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원에 즐기는 이동형 독서실
2025-03-08
Chappel Roan의 <The Rise and Fall of a Midwest Princess> 앨범을 들으며
지금. 경춘선 숲길 옆에 붙어있는 버스정류장에서, 2시간 후 있을 독서모임 사람들과의 점심 약속까지 아직 다 읽지 못한 삼체 2를 최소한 중간까지는 읽기 위해서, ADHD 약을 믿고 무작정 버스를 타려 한다.
목적지 없이 아무 대중교통을 잡아타는 것만큼 홀가분한 일이 또 없다. 아니, '아무 대중교통'이 아니라 '버스'다. 지하철은 덜컹거림도 상대적으로 적고, 운이 지지리도 나쁘거나 보는 눈이 안 좋아 20분 넘게 자리에 앉지 못할 수도 있다. 나처럼 서울의 가장자리에서 중심부로 향하는 길이라면 더더욱!
또 무엇보다 지하철은 풍경이 없으니까. 동네의 제일 한적한 곳부터 시작하여 복작한 시장 앞, 역 주변, 안 가본 골목 속까지 콕콕 찔러주는 버스여야만이 독서의 독특한 맛을 준다. 가끔 한 번씩 버스에서 책이 왜 그리도 잘 읽히는지. 특히 30분 이상 타야 할 때에 그렇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펴는 게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앉아서 멍도 좀 때리다가, 핸드폰에 깔린 모바일 게임을 두 바퀴 정도는 돌고 나야 할 일이 떨어져, 그땐 SNS를 열고 의미 없는 스크롤을 좀 내리다가, 문득 가방에 있는 책의 존재를 떠올렸을 때. 그때 읽는 책만큼 집중이 잘 되는 것도 없다.
엉덩이가 뜨겁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엉따'가 아주 잘 되어있는 게 서울 주민으로서 꽤나 자부심이 드는 부분이긴 한데 오늘은 당황스러울 만큼 완연한 봄날씨에 해가 따듯하고, 그저 앉아서 어느 버스를 탈지 고민과 깊은 멍 때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엉덩이가 빨리 뭐라도 타고 가버리라고 재촉하는 거다.
그리하여 어느 종점까지 30분이 조금 넘게 달릴 버스를 하나 골라잡아 기다린다. 어차피 남는 시간이니, 10분 넘게 남은 버스를 여유롭게 기다리는 중인데도 수시로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을 흘끔흘끔 보고 있다. 일없어도 10초에 한 번씩 핸드폰을 확인하는 현대인답다. 현재 시간 11:05, '[대기 상태] 나쁨'이란다. 아이고 미세먼지는 생각을 못했네, 하지만 뭐 어떤가!
버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도 따로 있다. 기사님 바로 뒷자리! 교통사고 났을 때 가장 덜 다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무시할 수 없겠다마는, 다른 자리가 따라올 수 없는 그 자리만의 아늑함이 좋다. 우선 다른 자리보다 높은 곳에 있다. 이 지점 때문에 트럭에 타듯이 읏차! 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래서 아이와 보호자 승객, 노인 승객분들은 주로 그 자리가 비어있어도 뒷자리로 쿨하게 걸음을 옮기신다. 버스에 오르기 직전까지 자리 앉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다가 교통카드 찍으며 양쪽 둘러보는데 눈앞에 비어있는 딱 하나의 자리가 주는 기쁨을 아는가?
지하철 자리에 앉아서 스마트폰이나 책을 편히 보려 하면, 앞자리 사람이나 서있는 사람들과 내가 보는 콘텐츠를 고스란히 공유하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저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두꺼운 책 읽는 교양 있는 사람이랍니다." 피력하는 꼴 같아 혼자 괜히 의식하게 된다는 고백도 해보겠다. 버스 기사님 뒷자리의 이점으로 남들보다 조금 높고 구석진 곳에서 나 혼자 주섬주섬 꺼내어 책을 펴는 감성이 썩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