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책과의 첫만남 내 맘대로 계획하기
지난 몇 년 사이 국내에서 원서읽기가 좋은 영어공부 방법의 하나로 알려지면서, 주로 초등학생 나이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도서관형 영어학원'들이 생긴 것을 봤다. 처음엔 학원에 지쳤을 아이들도 독서를 통해서라면 영어에 흥미를 갖기 쉬울 것 같아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도서관을 꾸려 놓은 모습을 보곤 솔직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본 그 학원들에서는 멀쩡한 책들을 레벨별로 구분해서 전부 똑같이 생긴 파일들에 철해 넣고, 제목이 적힌 라벨지를 파일 위에 다시 붙여 관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속지 외에는 책의 모든 특징이 소거된 것이었다.
좀 강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것이 아이들의 독서 경험을 완전히 망치는 무례한 행태라고 생각했다. 독서 경험에서 남길 것이 어휘와 문장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용 확인 질문에 대답하고 완독한 책의 페이지수만 기록하면 그 책이 줄 수 있는 전부를 얻은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표지도 못 보고 레벨에 맞춰 읽은 책이 설레는 기억으로 남기는 힘들 것이다. 누구에게나 영어책과의 첫 만남을 자기 마음대로 계획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
"Never judge a book by its cover."라는 말이 있다.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표지는 내용의 수준을 보장하지도, 충분히 경고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영어책을 고를 때 표지를 유심히 본다. 제목의 타이포그래피와 일러스트 같은 것들이 마음에 드는지 살펴보고,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것은 내가 출판업의 생산자들에게 소비자로서 보내는 일종의 헌사다. 그 전문가들이 어떤 디테일도 대충 넣었을 리 없다고 믿는다. 때문에 독자로서 나는 책의 얼굴에 대해 꽤나 깐깐하고 이기적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면 그 다음엔 조금 더 디테일한 요소들로 넘어간다. 판형과 종이, 폰트, 줄간격, 인쇄 상태 등이다. 나는 폰트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지만 줄간격에는 꽤나 엄격하다. 줄간격이 너무 좁은 책도 별로지만 반대로 너무 넓은 책은 더 별로다. 지면을 허비하고 그만큼 내 시간도 허비하는 느낌이 든다.
독자로서 나는 책의 모든 부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책을 읽기에 앞서 그 말들에 내가 대답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책의 말들뿐 아니라 그 모든 부분에 대답하고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선택하면서 나는 영어책과의 만남을 시작한다.
영어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조금 의아했던 점이 있다. 판형이 너무나도 질 낮고 저렴해 보이는 책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드커버가 아닌 페이퍼백으로 나온 책들은 조금만 힘을 줘서 펼치면 다시 접히지 않을 만큼 제본이 허술해보였다. 종이 역시 폐휴지로 만든 똥종이마냥 거칠고 약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질 좋은 종이를 사용해서 깔끔하고 묵직한 국내도서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처음엔 이런 것이 낯설었지만 곧 장점을 알게 됐다. 책 한 권 한 권을 잘 보존하는 데에 훨씬 신경이 덜 쓰인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대량 생산해서 저렴하게 팔 목적으로 나오는 버전이라 값도 비싸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는 대로 손맛을 입혀 가는 낙도 있다. 마음에 드는 책일수록 여러 번 읽으며 낡아가는 종잇장과 함께 나이 들어 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소장용으로 예쁘고 깔끔하게 나온 하드커버든, 쉽게 구해 편하게 읽도록 나온 매스마켓이든 제각각의 매력이 있다. 유명한 책일수록 여러 버전으로 나오곤 한다. 나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책이면 컬러풀한 소장용 버전을 사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저렴하고 부담없는 매스마켓이나 페이퍼백 버전을 구매한다. 다양한 버전의 판본을 시도하며 자신의 취향을 알아가는 것도 영어책 읽기의 한 가지 재미가 될 수 있다.
나는 영어책 읽기란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거기에 맞는 대화의 상대를 찾고 고르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어실력은 그 부산물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취향 따라 즐기는데 실력도 생긴다니 좋지 않은가. 영어 독서는 이렇게나 편안하고 풍요로운 취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