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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롤 프로게이머를 좋아하게 된 경위

by 이윤서 Hayley

2024-12-01


11월 2일 토요일. 중간고사가 끝나서 대학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한잔하자고 모인 날이었다. 딱히 통금이 있지도 않고 막차 걱정도 없이 신촌에 사는 친구A가 11시에 가야 한다고 하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어떤 경기를 봐야 한단다. 그게 2024 롤드컵 결승이라는 말을 듣고는 수긍했다. 리그오브레전드 할 줄은 몰라도 그 대회가 얼마나 권위 있는 대회인지 정도는 알았기에. 그래서 정말 11시에 헤어지고는 지하철을 타서 유튜브를 켰는데 구글 놈들이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아니면 기염을 토하는 64만명이라는 시청자 수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롤드컵 경기 라이브를 제일 상단에서 추천해 주는 게 아니겠는가. 은근히 궁금하기도 하여 영상을 재생했다. 이제 막 시작해 오프닝 무대가 진행 중이었는데 참 우연히도 내가 몇 년 전에 알게 되어서 노래를 많이 들었던 아시니코라는 랩퍼가 공연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변한 게 없이 파격적인 (지금 보니 징크스 같은) 새파란 머리칼을 감상하며, 술기운에 적당히 몽롱하게 죽 보았다. 그 뒤엔 최근에 재결합하여 활동 소식이 많이 들리던 린킨 파크가 나왔다. 오 멋있네, 하며 사실 반쯤 존 듯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노래 중후반에 선수들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올 때 구마유시 선수가 센터에서 브이를 하며 나오던 모습만큼은 생생하다. 구마유시 선수는 페이커 선수 다음으로 바이럴(가령, 못 말리는 아가씨 같은...)이 많이 된 선수라 적당히 캐릭터를 알고 있어서 저 너머에 있을 롤잘알 관중들과 함께 웃을 수 있었다. 그쯤부터 본인도 모르게 나를 롤에 입문시킨 친구A에게 주접 카톡을 날렸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롤 하나도 모르는 사람의 롤드컵 결승 리뷰’ 정도였는데 말이다. 지금 다시 그때 카톡을 보고 있는데 웃기다. 그렇게 집까지 가서 해장으로 라면을 끓여서 먹을 때도 노트북으로 넘어가 이어보며, 2024 롤드컵 결승을 새벽 3시반까지 전부 관람했다.


일단 케리아가 좋아진 것은 분명 롤드컵 이후가 맞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티원 선수들도 좋고, 좀 귀엽네. 정도였던 것으로 사유가 된다. 그리고 롤드컵을 전체 관람한 여파로 나도 롤 자체에 관심을 조금은 갖고 있었고 유튜브 알고리즘도 나에게 롤, 특히 T1을 떠먹여 주어 적당히 받아먹던 차에 결정적으로 11월 9일. A씨가 부산(지스타)에 갈 사람을 구하고, 내가 냅다 손을 들면서부터 내 관심사 내지는 알아보는 정보들이 급히 게임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부터 실제 부산에 내려간 15일까지 알게 모르게 케리아를 복용해 온 것이다. 솔직히 14일 정도부터는 케리아가 계속 생각났던 것 같다... 그리고 16일에 낭만 넘치게 해운대 바닷가를 걷다가 내가 생각보다 케리아를 아주 좋아하게 된 것 같다는 고백을 엄한 곳에 했더랬다(하지만 나도 황당한 이 입덕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향할 곳이 한 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확실히 류민석씨가 내 최애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것은 17일에서 18일 넘어가는 새벽인 것으로 보인다(친구 B에게 케리아가 내 최애라고 선언). 그러니 롤드컵 이후 2주 만에 생판 이름도 모르던, 심지어 따지자면 연예인도 아닌 e스포츠 선수를 잔잔하고도 빠르게 호로록 집어삼켜 버린 사태가 나도 참 당황스럽다.


좋은데 이유가 어딨냐는 말처럼 그냥 귀엽고, 좋으니 좋은 건데, 그래도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이돌로 치면 확신의 입덕 카운터가 정확히 들어맞은 것인데 다음과 같다.


1) 내 취향으로 귀여운 외모와 골격에, 애교가 많은 성격까지 굉장히 매치가 잘 됨. ex. 2024 롤드컵 4강 티젠전 싫어 싫어 영상(...)

2) 본업 모먼트. 본업을 잘하고, 그에 진심인 모습. 1군에서 뛰는 선수이니 실력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너무나도 진심이어서 나오는 모습들. ex 2022 롤드컵 결승 DRX에게 패배 후 오열하는 영상 (ㅠㅠ).

3) 서사. 오타쿠들이 죽고 못 사는 서사인데 2) 에서 언급한 영상만 이해해도 서사가 미쳐버린 것. DRX에서 데뷔해서 굳건히 몸집 키워서 나오고는 다음에 해에 결승에서 만난 상대가 친정팀이라는 것이 진짜 소년 만화 설정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데프트 선수와, 같이 뛰던 표식 선수까지 1년 만에 다른 팀으로서 무대에서 만나는 것도 그렇고.


딱. 이 세 가지 요소를 보고 입덕해 버렸다. 너무도 속절없었다. 최소한 마음속에 오타쿠 한명씩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걸 당해 낼 수가 있을까. 적당히 취향에 맞는 외모를 가진 어떤 몰랐던 연예인이 귀여운, 멋진, 아무튼 자기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는 영상, 본업을 너무 멋있게도 잘하고, 또 그러다가 잘 안 풀려서 모르는 사람이 봐도 마음 아프게 우는 영상, 그 사람의 과거에 했던 행적들에서 한눈에 읽히는 어떤 재밌는 서사. 이 모든 것을 2주 내내 유튜브가 당신에게 가마솥째 퍼부어 주는 은혜를 받는다면 전보다 그 연예인 안 좋아할 자신 있냐는 말이다. 일단 난 꽤나 빠르게 운명에 순응하는 쪽을 택했다. (12월 2일 케리아 팬 X 계정까지 팠으니 이제 강을 건널 대로 건넌 것...)


별개로, 롤드컵을 감상하며 생각한 롤 대회의 셀링 포인트를 나름대로 적어봤는데, 다시 봐도 꽤 일리 있다.


1. 선수들이 본인(겜돌..)의 외적 피지컬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아 친근하면서도 '형'느낌임. 순수 게임 피지컬이 멋짐.

2. 캐스터 아조씨들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 잘 말해주고 맨날 같은 분들이라 내적 친밀도 높음.

3. 덕후 비율이 높아서 경기 전후 연출을 쌈@뽕하게, 어떻게 보면 오글거릴 수 있는 걸 자본력으로 웅장하게 만들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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