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태국을 여행하다가 육로를 통해 라오스로 넘어가기 위해 치앙라이까지 올라갔던 나는 빠이에서 만난 일행들의 꾐에 넘어가 라오스에 가지 않고 인도로 떠나기로 계획을 완전히 뒤엎었다. 방콕에서 인도 콜카타까지 넘어가는 비행기표를 사고, 인도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치앙라이에서 다시 방콕으로 돌아왔다. 신청한 인도 비자가 발급되기까지는 4~5일 정도가 걸렸고, 나는 그 사이 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꼬창(Ko Chang)에 다녀오기로 했다.
방콕에서 꼬창에 가려면 우선 뜨랏까지 7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간 뒤, 다시 뜨랏 선착장에서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면 되는데, 보통 방콕 카오산로드에 있는 여행사들에서 카오산로드에서 출발하는 여행자 버스와 배편을 묶어 한꺼번에 판매한다. 태국 여행을 혼자 왔지만 현지에서 계속해서 어쩌다 보니 일행이 생겼었고 인도도 같이 가기로 한 일행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꼬창만큼은 조용하게 혼자 다녀올 심산이었다.
뜨랏에서 꼬창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내 뒷자리에는 한국인 4명이 앉았다. 뒤에서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혼자 조용히 다녀오고 말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른 척했다.
그때, 배가 출발하기 직전 검표원이 표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버스에서 내려 뜨랏 선착장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버스 티켓을 보여주고 배 티켓을 받았어야 했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달랑 버스표만 든 채였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뒤로 돌아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국인들에게 어디로 가면 표를 바꿀 수 있는지 물었다. 출발 직전에 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도 놀랐지만 그 사람들도 앞에 조용히 앉아 있던 내가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표를 바꿀 수 있었고, 우리가 탄 배는 꼬창을 향해 출발했다.
꼬창에는 몇 개의 비치가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화이트 샌드 비치로 선착장에서 가장 가까우며 편의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어 주로 휴양을 하러 온 가족단위 여행객들이나 노부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화이트 샌드 비치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론리 비치라는 곳이 있는데, 화이트 샌드 비치와는 상반된 분위기로 배낭여행족들이 많고 따라서 저렴한 숙소도 훨씬 많다. 나는 당연히 비교적 시끌벅적한 화이트 샌드 비치보다는 론리 비치로 가려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에서 만난 뒷자리 한국인 4명이 자신들은 화이트 샌드 비치로 가는데 딱 이틀만 있다가 방콕으로 돌아갈 거라며, 꼬창에서 4박 5일을 머물기로 한 나에게 이틀은 자신들과 함께 화이트 샌드 비치에 묵고 자신들이 가고 나면 론리 비치로 가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화이트 샌드 비치 자체는 끌리지 않았지만 어차피 나머지 이틀은 가보고 싶었던 론리 비치에 묵을 수 있고, 어쩐지 처음부터 좋은 사람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들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들을 따라 화이트 샌드 비치로 간 것은 내가 꼬창으로 들어가면서, 아니 태국을 여행하면서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다.
화이트 샌드 비치에서 지내는 동안 낮에는 스쿠터를 타고 섬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해변가에 위치한 식당에서 해산물을 왕창 먹고 밤바다를 수영했다. 론리 비치에서 이름처럼 정말 ‘론리 하게’ 박혀 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일들이었다.
나는 치앙라이에서는 스쿠터를 잘 타고 다녔지만 여전히 초보 운전자였기 때문에 길이 위험한 편인 꼬창에서는 항상 남의 스쿠터 뒷자리를 차지했다. 한 번은 혼자 스쿠터를 타보겠다고 나갔다가 5분도 채 못 가고 끝을 모르게 펼쳐진 오르막과 내리막길의 연속에 질려 되돌아온 적이 있다.
밤바다는 무척 예뻤다. 5월 초의 바닷물은 밤에도 차갑지 않고 오히려 따뜻했다. 해변에서 멀어질수록 해변가에 늘어선 식당들의 밝은 조명들과 음악 소리가 희미해졌고, 주변에는 오로지 별이 가득한 까만 밤하늘과 잔잔한 파도소리만이 있었다. 나는 원래 수영을 할 줄도 모르고 물놀이를 즐기지도 않기 때문에 혼자 론리 비치에 있었더라면 밤바다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날 밤, 참 낭만적이었던 꼬창의 밤은 함께 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행들이 방콕으로 떠나고 난 뒤 혼자 론리 비치에 갔다. 바닷가 앞은 아니었지만 방갈로를 잡고 이틀간 혼자 지내며 외로움을 잔뜩 만끽했다. 사람을 외향적, 내향적 성향 둘로 나눈다면 나는 내향적인 쪽에 속했다. 내향적인 사람도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있는 걸 얼마든지 좋아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소모된 에너지를 충전한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편이었기 때문에 나는 론리 비치에 있는 이틀 동안 말 그대로 재충전을 했다..
나의 모든 여행은 사람의 연속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행을 혼자서 출발했다. 처음부터 누군가와 함께 계획을 짜고, 서로 다를 것이 분명한 여행 스타일을 조금씩 양보해서 맞춰나가는 과정이 싫었다. 그냥 혼자 편하게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쉬고 싶으면 쉬고 배가 고프면 먹는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혼자 떠난 여행지에서는 언제나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잠시 인사만 하고 스쳐 지나가는 사이도 있었고, 밥 한두 끼를 같이 먹은 사람도 있고, 장기여행에서는 방세를 아끼려고 룸쉐어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한 달 정도 함께 여행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나에게 있어 사람은 여행의 전부였다. 내 여행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사람’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인 사람들도 많았다. 정반대의 성향이라고 해서 맞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비슷한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거울을 보듯 나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면, 성향이 반대인 사람들을 보면서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그들에게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점들은 배우고 싶어지기도 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만의 매력이 있었고, 모든 만남에서는 배울 점들이 있었다.
꼬창으로 들어가는 배 위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나에게 이런 것들을 확인시켜주었다. 부부 한쌍과 그중 아내의 학창 시절 친구, 그리고 그들이 방콕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20대 남자,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듯 잘 어울리는 조합의 네 사람과의 만남은 내 여행을 더 풍부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