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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이 Sep 09. 2021

의사가 되었다.

현실적인 대학병원 인턴 근무 첫째날의 이야기


< 본글 이해를 위한 인턴생활 들여다보기 >


인턴의 삶은 대충 이렇다.

매달 근무하는 과가 바뀌기 때문에, 매달 전달 그 과를 돌았던 다른 인턴에게 인계를 새로 받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턴표", 월별 인턴 배치표 - 각 인턴마다 월별로 근무하는 과를 정해주는 표. 뽑기로 정해진다.


위 표가 내 턴표라고 가정해 보자.

이 턴표에 따르면 나는 4월에 [서] - 서울에서, 필(외) 외과  - 외과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그럼 나는 3월에 서울에서 외과를 돌았던 인턴에게 근무에 대한 인계를 받는다.

반대로 나는 3월에 [서] - 서울에서, 마취 - 마취통증의학과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4월에 서울 마취통증의학과에서 근무하는 인턴 동기에게 인계를 해 준다.



< 본글 - 첫 번째 인턴 이야기 >


의사가 되었다.

방금까지 나는 의대생이었는데, 오늘 오후 12시부터는 병원 인턴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나는 첫달 인계를 날림으로 받았다.

여러 술기들(피 뽑기, 소독하기, 소변줄 넣기 등등)을 실제 환자에게 하는 모습을 하나도 직접 보지 못한 채로 갑자기 네 개의 병동을 담당하는 인턴이 되었다.


나는 원래 겁이 없다.

하면 되겠지.

의사가 되어 환자에게 직접 처음으로 한 술기가 복수천자였던 걸 보면, 난 정말 무모하리만치 겁이 없다.


복수천자라는 술기는 환자의 배를 찔러서 배에 찬 물을 빼내는 것이다.

복수천자


초음파 기계와 복수천자 세트를 들고 환자 병실로 무작정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한 번도 초음파 기계를 배에 대본 적도, 대는 걸 본 적도 없다.**

**나는 한 번도 복수천자를 해본 적도, 하는 걸 본 적도 없다.**

"저기 Couter McBurney's point를 찌르면 돼. 안 되면 McBurney's point를 찔러." 가 내가 받은 인계의 전부였다. (*1)


환자에게 다가가니, 팽팽하게 부푼 배가 눈에 들어왔다.

부푼 배에 폐가 눌려 숨쉬기 버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보호자는 나의 어수룩함을 가늠하듯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내 모든 동작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처음 보는 복수천자 세트를 펼치고 어느 도구를 먼저 써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초음파로 물이 많아 보이는 곳을 확인해 손톱으로 표시한 후, 소위 말하는 빨간약이 묻은 솜으로 해당 부위를 소독했다.

이제 배를 찌를 차례다.

그런데, 이렇게 긴 바늘은 처음인거다.

성인 중지만큼 긴, 긴장된 마음에 거의 창처럼 보이는 바늘을 집어들고는,

환자와 보호자가 알아채지 못하게 낮은 숨을 후 내쉬었다.

찌르자.


윽, 환자가 날카로운 신음을 내었다.

그런데 아뿔싸, 바늘을 통해 물이 나오지 않는거다.

"안나와요? 하, 안나와요? 아니 그게 얼마나 아픈데, 그 전에 했던 사람은 한 번에 했는데..!" 신경질적인 보호자의 목소리.

심장이 냉장고에 넣어둔 쇠그릇처럼 순식간에 얼어붙어 박동할 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는 듯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등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보호자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잔뜩 날을 세운 눈빛이 아프게 느껴졌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황망히 병동 한가운데 스테이션(의료진, 주로 간호사 선생님들이 컴퓨터로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걸어갔을 때 스테이션에는 레지던트(대학병원 수련의 중 인턴 다음 과정)는 없고 교수님만 계셨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짓이다.

인턴이 교수님한테 복수천자를 도와달라고 하다니.


*대학병원 의사가 교수가 되기까지: 인턴 1년 -> 레지던트 (전공의) 4년 -> 펠로우 (전임의) n년 -> 교수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교수님 제가 복수천자를 해본 적도 없고 하는 걸 본 적도 없는데, 지금 환자를 찔렀는데 물이 안나옵니다.."

이때 내 표정이 어땠을지 너무 궁금하다. 내 얼굴을 보고 교수님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교수님이 환자 배를 찔렀고, 물은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환자가 복벽이 특별히 두꺼운 편이었던 것.

그리고 교수님이 직접 복수천자를 안 해본 지 얼마나 오래되었겠는가.


웃기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을 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구나.

안도의 한숨 뒤에 곧, 와 나 쓰레기네, 생각했다.

교수님이 세 번째 시도에 바늘을 아주 깊게 찌르자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겨우 첫 술기를 마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콜폰 (인턴이 담당하는 병동들에서 인턴에게 이런 저런 업무를 해 달라는 지시가 콜폰을 통해 온다) 에 부재중 전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세 통 가량 연속으로 전화를 받았다. 각 병동에서 잔뜩 화가 난 간호사 선생님들이 일이 너무 지연된다며 급한 일들을 처리해달라고 말했다.

젠장, 나랑 교대한, 날림으로 인계해 준 그 인턴이 그날 아침 8시부터 일을 하나도 안 해놓고 던지고 간거다.


모든 술기를 유튜브 보고 익히면서 하나 하나 해결해야하는데, 급한 일이 너무 많은거다.


어느 당직 날의 업무.


부끄럽지만 너무 벅차서 눈물이 나왔다.

나 어떡하지. 의사 할 수 있을까. 오늘 안에 네 개 병동 일을 다 끝낼 수는 있을까. 도망가고싶다.

근데 이러고 있을 수가 없다. 두렵고 자신 없어서 허비할 시간이 없다. 두렵고 자신 없는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괜찮아. 하나씩 천천히 하자. 침착하자. 한 번에 하나씩 집중하자.  

간호사 선생님들이 내 상황을 눈치채고는 너무 친절하게도 더이상 나를 재촉하지 않고 어디서 어떤 도구를 찾아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주셨다.


어느정도 일이 마무리되고 마음이 편해지자 요의가 느껴져 소변을 봤는데 소변 색이 짙은 갈색이라 화들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오후 12시부터 밤 9시까지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거다.

물을 마시지 못해 소변 농도가 높아져 갈색 소변이 나왔던 것.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극심한 갈증이 느껴져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던 것이 기억난다.


당직실 침대에 지친 몸을 눕혔을 때에는 스스로가 너무 기특했다.

나 할 수 있겠다.

오늘 하루 너무 장하다.

잘했다 임하윤.

금방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새벽에 콜이 와서 또 금방 깼지만 말이다.



제 글을 좀 더 가볍게 웹툰처럼 읽고 싶으신 분들!

인스타에도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이디는 baby_doctor_ha 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baby_doctor_ha/

많이 놀러오세요!

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제 글을 읽어 주시는 것만으로 행복해집니다!!




(*1) McBurney point는 배꼽과 오른쪽 골반 튀어나온 곳을 이은 선 위의 2/3 지점을 말함. Counter McBurney's point는 그와 대칭인 좌측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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