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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Apr 09. 2023

(45) 기억은 너를 불러오고 -(1)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는가?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미주 1)"


-루이스 부뉴엘, 회고록 중



기억: 우리의 정체성을 담는 그릇


만일 여러분의 가까운 사람이, 똑같은 겉모습을 가졌지만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으며 완전히 다른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그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미주 2). 그는 그저 같은 모습을 가진 것 뿐, 다른 자아를 가진 다른 사람이다(일란성 쌍생아가 그렇듯이).


반대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당신과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당신은 약간의 혼란을 겪은 뒤 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여러분의 오랜 친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러한 사고실험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담아 두는 것은 바로 우리의 기억들임을 보여 준다.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 가며, 경험을 거쳐 얻고 쌓는 기억들은 모여 우리라는 개인을 만든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언어를 사용하는지, 어떤 성격을 가졌고, 어떤 화법을 사용하는지 등등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들은 우리의 기억에 기초해 쌓인 것들이다.

 


기억 그리고 학습: 자연에 대항하는 생명체의 전략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기억하지 못하고 따라서 학습하지 못하는 생명은 자연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 세계에서, 이전의 일에서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나의 미래 행동을 조절하는 기술, 곧 학습이라는 것은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준다. 생명체의 제한된 유전자 속에 모든 것을 미리 적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인간의 유전자는 고작 3기가바이트 정도다. 그리고 설령 모든 것을 적어 둘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이며, 대처의 유연성을 극도로 제한할 것이다! 한 때는 경계했지만 알고 보니 유용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신에 유전자는 기억하고 배우는 방법에 대해 적어둔 것이다(그림 1). 마치 좋은 부모가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게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듯이.


그림 1. 우리의 유전자에는 세상의 삼라만상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지 않다. 대신 그것을 학습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몹시 아팠다면 우린 그 음식을 기피하게 된다(이 기억은 몹시도 강력하고 오래 유지된다. 어렸을 때 한 번 잘못 먹어 식중독에 걸려 수십 년간 그 음식을 기피하는 일이 얼마나 흔한가?). 어떤 장소에서 나쁜 일을 겪었다면, 또는 어떤 행동에 대해 나쁜 결과가 따라왔다면, 우리는 그 장소나 행동을 기피하고 덜 하게 된다.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온다면 반대로 해당하는 행동을 더 자주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개체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준다.


그렇기에 기억이라는 것은 생명체들에게서 아주 널리 찾아볼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은 물론이며, 우리에게 친숙한 개와 고양이와 같은 포유동물, 새들, 뱀이나 도마뱀, 파리들 또한 그렇다. 심지어 300개 남짓한 신경세포만을 가지는 선충들도 기억을 한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꾸물거리는 이 생명체도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어떤 음식이나 냄새에 대한 선호도를 학습한다(그림 2).


그림 2. 작은 모델 생명체, 예쁜꼬마선충. 1mm 도 안 되는 길이에, 959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이 생명체도 학습하고 기억한다(Katz et al., 2019).


심지어 식물들도 기억을 한다. 식물들도 과거에 스트레스를 주는 척박한 환경에 노출된 적이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방어 기작들을 강화시키며, 반복적으로 오는 자극들에는 둔감해지는 기초적인 비연합학습non-associative learning을 할 수 있다. 몇몇 연구자들은 이전에 빛에 노출된 방향을 기억하는 식물의 능력을 발견하기도 했다(논란의 여지는 있다; 미주 3).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는가?


비록 인간이 갖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그리고 개인적인(미주 4) 기억들과 그 결은 다를 지 몰라도, 수많은 동물들이 기억을 하는 모종의 기초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기억하고 그를 바탕으로 학습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한 백여 년에 걸친 연구들이 있다. 지금부터 벼운 산책을 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시작하기 전 미리 밝히자면, 뇌과학이 으레 그렇지만, 이 학습과 기억 분야는 특히나 뇌과학의 분과 중에서도 엄청난 다학제적 연구를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 분과 중 하나다. 인간 심리학을 기반으로, 동물 행동학, 신경생리학적 접근, 수학 모델링과 요즘에는 컴퓨터 머신 러닝, 광학 기술 등 수많은 학문의 첨단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솔직히 이 내용을 다루기가 두렵기도 하다. 나의 세부 전공이 아니기도 하고, 워낙 학문의 깊이가 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루뭉술하게라도 큰 그림을 정리하고, 굵직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과연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추측컨대, 그것은 뇌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뇌에서는 어떻게 기억을 형성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다시 불러오는 것인가? 압도적일 만큼 어려워 보이고, 그래서 도전조차 하지 못했던 이 질문들에 평생을 바쳐 묵묵히 연구해 온 학자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이제 기억의 기초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전의 글에서 살펴보았듯, 뇌는 기초 연산 단위인 신경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측컨대, 기억 또한 뇌 안의 신경세포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은 대충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까?(그림 3)


그림 3. 아래의 단락으로 넘어가기 전, 이 사과를 보라. 모든 독자들은 이 같은 사진을 보고, 저마다 다른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경험해 온 것이 다르기에.

우리의 뇌에는 자극들에 반응하는 신경 세포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볼 때 반응하는 신경 세포 A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우리의 반응을 결정하는 신경 세포들이 있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 반응하는 세포 B, 그리고 반대로 싫어할 때 반응하는 세포 C 가 있다고 치자. 우리가 사과를 보고, 이 새로운 음식에 대한 선호를 기억하고 학습하게 되는 과정을 상상해 보자.

