100번 버스에서
나머지
2025-09-25 멘체스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