1. 본디, 사과를 보면 A 만 활성화되고, B 나 C 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학습 전).

2. 그런데, 사과를 먹는 도중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면, A 와 B 간의 연결이 강화되게 된다(학습).

이후로 우리는 사과를 보기만 해도(A만 활성화되어도), 좋았던 생각이 난다(B가 따라서 활성화된다).
부정적인 경험이 된다면(사과를 먹던 중, 애벌레를 베어 문다던가), 반대로 A와 C의 연결이 강화되어 우리는 사과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3. 이러한 강화된 연결이 길게 유지될 수 있다면, 우리는 ‘사과는 맛있어’ 또는 ‘사과는 끔찍해’ 라는 내용을 장기간에 걸쳐 잊지 않게 될 수 있다(학습 후 유지).


이러한 가설은 우리의 연상적 기억에 대한 메커니즘을 설명해 준다. A와 B가 반복적으로 제시될 때 이 두 가지가 연계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학습의 형태라면, 이러한 가설은 꽤나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러한 추측을 처음으로 제기하며 모델을 만든 사람이 신경심리학의 창시자인 도널드 헵Hebb 이다. 헵은 “동시적 같은 세포들이 반복적으로 활성화된다면, 해당 세포들 사이의 연결성은 강화될 것이다” 라는 이론(Hebbian theory)1949년에 제시했으며, 이렇게 강화되는 신경세포 간의 연결을 헤비안 시냅스Hebbian synapse 라고 부르게 되었다(그림 4). 동시에 활성화되는 신경세포들은 서로 ‘엮여서’ 같이 활성화되는 기억의 집단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이것을 엔그램engram 이라고 부른다; 그림 4, 좌측). 한 번 엔그램이 형성되고 나면, 상호간에 연결된 강한 연결성 덕에 그 엔그램 안에 속한 신경세포 한두 개가 활성화되는 것만으로 전체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예를 들어, 우리는 한두 단어만 듣고도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게 되곤 한다).


그림 4. (좌) 사과와 바나나를 상징하는 신경세포들의 엔그램(조합; 어셈블리). (우) 자주 사용되는 신경세포 가지들은 점차 커지고 생겨나며, 그렇지 않은 가지는 사라진다.


좋다! 아주 흥미로운 가설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한 가설에 불과한 이 생각을 검정하는 것이다. 신경 세포들간의 연결 강도가 정말로 변할까? 변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변할까? 이 복잡한 과정을 생명체 안에서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 가능키는 할까? 이 위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평생을 바쳤다. 다음 글에서는 이 가설을 검정한 위대한 도약들에 대해 알아본다.




미주 Endnote


미주 1. 본 번역문의 출처는 올리브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의 번역을 옮겼다(알마, 조석현 역). 신경과 의사인 색스가 만난 환자들의 사례를 엮어 낸, 아주 흥미롭고 재미난 책이니,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읽기 어렵지도 않다!


미주 2. 이것은 단순한 사고 실험이지만, 치매나 심각한 기억상실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슬픈 현실이다. 점차 기억이 사라져 가는 가까운 사람을 보는 것만큼 힘든 것은 많지 않을 테다.


미주 3.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는,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기억' 이라고 할 수 있냐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형상기억합금을 보면, 이 물질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일종의 기억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기억이라기보단 물성에 따른 물리적 현상이 아닌가? 언덕 위로 가져온 돌이 다시 바닥으로 굴러가는 현상을 두고 '돌의 위치 기억' 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과학자들도 이 점에 입각하여, 기억이라는 것은 신경세포와 신경계를 갖는 생명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미주 4.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 공간, 사회, 감정의 기억들을 시간에 따라 배열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회상하여 정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내가 십 년 전에 말이야, 어디 음식점에서 누구랑 무엇을 먹었는데 그 때 기분이..."). 이것을 자전적 기억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기억 유형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단지 동물이 의식적인 언어 보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유사한 현상을 그래서 우리는 '유사-자전적 기억' 이라고 지칭한다. 인간은 이 자전적 기억을 통해, 자유롭게 미래를 시뮬레이션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정신적 시간 여행mental time travel' 을 할 수 있다고 받아들여진다.


미주 5. 미주에 미주를 달다니. 그러나 너무 길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분리하였다. 대체 그렇다면 동물들이 이런 기억을 갖는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말하지 못하는 동물을?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행동을 관찰한다. 예를 들어, 원숭이들에게 기억력 테스트를 실시하고, 테스트를 받거나 혹은 포기하기를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면, 이들은 ‘잘 아는’ 테스트에는 참여하고, ‘잘 모르겠는’ 테스트는 포기한다. 이는 이들이 자신의 기억에 대해 접근하여, 내가 얼마나 아는지를 판단하는 메타인지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잘 알려진 덤불어치 연구는 이 새들이 먹이를 저장하고, 먹이의 ‘유통기한’ 과 저장한 시간을 기억하여 상하기 쉬운 먹이를 먼저 찾아 먹는다는 현상을 보여줬다. 이들 또한 시간과 공간을 통합하여 다룰 수 있다는 예시가 된다. 좀 더 깊은 논의를 위해서는 Hampton et al., 2020, Neuropsychologia 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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